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88화 (288/1,021)

#288.

김용만 전무는 눈살을 찌푸렸다. 김현탁 사장의 지적을 무시할 수가 없다. 당장 KM 그룹 구조조정만 해도 그렇다.

다들 쉬쉬하지만, 이 구조조정 때문에 최용욱 회장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설이 파다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지금 필리핀에 가 있잖아. 어쩌면 사실일지 몰라.’

문득 최민혁 실장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KM 전자를 기억했다. 놓친 물고기가 초대형 어종으로 바뀌었는데, 탐욕이 생기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더욱이 김재열 구속에도 최민혁이 손을 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믿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직접 본인이 연루된 것도 아닌데, 최민혁을 찾아가서 항의할 수는 없었다.

‘재열이 이놈 말을 믿을 수가 없으니.’

결국 김현탁 사장이 와서 한 이야기에 머릿속만 복잡했다.

“…네 말은 지금 소니가 콜린스 인수를 적극 고민한다는 소리냐?”

“네. 절대로 최민혁 실장을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만약 이번 일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조 단위의 현금을 그놈이 가지게 될 겁니다. 그러고 나면 그놈이 무슨 짓을 저지르겠습니까?!”

“…….”

김용만 전무도 서랍 안에 둔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김현탁 사장의 지적은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민혁이 그놈이 콜린스를 가지고 있어도 문제야. 2~3년은 꾸준히 매출을 키워갈 텐데, 그걸 보는 것도 고역이다. 그 생각은 안 해?”

“그러니까요. 이대로 그놈을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한번 흔들 필요가 있습니다.”

그 역시 화가 났다. 최훈열 전무가 구속된 이후로 자신이 이제까지 진행한 모든 일이 다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후유, 그게 쉽지가 않아. 재열이 때문에 이곳저곳에 연락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민혁, 그놈이 검찰을 포함해서 권력층 이곳저곳에 인맥을 꽤 많이 심어놨어. 과거의 그 애송이가 아냐.”

정확히는 박두영 부장검사의 인맥이다. 그가 김종도 차장검사를 통해서 중앙지검 이곳저곳에 라인을 쭉 깔아놓았다.

얼핏 보면은 그 인맥이 최민혁 인맥처럼 보인다. 실제로 중앙지검 검사 중에는 최민혁에 관해서 호의를 가진 사람이 많다.

이유는 다른 재벌 3세와는 달리 스스로 힘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최근 상속세 이야기만 나오면 여전히 말이 많은 절세는 최민혁 자신의 탁월한 경영 실력 덕분이라서 법적으로 문제를 건 검사는 많지 않았다.

“그러면 제가 한번 주변 상황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재열이 사건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그래.”

김용만 전무는 이번 일 때문에 크게 낙담했다. 최민혁이 배후라고 하는데, 명확한 증거도 없다. 그저 정황 증거일 뿐이다. 거기다 장남과 차남이 둘 다 감옥에 갔다. 특히 차남 김재열은 죄가 무거워서 앞날이 걱정이었다.

지친 것이다.

김현탁 사장은 이를 갈았다. 그는 최민혁의 반대편에 선 최문경 부회장이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최민혁이 이 새끼가 뭘 하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어. 가만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 * *

권재홍 비서실장은 필리핀 일이 생각보다는 잘 풀려가자 최동영 상무에게 연락했다. 필리핀 라모스 대통령과 일이 잘 풀린 덕분에 호의로 몇 가지 건설 공사 수주에 대해 제안을 했다.

최동영 상무도 전혀 예상을 못 한 이 제안에 필리핀으로 넘어왔다.

“…고맙네.”

“부회장님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그는 실내 수영장에서 막 나오는 최문경 부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다. 최민혁에게 당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번 일을 통해서 여유를 회복한 것이다.

“형의 의도를 잘 모르겠어.”

“의도랄 것도 없다.”

“이전 일도 있는데,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믿을 거로 생각해?”

최문경 부회장은 가운을 걸친 채 권재홍 비서실장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음미했다. 그는 편하게 소파에 앉으면서 툴툴거렸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최동영 상무도 권재홍 비서실장이 따라주는 술잔을 홀짝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행동은 잊은 거야?”

“그래. 솔직히 인정하마. 하지만 앞으로는 좀 달라질 거다. 이게 내 모습이니까.”

“쯧.”

최동영 상무는 혀를 차고는 큰형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근 KM 그룹 내에서도 계속 최문경 부회장의 불안한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모두 최민혁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럼에도 나서지 않은 것은 최문경 부회장보다 최민혁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민혁의 영향력이 생각보다는 너무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필리핀 라모스 대통령이 갑자기 한 제안은 KM 건설도 무시하기 쉽지가 않았다.

그런 기회를 준 최문경 부회장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연락을 받자마자 필리핀으로 날아온 것이었다.

아마 얼마 전의 최문경 부회장이라면 최동영 상무의 태도에 발끈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앞으로는 나도 좀 바뀔 거다.”

“…좋아. 뭐 제안은 고마워. 형이 라모스 대통령에게 말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협상할 수가 있으니까. 그런데 민혁이, 그놈이 지오텍과 협상을 잘 처리했다는 것을 알아? 그것 때문에 그룹도 난리가 났어.”

자신만만했던 최문경 부회장의 표정이 바로 일그러졌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나도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몰라. 민혁이, 그놈이 나서고 나서 불과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서 일이 종결 되었어.”

“…….”

이제야 알게된 사실에 다시 뒤통수가 띵해지자 최문경 부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힐끗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건가?”

“그게 사실은…….”

최동영 상무는 자신이 한 말에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계약 핑계를 대고는 나가 버렸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지오텍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행히 최문경 부회장은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망설이다가 받은 권재홍 비서실장 표정을 보았다.

“또 무슨 일인가?”

“그게 좀…….”

“설마 이 지경이 된 마당에 또 숨길 것이 더 있나?”

“아닙니다. DL 전자, 김용만 전무의 차남 김재열이 성 접대, 납치 협의로 구속되었는데, 아무래도 이 일에 최민혁 실장이 연루된 것으로 보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뜬금없는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지오텍 일도 사실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HY 전자를 대신 소개해 주는 조건으로 지오텍과의 협상을 끝냈습니다.”

“…HY 전자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 대타를 나섰다고?”

“내막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봐, 권 실장.”

“죄송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도 원칙적으로 화를 내야 하겠지만, 이전처럼 이성을 잃지 않았다. 휴가 덕을 단단히 봤다.

“그래.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민혁, 그놈이 대단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어. 짐 챙기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어.”

“…알겠습니다.”

다시 침착해진 최문경 부회장 행동에 권재홍 비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 * *

최문경 부회장은 필리핀에 와서 라모스 대통령을 만나면서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필리핀 정부 도움을 얻어서 5년 만기 일시 상환 조건으로 대출도 받아서 반도체 생산 규모를 대폭 늘렸다.

이런 성과는 그조차 예상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기분이 좋지가 않았다.

KM 그룹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임직원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전과는 달라졌다. 바로 최민혁 실장의 리더십 때문이다.

KM 그룹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후에 보여준 최민혁 행동은 반응이 느린 최문경 부회장과는 다른 사이다를 보여주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전처럼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최민혁이 도대체 무슨 일을 진행했는지 살피기만 했다.

“정말 내 조카지만 대단한 놈이야.”

그가 진정으로 감탄한 것은 지오텍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특히 HY 전자를 끌어들인 수법에는 혀를 내둘렀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필리핀에 있는 동안에도 보고를 받았기에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만 봤다.

“권 실장, 자네 탓을 할 생각은 없어. 어차피 내가 있었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어. 오히려 민혁, 그놈 때문에 미쳐서 날뛰었을 거고, 아버지는 또 날 질책했겠지. 차라리 자리에 없었던 것이 천행이야. 그런데 그 이야기는 또 뭔가?”

권재홍 비서실장은 국내에 와서 비서 팀을 통해서 추가로 파악한 김재열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천천히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언론에서 이미 파악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엠바고가 걸려서 자세한 내용은 언론을 통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가 만만한 사건은 아닙니다.”

최문경 후뵈장은 대충 상황을 파악하자 굳이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다만 그가 이상하게 생각한 부분은 이 사건에 최민혁이 연관되어 있다는 거다.

“가만 설마 김재열, 그놈 뉴스가 나온 것은 최민혁, 그놈 솜씨란 소리야?”

“그게 확실치가 않습니다. 중앙지검에서 제보를 받아서 움직였다고 하는데, 성 접대 별장에 대해서는 최민혁 실장도 모릅니다.”

“흠.”

최문경 부회장은 혀를 내둘렀다. 권재홍 비서실장 보고대로라면 자세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권재홍 비서실장은 이 사건을 쉽게 보지 않았다.

“앞으로는 조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최 실장이 이 성 접대 사건 정보를 얻었다면, 정보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절대로 무시할 일은 압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누누이 말하지만 민혁이 그 녀석을 무시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다만 자세한 내용을 자네가 한번 알아봐. 그룹 구조조정도 그렇고, TV 사업부 매각설도 그렇고 정신이 없어.”

“알겠습니다.”

“그런데 민혁이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그놈도 뭔가 얻은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건 따로 파악했나?”

“아, 그게 송도연이란 연기 연습생 계약을 해지했다고 합니다.”

그는 골치가 아픈지 말을 하다가 손을 흔들고 말았다.

“연기 연습생? 아니, 그게 또 무슨 헛소리인가. 설마 여자 문제 때문에 이번 사태를 벌였다는 건가? 자세한 것을 한번 파악해서 보고해.”

“알겠습니다.”

‘설마 삼각관계야?’

* * *

최민혁도 최문경 부회장이 필리핀에서 공장 증설과 관련해서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말에 혀를 내둘렀다.

‘쉽게 안 무너지네. 하긴 반도체 패키징 분야 쪽은 무시할 수는 없어. 특히 비자금을 이용해서 미국 쪽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겠지.’

IMF 이후에 최문경 부회장은 다른 기업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KM 산업 중에 알짜배기 사업을 미국 법인으로 넘긴 후에 나스닥에 상장하기 때문이다.

그걸 막으려면 자금줄을 끊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의 해외 비자금하고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결국 최문경 부회장 일에 집착하기보다는 오히려 김용만 전무나 김현탁 사장의 동선을 살피면서 침묵했다.

굳이 더 나설 필요가 없었다.

박두영 부장검사가 주도적으로 나선 덕분에 미래 기획사는 결국 3차례에 걸친 압수수색이 이어지면서 문을 닫고 말았다. 미래 기획사에 연루된 폭력 조직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전부 다 구속되었다.

김재열 본인이 살기 위해서라도 미래 기획사의 여죄를 다 폭로한 것이다.

다행히 언론에서도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미래 기획사를 물고 늘어졌다.

특히 별장 성 접대와 관련된 충격적인 뉴스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 덕분에 당시 별장 성 접대 현행범으로 체포된 이들은 뉴스에서 그렇게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

단 예외라면 김재열과 관련된 뉴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어났다.

최민혁은 딱 자신이 원했던 그림대로 흘러가자 그제야 만족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그는 신바람이 난 기획 팀이 어떻게 송도연을 다루는지 구경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렸다.

송도연 여동생은 오성 서울 병원에 입원했는데, 경과가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면 백혈병 상태가 나빠져서 손쓰기 어려웠겠지만, 다행히 타이밍이 나쁜 편이 아니었다.

송도연은 이 기적과 같은 상황이 잘 믿기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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