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이일태 이사는 할 말을 잃은 채 김현우 수석 부장의 술주정을 듣기만 했다. 오성 전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암투 때문에 김현우 수석 부장도 자기 생존을 걱정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술을 마시다가 감정이 끌어 오르자 병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씨발, 내가 정말 허탈한 것이 뭔지 알아?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에는 최 실장, 그 새끼가 있다는 거야. 그놈은 손가락 까딱하지 않은 채 또 날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니까?!!”
충격적인 이야기.
이일태 이사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KM 전자와 관련해서 돌고 있는 질문을 넌지시 던졌다.
“…가만 최 실장이 그렇게 잔머리를 잘 굴린다면, 혹시 지금 돌고 있는 TV 사업부 매각설에도 다른 의도가 있습니까?”
“나도 몰라. 하지만 상식적으로 소니에 사업부를 매각할 이유는 없지. 이상한 소문이 도는 것도 최민혁 실장 그 새끼의 술수가 분명해.”
이일태도 이사도 김현우 수석 부장을 만나기 전만 해도 최민혁에 대한 원한으로 이를 갈았지만, 지금은 앞날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도대체 최 실장이 그렇게 해서 얻는 것이 뭐란 말입니까?”
“모르지.”
최민혁 욕설을 퍼붓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결국 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이일태 이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가만 설마 DL 정보통신에서도 TV 사업부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잠깐 떠오른 의문.
그런데 DL 그룹의 행보를 본다면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DL 그룹이 KM 전자를 노렸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고 간다면.
최민혁 실장의 한마디에 자신은 지금 자리에서도 쫓겨날 수 있었다.
‘젠장 지금은 몸을 사려야겠어.’
* * *
[소니의 오다 히로 부사장이 KM 전자에 TV 사업부 인수를 제안하다!]
갑자기 터져 나온 이 뉴스는 많은 사람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지라시 기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중파 뉴스에서도 나왔다.
[일본 후나이 TV의 몰락에 관한 기사를 며칠 전에 전해주었습니다. 일본 가전 왕국인 소니를 비롯한 일본 회사의 사정이 그만큼 안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일본 소니의 오다 히로 부사장이 KM 전자를 방문했습니다. 현재로는 TV 사업부 인수에 관심을 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KM 전자 관련자는 이 소식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는 있습니다. 다만 콜린스로 유명한 KM 전자의 TV 사업부가 소니에 넘어간다면 한국 TV 산업에도 큰 타격을 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메이저 방송사 기자가 KM 전자를 찾아가서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그 숫자는 날이 갈수록 더 급증했다.
건물 입구에 몰려든 기자 때문에 임직원도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KM 본사 앞에는 수십 명의 기자가 몰려와서 오가는 평범한 임직원을 붙잡고 계속 괴롭혔다.
[아, 몰라요!]
[사내에서 도는 소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가 없습니다!]
[아니, 저도 땔감이 있어야 연기가 나오게끔 할 것 아닙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아니, 우리 회사가 콜린스를 매각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보다 못한 경비원이 나서도 소용이 없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외치는 기자의 모습은 단순히 기자라는 소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콜린스 관련 기술이 소니에 넘어가는지 그게 궁금했다.
결국 조성돈 팀장이 나서서 공개 인터뷰 자리를 만들었다.
그는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답변했다.
[아직 TV 사업부 매각에 대한 어떤 결정도 없는 상황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기자가 바로 질문했다.
[저희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단편적인 소식이 아닙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생산량을 늘려 얼마든지 콜린스 매출액을 늘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못한 것은 내부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TV 사업부 매각을 검토하는 것 아닙니까?]
[콜린스 생산량은 회사 내부 사정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다른 질문인데, 만약 매각한다고 가정할 때 차라리 소니보다 오성 전자에게 매각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TV 사업부 매각은 현재로서는 전혀 검토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아니, 그러면 일본 소니 오다 히로 부사장이 왜 최민혁 실장을 만난 겁니까?]
[그건 말해줄 수 없습니다!]
[무슨 대답이 그렇습니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 말해줘야 할 내용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TV 사업부 매각은 전혀 계획이 없습니다!]
기자가 몇 번이나 질문해도 조성돈 팀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묘하게 안도감을 줘서 TV 사업부 매각은 헛소문으로 판명 났다.
하지만 이 뉴스는 오성 전자로서는 미사일 폭격을 맞은 것이나 다르지 않았다.
설마 오다 히로 부사장이 직접 KM 전자를 찾아갈지는 몰랐던 것이다.
권태성 실장도 덕분에 오성 그룹 본사에 호출 받아 갔다. 그는 긴급으로 열린 오성 전자 사장단 회의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그 자신이 기존에 한 조치 때문에 기획실장 자리에서 잘리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과 KM 전자에 대해 면밀한 조사와 적극적인 대처를 한 사람이 권태성 실장이 유일했던 것이다.
권태성 실장은 덕분에 안건민 회장에게서 직접 이번 사태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
이제는 오성 전자 내에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이 일을 직접 처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최민혁 실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오성 전자로 복귀하기가 무섭게 회의실로 들어갔다.
임권수 부장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습니까?”
“아니. 담배 좀 있나?”
소회의실에선 흡연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임권수 부장은 냉큼 담배를 내밀었다.
황광수 차장 역시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권태성 실장을 쳐다보았다.
담배를 문 채 겨우 한숨을 돌린 권태성 실장은 담뱃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학창 시절에 담배를 끊었다.
그 뒤 20년이 지난 후에 회사에서 처음 담배를 피웠다. 문득 오성 전자에 입사한 후의 지난 과거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신입 시절부터 시작해서 대리, 과장, 부장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별의별 일을 다 경험했다.
고비마다 보수적인 선택을 택한 덕분에 잘 살아남았다.
자신이 아는 신입 사원 동기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고작 세 사람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의 능력은 가볍지가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을 마주한 후로 계속 벼랑 끝을 걷는 기분이었다.
권태성 실장은 침중한 얼굴이었다.
“반도체 사업부 분위기는 어때?”
“거긴 잔치 분위기입니다. 일은 저희가 다 했는데, 정작 공은 그 인간들이 다 챙기는 분위기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그렇겠지.”
권태성 실장은 다시 담배를 베어 문 후에 잠깐 침묵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최 실장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뭘까?”
“글쎄요.”
임권수 부장도 입을 다물었고, 황광수 차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알기엔 그동안 진행된 것이 최민혁 실장과 거래를 통해서 e오성이 디지털 위성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과 300만 개의 낸드 메모리 주문을 받은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나온 TV 사업부 매각 소식은 상상을 초월했다.
불행히도 지금 상황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단순히 권태성 실장을 괴롭힐 목적인지도 알기 어려웠다.
무거운 중압감에 권태성 실장은 한숨만 계속 내쉬었다.
윗선에서 받은 지시가 딱히 좋은 의도로 내려온 건 아니었다.
‘여기서 실수하면 끝이겠지.’
그럴 수는 없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권태성 실장은 이를 악물었다.
임권수 부장은 잔머리를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라리 김현우 수석 부장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김 수석? 그 친구는 내일 당장 잘려도 이상하지 않아. 알고서 하는 소리야?”
“그런데도 자르지 않는 것은 최민혁 실장 때문이 아닙니까. 혹시 필요할지 몰라서 내버려 뒀다고 생각합니다만.”
“흠.”
권태성 실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임권수 부장 이야기가 틀리지 않았다. 이미 오성 전자 인사 팀에서는 이제 김현우 수석 부장을 정리하려고 했다. 심지어 그가 데려온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 골치 아프면 분사시키려고 했는데…….’
굳이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그들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은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잘 알기 때문이다.
“…한번 불러봐.”
“알겠습니다.”
* * *
기획실 바로 옆에 있는 중회의실에 도착한 김현우 수석 부장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회의실에 이미 권태성 실장을 비롯한 기획실 직원이 있었다. 그들 시선은 곱지 않았다.
김현우 수석 부장도 지난 일 때문에 반감이 더 늘어났다.
하지만 김현우 수석 부장은 전혀 상황에 대해 모르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회의실에 앉았다.
권태성 실장은 혀를 찼다. 그는 다른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 수석은 KM 전자에 있었기에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잘 알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좀 해주게.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네?”
김현우 수석 부장은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이 자리에 오기 전까지도 마음이 복잡했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최민혁 이야기를 듣자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이어 안도했다.
‘…TV 사업부 매각 때문이구나. 하긴 최 실장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알 턱이 없지.’
솔직히 지금 이 자리에 앉을 때도 다 포기했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안정부터 찾았다. 그는 살아날 방법을 궁리했다.
“으음, 최민혁 실장이라, 확실히 저만큼 그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세한 것을 듣고 싶군.”
“혹시 최훈열 전무에 대해서는 잘 아시죠?”
“물론이네.”
“그렇다면 최훈열 전무 몰락에 대해서 손을 쓴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까지도 아십니까?”
“뭐?!”
처음 듣는 이야기에 권태성 실장도 깜짝 놀랐다. 언론을 통해서 접한 정보로는 최민혁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있다고 한다면 음모론 정도였다.
“혹시 지라시 이야기를 하는 건가?”
“아닙니다. 최훈열 전무가 감옥에 간 것은 그 어떤 우연 따위가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이 중간마다 손을 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위를 비롯한 일까지 최민혁 실장이 벌였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압니다. 그 부분은 저도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도 최민혁 실장이 배후에서 모든 일을 조작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최훈열 전무에 관한 이야기만 계속했다.
설명은 논리적이었다.
벌써 몇 달에 걸쳐서 최민혁의 행보를 하나하나 고민해서 퍼즐을 맞춘 결과였다.
모순된 점은 전혀 없었다.
자연스럽게 김현우 수석 부장 이야기가 시선을 끌었다.
“저도 최민혁 실장에게 당했습니다. 애초에 전 회사를 나갈 생각이 없었는데, 뒤에서 부추긴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디오 특허는 가짜가 아니었어.”
“가짜 같은 진짜일 겁니다. 그 정도로 교묘한 특허를 만들 사람은 최민혁 실장뿐입니다. 그리고 뒤통수를 친 겁니다. 권 실장님이 당한 일이니, 제가 더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으음.”
뒤늦게 진실 일부를 들은 권태성 실장.
그의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 역시 김현우 수석 부장이 얼마나 쓰레기인지는 잘 안다.
그 쓰레기를 비싼 값에 자신에게 떠넘긴 것이다.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을 생각할수록 이가 절로 갈렸다.
그래도 일단 참았다.
다른 기획실 직원도 내심 짐작했던 일이라서 어수선했다.
그들 역시 카더라 음모론만 들었던 것이다.
권태성 실장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아니, 그러면 왜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솔직히 제가 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권 실장님이 과연 믿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이상한 놈만 될 겁니다!”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에 기가 죽어 있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살 길을 찾자 강렬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설득력도 있었다. 그는 회의실 분위기를 완전히 휘어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