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89화 (289/1,021)

#289.

더욱이 이번 일은 고작 최민혁 실장의 전화 한 통화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오성의 황태자 안재운이 최민혁의 전화를 받곤 기꺼이 오성 서울 병원에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었다.

송도연은 때문에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최민혁의 지시를 따랐다.

그런데 세상 일이 참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정성근 대리가 음악 연습실에 일정 이상의 사람 수가 모이면 송도연이 제대로 노래를 못한 채 버벅거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도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가 싶었는데, 송도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송도연은 처음에는 말하기를 망설였지만 결국 자신의 문제점을 털어놓았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의 보고를 받고는 어이가 없었다.

“무대 공포증이라고요?”

“네. 처음에는 보컬 트레이닝이 처음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면 음정이 크게 흔들립니다.”

“흠.”

보컬 트레이너는 송도연이 아직 전문적인 가수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기획 팀에서 따로 전문가를 붙여준 것이다.

예민한 정성근 대리는 이 과정에서 송도연의 문제점을 눈치챘다.

최민혁으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자살하기 전에 예능 무대에 나가서 가창력을 마음껏 뽐낸 이가 송도연이었다.

‘가만 그러면 무대 공포증 때문에 배우로 먼저 이름을 날린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송도연은 가수로 명성을 날린 것은 배우로 데뷔한 후에 십 년이 지난 후다. 그 시간이라면 경험이 충분히 쌓여서 무대 공포증을 고쳤을 수도 있었다.

‘하, 이거 골치네.’

* * *

“죄송해요.”

최민혁이 차량 옆자리에 앉아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송도연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런 일을 경험할 줄은 몰랐다.

“그러면 교회에서도 비슷했어?”

“합창단끼리 같이 모여서 하는 것이라 티가 잘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같이 노래 부를 때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

그럴 수 있다. 미국 카운티의 작은 교회라면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다. 합창단이 모여서 같이 노래하다 보면 묻힐 수도 있다.

최민혁은 딱히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차량 뒷좌석에 앉아서 고민에 빠졌다. 정신적인 문제라서 답이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녀의 연기 재능은 당장 그에게 필요 없다. 오로지 노래 재능이 있어야 했다.

송도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심지어 울먹거렸다. 최민혁의 기대에 못 미친 것 자체가 속상했다.

최민혁은 송도연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위로해 주었다. 무대 공포증은 정신적인 문제다. 괜히 그녀를 건드려 봐야 좋을 것은 없다.

‘자신감이 문제니까. 이런 경우는…….’

인생 1회차 기억을 천천히 되돌아보았다.

망나니 노릇을 한 최민혁은 그래도 나름 능력이 제법 있었다. 그는 다양한 삽질을 경험했다. 심지어 말 안 듣는 애는 두들겨 패기도 했다. 출동한 경찰에 체포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다 소용이 없던 것은 아니다. 막장 짓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자 심리에도 눈을 떴기 때문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에게 말했다.

“홍대 거리로 가주세요.”

“네? 홍대 거리 어디 말입니까.”

“버스킹 하는 곳이면 됩니다. 무대가 있는 곳이면 상관없습니다. 아, 이왕이면 펑크 난 무대가 있는 곳이면 더 좋습니다. 한번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최민혁이 하는 지시는 늘 그랬던 것이라서 뒤따르는 경비 팀에 전화해서 지시 내렸다.

그런데 최민혁은 문득 인생 1회차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자신이 인생 1회차에서 망가뜨린, 실력이 제법 괜찮은 기획사가 있었다는 기억이었다.

‘드센 여자였지.’

한 여자가 자신이 운영하던 기획사를 찾아왔는데, 시작부터 싸웠다.

결국 최민혁은 그 보복으로 메스 기획을 망하게 하고 말았다.

“아, 메스 기획을 한번 알아보세요.”

“…메스 기획 말입니까?”

“작은 기획사일 겁니다. 김지영 사장이란 친구가 하는 곳인데, 아마 홍대 쪽에 연락해 보면 금방 나올 겁니다.”

“…네.”

김명준 과장은 뜬금없는 지시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 * *

메스 기획 김지영 사장은 오늘도 가득한 관중의 뜨거운 분위기에도 화가 났다. 원래 오늘 무대를 참석하기로 했던 한 팀이 그만 사고로 펑크가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급하게 이리저리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올 팀은 없었다. 어느 정도 쓸 만한 팀은 이미 어느 정도 무대 예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 미치겠네!”

그렇다고 기존 팀 시간을 늘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연의 질적 하락이 불가피했다.

차라리 안 하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연출된다.

더 웃기는 것은 입소문을 들어서인지 들어오는 관객 수는 시간이 갈수록 많아졌다. 빈자리가 없으니, 아예 뒤에서 서서 구경했다.

열광하는 커플들은 오늘 무대에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베이스를 맡은 조유찬이 갑자기 전화 통화를 하더니 흥분한 표정으로 자신 앞으로 달려왔다.

“누나, 저기 오늘 무대에 끼고 싶다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

“야, 그러면 무조건 불러!”

“그게 상대가 좀 애매해.”

“아니, 상대가 누구길래 그래? 아, 상관없어. 노래만 부를 줄 알면 무조건 오케이야.”

“최민혁 실장이란 사람인데, 정말 괜찮겠어?”

그녀도 자포자기 심정으로 말하려다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최민혁 실장?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뭐 하는 사람이래? 설마 노래를 처음 해보는 초짜나 뭐 이런 애는 아니겠지?”

“그 있잖아. KM 전자의 오너인 재벌 3세 최민혁 실장 말이야.”

어지간한 밴드라면 넘어갈 생각인 그녀도 버럭 화를 냈다.

“뭐? 야,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분노한 김지영 사장은 한국 재벌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금수저 재벌 3세는 대놓고 경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누나가 아는 그런 재벌과는 좀 달라. 망해가는 KM 전자를 자기 힘으로 우뚝 세운 사람이잖아. 1,500원 주가를 12만 원대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라구.”

“아, 그 최민혁.”

김지영 사장도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KM 전자의 전설적인 주가 랠리는 대학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천문학적인 증여세를 피해간 최민혁 실장의 수법은 언론에서도 계속 말이 나왔다.

요즘 국세청에서 증여세 관련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다 이 최민혁 실장하고 관련이 있었다.

“엿 같네.”

김지영 사장도 성격 같아서는 최민혁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공연을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오늘 무대인 홍대 롤링홀은 홍대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곳으로 수많은 밴드를 배출했다.

이 롤링홀은 특히 다른 공연장에 비해서 이미지가 좋았다.

한 해에 수십 회가 넘는 기획 공연이 이루어지는데, 다양한 뮤지션이 탄생했다. 신인들이 다양한 장르를 섭외하는 곳이다.

이쪽은 아예 전문 엔지니어가 있어서 매번 좋은 공연을 보여준다.

주말에도 좌석이나 스탠딩이 가득 차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런 무대에 재벌 3세를 올리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그냥 일반인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노래에 자신이 있을 텐데…….’

“도대체 이유가 뭐래?”

“나도 몰라. 우릴 도와주는 최 사장님도 건너 연락을 받았으니까.”

갈등하는 김지영을 보다 못한 조유찬이 슬쩍 당근을 내밀었다.

“오늘 무대 자리만 만들어준다면 매년 꾸준하게 무대 공연을 지원하겠대.”

“지랄한다.”

“매년 2~3억 정도 돈을 후원 형식으로 내겠다고 하던데?”

“…….”

메스 기획 자체가 말뿐인 기획사다. 수익도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김지영 사장이 뜻이 맞는 애들을 모아서 만든 회사였다.

2~3억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뭐해? 당장 오케이라고 전화해!”

“쯧.”

조유찬은 혀를 차면서도 딱히 김지영 사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영세한 기획사가 어려운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 *

김지영 사장은 최민혁 실장을 보고 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재벌 3세라면 가지는 이미지를 가지고 최민혁에 대한 선입견을 품었다.

“제안을 들어줘서 고맙네요.”

“솔직히 이런 제안을 받고 싶지 않아요. 돈 때문에 허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어요.”

“압니다.”

최민혁도 순순히 그녀 말을 받았다. 단발 커트 머리에 제대로 꾸미지 않았지만, 그녀 몸매는 진짜였다. 무대를 오가는 사람들 시선이 그녀에게 모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단지 선머슴 같은 태도에 다들 움찔 몸을 피했다.

최민혁 역시 인생 1회차에서 자기 기획사를 찾았을 때 그녀 몸매에 반했다. 얼굴도 단아한 편이지만 이상적인 팔등신 몸매가 주는 유혹을 떨치지 못했다.

그는 당시 김지영 사장에게 껄떡거리다가 원한을 가졌다. 그러곤 뒤에서 몰래 메스 기획을 박살냈다. 김지영 사장은 그 일 때문에 빚을 얻고 말았다. 결국 그녀 가정은 풍비박산 났다.

최민혁은 그 이후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당시 자신이 한 행동은 그저 걸어가는 개미를 밟아버린 행동이기 때문이다.

묘한 시선.

김지영은 의아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혹시 저에 대해서 아세요?”

“아닙니다.”

“그런데 눈빛이……. 아, 아닙니다. 그런데 음악은 해봤습니까?”

“그냥 취미 삼아서 했죠. 정확히는 이 친구를 무대에서 세우고 싶어서 이 자리를 부탁한 것뿐입니다.”

김지영 사장도 최민혁 뒤에서 옷을 잡고 있는 송도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눈만 끔뻑이는 모습이 참으로 귀여웠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김명준 과장에게서 아예 매년 지원 관련 계약서를 받아 김지영 사장에게 보여준 후에 기타를 받았다.

최민혁 역시 이런 무대는 10년이 넘었기에 살짝 긴장했다.

물론 그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기타를 조율하면서 ‘I’ll be loving you!’ 악보를 김지영 사장에게 전했다.

“힙합이네요?”

“네. 너무 어렵게 연주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볍게 진행만 해주세요.”

“…그런데 이 노래는 뭐죠?”

“우리 회사 자회사에서 작사, 작곡한 노래입니다.”

“아, 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노래를 살폈다. 힙합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꽤 괜찮아 보였다.

‘장난삼아서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한쪽에 앉아서 기타 조율을 하는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행동에 망설임 따위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기타를 만졌다.

오히려 수행원이 크게 당황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속에는 ‘실장님이 기타도 칠 줄 알아?’도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시선을 끄는 것은 송도연도 마찬가지다.

‘하, 정말 귀엽네.’

자신도 나름 한 미모 한다고 자부하지만 송도연과 견주기는 어려웠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나이만으로도.

‘쳇.’

* * *

최민혁은 앞 무대 공연이 끝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송도연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괜히 자극해 봐야 마음만 불편해진다는 것은 잘 알았다.

다행이라면 인생 1회차에서 기획사 사장을 한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강요해서는 곤란하지.’

그러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더 힘들어진다.

자신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송도연은 이번 MP3 홍보를 위해서 빼놓을 수가 없는 이다. 그녀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냐에 따라서 MP3 홍보 성과를 결정한다.

그 결과에 따른 차이는 수천억이다.

최민혁으로서는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앞 무대가 끝나자 천천히 공연 무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 자신이 나서자 관객이 웅성거렸다.

예정에 없는 뮤지션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후에 기타를 쳤다.

굳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기보다는 관객에 쉽게 들릴 수 있도록 연주했다.

연주는 어렵지가 않았다.

그 덕분에 ‘I’ll be loving you.’이 가지는 중독적인 멜로디와 메시지가 잘 전달되었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하는 노래임에도 관객은 어느 사이에 신이 나서 어깨를 들썩였다.

힙합이 익숙하지 않은 관객도 고개를 갸웃한 채 환호했다.

[좋은데?]

[단순히 좋기만 한 것이 아냐. 노래가 착착 감기고 있잖아.]

최민혁은 물론 그런 관객의 반응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는 자신의 장기 자랑이 아니었다. 그는 밝게 웃으면서 기타를 쳤는데, 한쪽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송도연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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