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78화 (278/1,021)

#278.

‘이렇게 차가운 분위기는 또 처음이군.’

최문경 부회장이 회의에 있을 때만 해도 적당한 적자는 넘어갔다.

미래 가능성이 있다면 어지간한 것은 눈을 감았다.

그도 뒤로는 적당한 뇌물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없는 이 자리.

그런 꼼수는 통하지 않았다.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사장들은 의견을 낼지 몇 번 망설이다가 결국 의견을 피력하지 못했다.

장승일 실장은 힐끗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최민혁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구조조정안을 쳐다보았다.

‘아진은 2년 후에 청산되는데, 벌써 날려 버렸구나.’

심지어 KM 브이데코 역시 구조조정 명단에 올라 있었다.

‘2년 후에 계열 분리 후에 몇 년은 버티고 폐업했는데, 칼같이 잘랐네.’

생각보다 단호한 조치였다.

2년 후에는 30대 기업 집단에 포함될 계열사를 죄다 도려낸 것이다.

장승일 실장은 오히려 당황한 듯한 최민혁 실장의 모습에 만족했다.

[비록 재계 자산 기준으로 30위 대기업 순위에서 내려가기는 했지만, 오히려 수익 구조 면에서 본다면 우리 KM 그룹 재정 건전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탄탄합니다. 이번 구조조정은 우리 그룹의 체질을 개선해서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실제로 KM 그룹 재정 건전성은 다른 대기업에 비해서 월등했다.

돈이 안 되는 사업은 다 잘라 버리는 것으로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치가 보여주었다.

[이것은 작년 아시아 지역 전자업체 매출 순위입니다.]

10대 대기업 매출 순위가 나왔다.

작년 10위였던 KM 산업의 올해 예상 매출액이 나왔다.

[30% 이상 성장해서 13억 달러는 무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13억 달러면 오성 전기를 넘어서 8위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한 계열사뿐이기는 하지만 오성 계열사 하나를 넘어선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온 것은 역시 KM 전자 예상 매출액이었다.

[KM 전자 올해 매출액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1조 3천억 원은 넘어설 것으로 예상합니다!]

[오!]

계열사 사장끼리 서로 놀라서 웅성거렸다. 지난달까지 매출이 1조 원을 넘어섰다는 말은 들었지만, 예상 매출액은 그 이상이란 말에 경악했다.

경직됐던 사장단 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침울한 계열사 사장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비록 자신의 팔다리를 잘라 내는 고통을 경험했지만 다르게 보면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장승일 실장이 슬쩍 나섰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회의를 이어가겠습니다.]

* * *

휴식 시간은 휴식 시간이 아니었다. 오늘 사장단 회의 상황을 미처 몰랐던 사장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저런 의견을 토로했다.

당연히 불만을 내세우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닌데, 너무 일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도 공감입니다. 아니 아닌 말로 계열사 직원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룹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른 것뿐 아닙니까.”

물론 최문경 부회장 이야기는 슬쩍 뺐다. 그들도 차마 최문경 부회장을 이 자리에서 깔 수는 없었다.

다만 오히려 찬성하는 이도 꽤 있었다.

“계열사 적자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어. 언제 말이 나와도 나올 이야기였어. 차라리 지금 정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

“저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시기라면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손실을 최대한 줄일 수 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결정이지만 차라리 나은 판단일 수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올해 호황이 내년까지 이어진다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해요.”

경기 상승세 때문이다.

경기하강 국면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KM 그룹 전체가 휘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KM 산업이나 KM 전자 실적이 사상 최대였다.

자금이 풍부하니, 계열사 손실을 어느 정도 메꿀 수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불만을 토로하던 이들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특히 그들이 끝까지 의견을 밀고 나가지 못한 이유는 최용욱 회장이 지난 경영 성과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전광석화 같은 일 처리에 오히려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확실히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이런 식으로 부실 계열사 구조조정을 밀어붙였어. 장 실장이 확실히 대단하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최민혁 자신이 최용욱 회장 처지에 놓인다고 해도 이렇게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그는 최용욱 회장이 계열사 구조조정을 결정한다고 해도 홍역을 앓을 것이라 예상했다. 최문경 부회장이 그 틈을 타서 최용욱 회장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문득 이 일의 동기가 TV 사업부 매각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 날 이용한 건가?’

최민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TV 사업부 매각설은 거짓이다! 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걸 여전히 믿는 사람이 존재했다.

장승일 실장은 그런 점을 파고든 것이다.

흑자가 쌓여가는 TV 사업부 매각설도 나오는 상황에 적자투성이 계열사 사업부 정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계열사 사장들도 그런 점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의식한 셈이다.

‘재미있네.’

최민혁은 다시 사장단 회의가 시작되자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이 시작부터 태클을 걸었다.

[대충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은데, TRS 사업은 어떻게 처리할 건가?]

[그건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장 실장, 그래서는 곤란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어. 앞으로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 같은 미래 먹거리 사업 투자도 늘려야 해. 그런데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이 사로잡혀서 허우적거릴 텐가?]

[그게 좀…….]

장승일 실장도 이 문제에 대해선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TRS 문제는 KM 그룹이 무조건 불리했기 때문이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힐끗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용욱 회장 눈빛이 반짝였다.

[아, 오늘 최 실장이 사장단 회의에 참석했군. 최 실장은 처음이라서 지켜보기만 하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어. 최 실장은 어떤가? 아, 최 실장도 TRS에 대해서 잘 알 테니, 굳이 내가 TRS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최민혁은 사실 오늘 작정하고 이 자리에 참석했다. 다행히 인생 1회차에서 TRS 사업 정보를 이미 떠올렸다. 사업 자체의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몇 사람 없었다.

더욱이 다른 대기업은 TRS 미래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그중에 하나가 HY 전자이니까. 개들은 KM 그룹과는 상황이 달라. 의심하지는 않을 거야.’

개인적으로 이런 일 자체가 싫었다.

그런데 지금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사장 얼굴을 보라.

그들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놀람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TRS 사업은 몇 달 동안 KM 그룹을 계속 괴롭힌 문제였다. 놀랍게도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에게 자문했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은 이 TRS 사업 정리 때문에 최용욱 회장에게도 찍혀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최문경 부회장보다 최민혁 실장을 더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얼굴은 마치 소풍이라도 온 것처럼 단 한 치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은 이 자리를 빌려서 최문경 부회장을 단단히 엿 먹이기로 마음먹었다.

[지오텍 이야기는 저도 압니다. 어려운 문제 같지만 의외로 싶습니다.]

최용욱 회장 표정도 살짝 바뀌었다. 장승일 실장조차 이 문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최민혁은 오히려 쉽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최용욱 회장은 손자를 생각했다.

[이 자리는 계열사 사장이 모인 자리다. 차라리 자신이 없으면 힘들다고 해. 누구도 너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으니까.]

[자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원칙의 문제입니다. 지오텍에서 계속 걸고넘어진다면, 그쪽이 원하는 것을 챙겨주면 됩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최용욱 회장 눈빛이 반짝였다. 시원한 대답이 너무도 만족스러웠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데 지오텍이 악착같이 돈을 뜯어내려고 해서 쉽지는 않아.]

[저도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돈보다 더한 가치를 주면 간단히 해결됩니다. 즉 문제가 되는 것은 계약 파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KM 그룹보다 더 나은 파트너를 내세우면 됩니다.]

최용욱 회장도 예상을 벗어난 답변에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

[아뇨.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해도 될 것 같습니다.]

[민혁이, 네가? 이번 일은 쉬운 문제가 아냐. 자칫 잘못 처리한다면…….]

깜짝 놀란 최용욱 회장은 지금 이 자리가 사장단 회의실이라는 것도 잊었다.

하지만 계열사 사장조차 동그란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슬쩍 한 가지 문제를 걸고넘어졌다.

[다만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로 부회장님이 이번 일을 맡은 것으로 압니다. 혹시 제가 중간에 끼어들어도 괜찮은 겁니까?]

[아, 괜찮아. 부회장은 지금 반도체 증설 문제 때문에 필리핀에 가 있으니까.]

[그러면 제가 한번 처리해 보겠습니다.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대수롭지 않다는 최민혁 이야기.

하지만 사장단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최용욱 회장은 다시 질문했다.

[방안은 무엇이냐?]

[그것은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결과만 좋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 말을 믿고, 기다려 보세요. 단기간에 처리할 테니까!]

[…….]

최용욱 회장은 당당하다 못해서 거만스러운 최민혁의 태도에 입을 닫았다. 다른 계열사 사장 역시 혀를 내두른 채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다들 기가 막혀서 입을 열지 못했다.

최문경 부회장조차 처리하지 못한 TRS 소송 문제는 제법 커져서 KM 그룹에도 부담이었다.

그런 일을 저렇게 간단하게 대답하다니.

그런데 최용욱 회장은 대답에 꽤 만족했다.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사장단 회의가 진행된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해서 한 가지 더 질문했다.

[좋아. 그 일은 너에게 맡기마. 아 그리고 TV 사업부를 매각한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거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 KM 전자는 TV 사업부를 매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흠.]

최영욱 회장은 단호하게 오리발을 내미는 손자 최민혁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자신에게 했던 말과는 너무 달라서 진심인지도 판단이 잘되지 않았다.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까지 캐묻기는 좀 그렇군. 앞으로 요놈 말을 믿을 수가 없겠어.’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하지만 더 큰 이슈는 나오지 않았다.

최민혁은 꽤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그는 KM 그룹 계열사나 사장단 회의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최문경 부회장 옆에 달라붙어서 세를 불리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첫째 큰아버지 수족을 가능한 한 많이 잘라 버려야겠어.’

* * *

최민혁이 회사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만나는 것이다. 그는 물론 일방적인 지시 따위는 내리지 않았다.

우선 지난 한 가지 일부터 확인했다.

“KM 전자 지분에 관심을 둔 투자자 미팅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난감한 얼굴로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아, 그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누군가 협박이라도 하는 건가요?”

깜짝 놀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최민혁을 색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비슷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몇몇 투자자가 당황한 상황이라서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예상 밖의 투자자도 있는데,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운 자들이라서 고민 중입니다.”

뜻밖의 이야기에 최민혁은 흥미로운 얼굴로 쳐다보았다.

“가만 혹시 투자자가 단일 투자자가 아닌 겁니까?”

“하하하, 당연하지 않겠습니다. 세상에 돈 많은 사람은 많습니다. 그들끼리 서로 이해관계도 있습니다. 최민혁 실장님에 대해서는 처음 안 이도 있고, MP3 원천 기술 가치에 대해서도 이제 막 눈을 뜬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이들도 있는데, 이들이 꽤 공격적입니다.”

“흥미롭군요.”

“하하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 실장님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진 것이니까. 올해 예상 매출만 1조 3천억 원이 넘는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 정도면 아무도 최 실장님을 무시 못 합니다.”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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