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79화 (279/1,021)

#279

하지만 말과는 달리 최민혁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그리고 이게 단순히 운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아직 자신의 힘은 완성되지 않았다. 굳이 그들을 자극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자신의 내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HY 전자에 관한 이야기를 넌지시 했다.

“HY 전자가 최근 TRS 단말기를 자체 개발했을 겁니다.”

“호오, 그게 정말입니까?”

“그 모델은 휴대폰 형태의 디자인으로 장시간 사용이 가능합니다. 고출력을 바탕으로 한 덕분에 통화 품질도 나쁘지 않습니다. 무게도 다른 TRS 단말기와 비교하면 반도 안 됩니다.”

HY 단말기는 산악 지대나 빌딩 밀집 지역에서도 통화가 가능했다. 이 부분만 봐도 다른 단말기에 비해서 한 수 위였다.

“그 말씀은…….”

“HY 전자는 TRS 사업 투자에 적극 나설 겁니다. 지오텍과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단 KM 그룹과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는다면 그 계약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그 사업이 지금은 괜찮지만 1년 후부터는 어려워지고, 다음 해에는 더 어려워지며, 얼마 있지 않아서 사업을 정리한다는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 말에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깜짝 놀랐다. 안 그래도 투자자 문제 때문에 최민혁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니면 자기 선에서 잘라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TRS와 관련된 다른 경쟁자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그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 대기업의 내부 사정을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아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굳이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최민혁 능력은 그 자신이 잘 알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역시 실장님은 보통 분이 아닙니다.”

“그런 칭찬은 불편하군요. 제가 원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HY 전자에 다리를 놔주면, 지오텍 문제는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HY 전자가 꼭 지오텍과 합작 회사를 설립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도록 해야죠.”

“…그렇군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아무리 최민혁 실장 지시를 받아서 분탕질을 쳤다지만 그렇다고 지오텍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제안은 최민혁의 지시를 받아서 했지만 지금 상황은 최민혁이 그만두라고 해도 일방적으로 끝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혹시 최민혁이 강짜를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 방법이 궁금해.’

의문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지오텍 측에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부탁합니다.”

* * *

최민혁의 방법은 별것 없었다. 오성 전자에게 한 것처럼 HY 전자 실무진을 만나서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미팅은 순조로웠다.

이미 오성 전자와의 계약 사실을 안 HY 전자에서 나온 박용준 전무는 긴장한 채 최민혁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그는 최민혁이 어리다고 얕잡아 보지도 않았다. 가볍게 보지도 않았다. 내막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성 전자와 KM 전자 사이의 계약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파악한 최민혁 실장의 행보가 심상치 않았어.’

아니, 솔직히 먼저 이 자리를 만들려고 작정하던 차였다.

다만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은 시인했다.

“불행히도 32MB는 가능해도 64MB 낸드 메모리 양산은 당장 어렵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오성 전자도 아직은 완전히 양산 체제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압니다. 그래서 HY 전자에 기회를 주는 겁니다. 빠를수록 좋지만 급한 것은 아닙니다. 내년 초도 상관이 없습니다.”

“수량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100만 개 정도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내부적으로 검토를 거쳐서 바로 답변을 하겠습니다.”

박용혁 전무도 최민혁 실장과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색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그 자리에 오른 것치고 자만 따위는 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슬쩍 다른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잘 아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KM 그룹이 지오텍과 합작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정리하면서 그 지분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지오텍 측에서 계약 위반으로 소송을 걸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알기로 HY 전자에서는 TRS 단말기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압니다. 시스템 개발 역시 상당 부분 진행되었고요.”

박용혁 전무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했다. 그 역시 윗선에서 불과 일주일 전에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사실을 몰랐다면 TRS 사업부 실장에게 확인을 요청해야 했을 것이다.

“…그,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저도 나름 내부 정보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박용혁 전무도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최민혁이 내걸 조건이 뭔지 금방 눈치챘다.

“…혹시 KM 그룹 대신에 지오텍과 합작 법인 설립을 제안하시는 겁니까?”

“물론 강요는 아닙니다. 다만 낸드 메모리 공급은 굳이 HY 전자가 아니더라도 도시바나 오성 전자 측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노골적인 압박.

그런데 최민혁이 내놓은 계약이 너무 달콤했다.

더욱이 최민혁도 HY 전자가 오성 전자에 밀리는 것을 고려해 주었다.

박용혁 전무는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내색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지오텍과의 합작 법인 설립은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KM 그룹에서 먼저 새치기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했을 테니까.’

그는 잽과 스트레이트 콤보를 구사하는 최민혁 행동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좋습니다. 담당 사업부와 협의한 후에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많이 못 기다립니다. 안 되면 오성 전자 쪽에 부탁해야 하니까.”

“…이틀 안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 * *

이틀 정도 내부 이야기가 좀 있었지만, HY 전자 내의 TRS 사업부는 지오텍과의 합작이 나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TRS 사업은 HY 전자가 혼자 힘으로 하기에는 여러 가지 장애가 많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오텍과 손을 잡고, 영업권을 나누는 것이 훨씬 나았다.

거기에 64MB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이미 오성 전자는 64MB 낸드 메모리 양산에 열을 올렸다.

이대로라면 경쟁에서 뒤처진다.

최민혁의 제안을 받아서 계약금을 받는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았다. 타인의 돈으로 개발해서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민혁 제안은 HY 전자 입장에서 거절하기 힘들었다.

박용혁 전무는 결국 최민혁 실장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다.

최민혁은 조건 한 가지를 달았다.

“당분간 이 계약은 비밀입니다.”

“어차피 양산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최민혁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역시 지오텍 실무진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결과는 지오텍도 만족했다.

물론 KM 그룹에서 받을 돈이 아까웠지만 얼마가 될지 알 수가 없었고, 소송 기간이 너무 길어진다는 점도 고려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KM 그룹 도움을 얻어서 규모가 훨씬 큰 HY 전자와 대신 합작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더 이익이었다.

지오텍도 초기에는 한국 대기업과 손을 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불과 단 일주일 만에 TRS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장승일 실장에게 연락했다.

장승일 실장은 얼마나 놀랐는지 최민혁을 바로 찾아왔다.

“이, 이게 정말입니까?”

“지오텍에 확인해 보면 알 일입니다. 굳이 절 찾아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 어떻게 해결하신 겁니까?”

“HY 전자를 만나서 이야기를 잘 풀어갔습니다. 어차피 HY 전자는 TRS 사업 쪽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서로 도움이 된 겁니다.”

너무 쿨한 이야기에 장승일 실장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KM 그룹 기획실 직원이 다 매달려서 몇 달 동안 진행했다. 심지어 소송 때문에 대형 로펌에도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기획 전략실과는 별개로 최문경 부회장도 이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몇 달이나 헤맸다.

법원만 들락날락하면서 시간만 낭비했다.

그런데 마치 장난처럼 해결되다니.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쉽게 협상을 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 양반은 법정 대리인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지오텍 입장이니까. 그들도 자기 사업 미래에 대해서 불안했을 겁니다. 그런데 한국 10대 대기업 중의 하나인 HY 전자가 손을 건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말은 참 쉽다.

그런데 HY 전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일을 쉽게 용인할 리가 없다.

최민혁은 굳이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니, 문제가 꼬인 겁니다. 모든 문제에 간단하게 접근하면 뜻밖에 쉽게 풀리는 겁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신뢰를 잃어서 문제가 된 것이죠.”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에게 몇 번이나 더 질문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는 결국 혀를 차면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이 이 사실을 알면 기겁하겠군.’

* * *

“허허허.”

허탈하게 웃는 최용욱 회장은 낚싯대를 내려놓은 채 한동안 웃기만 했다.

손자 최민혁이라면 일을 잘 처리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도 일주일은 너무했다. 도대체 장남 최문경 부회장이 이제까지 한 일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차만 그 일을 꺼내지 못한 것은 장승일 실장조차 헤맸기 때문이다.

천천히 일어난 최용욱 회장은 호숫가를 따라서 걸었다.

장승일 실장이 잽싸게 뒤를 따라붙었다.

“장 실장, 민혁 그 녀석이 어떻게 해결했는지, 자세한 것은 모르나?”

“HY 전자 쪽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최용욱 회장도 호기심이 들었지만, 굳이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뭐 결과가 중요하니까.”

다만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다.

이 일이 KM 그룹 내부에 알려진다면 최문경 부회장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TRS 관련 안건은 민혁이 그 녀석이 해결한 걸로 그룹 내에 알려. 그리고 전략 기획실에 자리도 하나 만들어 봐.”

“네?”

“그냥 적당히 명목상 자리만 만들어. 자문 의원도 좋고, 왜 늘 하는 거 있잖아. 다만 실권도 같이 만들어서 줘.”

“그렇게 하면 부회장님이…….”

“이건 부회장과는 좀 다른 문제야. 성과가 있다면 그만 한 보상은 받아야지. 민혁이 그 녀석에게 더 확인을 해봐. 필요하다면 KM 산업 지분을 주겠다고.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 * *

TRS 정리 사건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무능한지 잘 보여주었다.

그런데 최민혁은 불과 일주일 만에 가볍게 이 문제를 해결했다.

KM 그룹 내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발칵 뒤집혔다.

최민혁의 인기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았다.

자연스럽게 나온 것은 KM 산업 지분 증여다.

과거 몇 차례 나왔던 이야기였지만 이전과는 상황이 좀 달랐다.

최민혁은 분명한 성과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문경 부회장이 자리에 없다는 점이 한몫했다.

다만 불협화음을 무시하지 못했다.

최용욱 회장은 결국 KM 산업 지분 2%를 최민혁에게 증여했다.

최문경 부회장 처지를 생각한 것이다.

최민혁은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아니, 지분을 준다고 하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KM 산업의 2% 지분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최민혁은 KM 전자 외에 다른 계열사 지분을 받지 못했다.

KM 산업 지분은 최민혁에게 금단의 문이나 마찬가지였다.

2% 지분을 얻었으니, 주식 시장을 통해서 지분을 더 늘려가도 된다.

하지만 그는 굳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적당히 KM 그룹 손을 봐주면서 지분을 계속 늘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실은 자연스럽게 소니의 오다 히로 부사장에게 전해졌다.

KM 산업의 TV 사업부를 노리던 오다 히로 부사장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정말인가?’

그 역시 최민혁이 서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최민혁 능력에 족쇄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최민혁은 KM 그룹 경영에는 손을 쓰지 못할 것이라 봤다.

그런데 KM 산업 지분을 얻었다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