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
폭탄선언에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화들짝 놀랐다.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테면 설사 윗선에서 결정했다고 해도 밑에서 계속 반발하면 결정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더욱이 구조조정 계열사 임직원은 단순한 구조조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이후에 격한 반응을 보였다. 자칫하면 대규모 시위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 장 실장님, 그 문제는 좀 더 보류하는 것으로 했지 않습니까?]
[하지만 회장님은 굳이 이미 정한 일을 다시 뒤집을 필요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
사장단은 힐끗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았다. 역시나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니, 그는 조용히 있다가 슬쩍 나섰다.
[이미 결정이 난 사안이다. 괜히 이랬다저랬다 희망 고문 하는 것이 더 안 좋아. 그래야 당사자도 빠르게 자기 진로를 결정할 거야!]
분위기는 차갑게 바뀌었다.
최용욱 회장의 태도를 봐서는 더 번복은 없을 것 같았다.
자리에 모인 모인 KM 그룹 계열사 사장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특히 당황한 사람은 이 자리에 오승환 KM 산업 사장을 대리해서 나온 부사장 조철동이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불참했으니,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부회장님이 분명히 제동을 걸었다고 했는데, 장 실장이 회장님을 부추겨서 밀어붙인 건가?’
조철동 부사장은 눈치를 보다가 생리현상이라는 말을 슬쩍 한 후에 슬그머니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지만 무시했다.
최민혁 역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물끄러미 회의를 쳐다보았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는 너무 빠른 일 처리이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계열사 임직원과 제대로 협상을 하고 진행한 것일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데, 굳이 이렇게 급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나? 가만 설마 TV 사업부 매각설 때문인가?’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 눈빛에서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혀를 찼다. 자신조차 구조조정을 할 때 임직원이 동요하지 않도록 손을 썼다. 그래서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지금 봐서는 최용욱 회장은 그런 점을 무시한 것 같았다.
‘원칙적으로는 맞는 방향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하다니.’
* * *
조철동 사장은 회의실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전창식 기획 팀 부장을 호출했다.
다행히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전창식 부장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사장님에게 연락했어?”
“그게 전화가 안 됩니다.”
“아니, 필리핀에 무슨 일이 있다고 전화를 안 받아. 전 부장 넌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죄송합니다.”
단단히 분노한 조철동 부사장 행동에 전창식 부장은 고개를 숙였다. 성격이 지랄 같아서 괜한 이야기를 했다간 박살이 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대신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오늘 사장단 회의에서는 중요한 안건이 안 나오는 것으로…….”
“얌마, 지금 본격적인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왔어. 부회장님 의견을 장 실장이 회장님을 등에 업고 일방적으로 무시했어. 그것 때문에 난리가 났단 말이야.”
“마, 말도 안 됩니다. 부회장님이 자리에 없는데 그런 결정을 일방적으로 한다는 말입니까? 아직 최종 결정이 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존 결정에 대해서 더 이상 검토는 없다고 회장님이 확정 지었어!”
“아, 아니 대상자가 몇 명인데, 그렇게 황당한 결정을 내렸다는 말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전창식 부장도 당황했다. 그는 다시 국제 전화로 KM 산업 오승환 사장에게 전화했다.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행히 권재홍 비서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조철동 부사장은 바로 휴대폰을 뺏었다.
[접니다. 조철동 부사장, 거기 최문경 부회장님 자리에 있습니까?]
또 무슨 일이 싶었나 싶은 권재홍 비서실장은 머뭇거렸다.
[…무슨 일입니까?]
[크, 큰일 났습니다. 지금 사장단 회의가 진행 중인데, 최문경 부회장이 연기시킨 구조조정을 다시 진행하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뭐에요? 그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시간을 두고 진행하는 것으로 이미 결정 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오늘 최민혁 실장이 참석한 것 때문인지 결정을 뒤집었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지금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겁니까?]
[네.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의 입김이 크게 반영된 것 같습니다.]
[…….]
권재홍 비서실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TV 사업부 매각설 이후에 최민혁 실장이 뭔가 또 다른 음모를 꾸미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 일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솔직히 구조조정 자체는 장승일 실장이 최민혁 조언에 따라서 계열사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그런데 실행 여부는 좀 다른 문제였다.
최문경 부회장이 딴죽을 걸면서 결정이 늦어진 것이었다.
그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구조조정 명단에 오른 임직원의 반발이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KM 그룹 계열사는 어수선했다.
필요하다면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들을 부추길 생각마저 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잠깐 침묵했다.
[회장님도 참석했습니까?]
[네. 아니, 회장님이 오히려 더 단호한 것 같습니다. 부회장님이 없는 자리에서 저렇게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다니, 완전히 미쳤다니까요.]
착잡한 권재홍 비서실장은 혀를 찼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완전히 파악했다. 이미 일이 진행된 상황이다. 이제는 돌이키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설사 부회장님이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겁니다.]
[하, 하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습니다. 있다고 한다면 회사에서 쫓겨나는 임직원을 대리해서 계속 나서보세요. 그게 유일합니다.]
[하, 하지만 제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부회장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정은 조 부사장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입술을 살짝 깨문 조철동 부사장은 몇 분이나 더 통화하다 결국 전화를 끊고 말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왜 저렇게 소극적인지 금방 깨달았다.
TRS 정리가 늦어지면서 최문경 부회장 입지는 날개 없는 새처럼 추락했다. 최문경 부회장도 지금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공공연히 최민혁 실장에게 밀린다는 소리가 나왔다.
최문경 부회장 라인인 그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 * *
사장단 회의실에 다시 돌아온 조철동 부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실제로 KM 인스트루먼트에서 의료기기마저 도려내고 나면 남는 것은 반도체 장비뿐이다. 즉 KM 산업에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회사가 된다.
KM 인스트루먼트가 독자적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기존 활동을 다 접어야 했다.
그러니 본사 방침에 공감하는 사장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서슬이 퍼런 최용욱 회장 때문에 차마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김환진 사장은 완전히 절망했다. 그는 혹시라도 최민혁 실장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최민혁은 물론 아예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비록 과정 자체는 가혹할지 몰라도 방향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더욱이 계열사 임직원 스스로 리스크 관리하지 못한 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 정말 회사를 위한 마음이 있었다면 최선을 다했을 테니까.’
물론 위의 경영진이 개판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당 계열사 임직원 스스로가 책임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보다 못한 조철동 부사장이 나섰다.
[장 실장님, 다 좋습니다. 계열사 매출이 나빠서 정리하는 것까지 인정합니다. 하면 회사에서 쫓겨난 직원은 어떻게 됩니까?!]
장승일 실장도 이 질문엔 흠칫했다. 다만 전혀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로금을 포함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도울 겁니다. 필요하다면 사업부 분사도 지원할 예정입니다. KM 옵틱스가 그 좋은 예입니다.]
[KM 옵티스만 해도 계열사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된 법인 아닙니까. 나중에 가면 나 몰라라 할 텐데, 그런 사실을 구조조정 대상자는 알고 있습니까?]
[물론 그런 한계가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렇다고 적자가 누적되는 사업부를 계속 끌고 가서 그 계열사 전체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가 손짓하자 화면에는 KM 인스트루먼트의 수익 현황이 드러났다. 꾸준한 반도체 장비 사업부 수익을 다른 사업부가 계속 잠식했다.
[이대로 놔두면 KM 인스트루먼트는 3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저도 이런 결정을 빠르게 처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좀 더 여유를 두고, 충분한 대안을 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조철동 부사장은 참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났다.
[장 실장님, 도대체 시간이 없다는 근거가 뭡니까. 요즘 다들 경기 호황에 난리입니다. 왜 유독 우리 회사만 마치 내년에 한국 경제가 수렁에 빠질 것을 예상하는 것처럼 난리입니까?!]
조철동 부사장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눈치를 보던 다른 계열사 사장들도 불만을 토로했다. 다만 최용욱 회장 눈치를 보면서 선을 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이 결국 나섰다. 그는 결코 변명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미 기조실에서 검토한 내용이다. 그리고 계열사 구조조정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다. 만약 일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내가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네?!]
최용욱 회장의 폭탄선언에 조철동 부사장도 화들짝 놀랐다.
최민혁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설마 최용욱 회장이 저렇게 태도를 바꿀지는 상상도 못 했다.
‘믿을 수가 없군.’
그가 인생 1회차에서 기억하는 최용욱 회장은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통솔력이 있고, 뚝심이 있었다. 나쁘게 보면 잘못된 방향으로 갔을 때 본인의 아집으로 배 전체를 침몰시키는 선장 타입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힐끗 최민혁과 잠깐 시선을 마주한 후에 계열사 사장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지금 말하는 것이지만 기조실에서는 내년 경제, 그리고 후년 경제를 최악으로 본다. 따라서 거기에 따른 조처이니, 이의를 받지는 않겠다. 다만 다른 의견이 있다면 기조실에 따로 의견을 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 검토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철동 부사장은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한마디 더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잘될 때도 있고, 안될 때도 있는 법이야. 그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아. 그리고 이번 일은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이라 지난 결과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칠 거야. 구조조정 당했다고 불이익을 받을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구조조정 대상자 보상은 그룹 차원에 나설 거다. 창업한다면 충분히 지원도 해줄 거다.]
[아, 알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계열사 사장도 반론을 펴기 어려웠다. 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철동 부사장를 기대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김환진 사장 역시 할 말이 많았지만, 더 입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KM 인스트루먼트의 지난 적자는 심각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그 자신은 지금 자리에서 잘리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만약 최문경 부회장이라도 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 도움을 청할 텐데, 그게 아쉬웠다.
그런데 이어지는 계열사 상황은 더 처참했다.
적자.
손실.
누적 재고.
인사 비리.
자금 경색.
심지어 횡령 건도 있었다.
장승일 실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불법에 대해서는 검찰에 고소해서 수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조철동 부사장도 KM 인스트루먼트가 그나마 양반이라는 깨닫자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가 보기에는 최문경 부회장이 설사 이 자리에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장승일 실장의 극단적인 정책도 마냥 반박할 수만은 없었다.
‘끝났어.’
최용욱 회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장승일 실장은 냉랭한 회의실 분위기를 예상했다. 그런데 기대한 것보다 더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