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72화 (272/1,021)

#272.

최문경 부회장은 필리핀에 도착한 후에 국내 KM 그룹 상황에 대해서는 귀를 닫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의 충고를 따랐다. 덕분에 안정을 찾았다.

그는 마치 휴가라도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권 실장 충고를 진작에 들었어야 했어.”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부회장님에게 심려를 끼쳤습니다.”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어.”

다시 ‘조카 최민혁’ 이름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심호흡을 했다.

겨우 안정을 찾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필리핀 오카다 호텔에 투숙한 채 휴식을 즐겼다.

일본 최대 카지노 업체인 오카다 그룹이 세운 이 호텔은 필리핀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호텔이다.

마닐라만을 전망으로 갖춘 이 호텔엔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다.

필리핀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호텔인 셈이다.

“…이곳도 괜찮네?”

“일본 오카다 그룹에서 투자를 아끼지 않는 곳입니다. 지금도 투자는 계속 늘어가는 상황입니다.”

“이상하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오카다 그룹 역시 유례없는 엔고 때문에 외부 투자를 늘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 한번 자세히 알아봐.”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의식적으로 최민혁 이름을 계속 머릿속에서 지웠다. 효과는 있었다. 이제는 최민혁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참 호찌민 고속도로 건설은 어떻게 마무리가 되었어?”

“우원 건설과는 협의가 잘 끝났습니다. 그들 역시 본인들 재정 상태 때문에 무리수를 두지 않았습니다.”

“한부 그룹이 가만히 있어?”

“우원 건설이 계약할 때에 내놓은 서류가 문제였습니다. 조작에 가까운 재정 서류 때문에 소송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숨겨놓은 막대한 부실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만으로 난리가 날 겁니다.”

그랬다.

한부 그룹이 숨긴 우원 건설 부실 규모는 외부로 밝혀진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KM 그룹이 이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권력에 줄을 대고 있는 한부 그룹이 협박도 하고는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런저런 부실 규모가 더 늘어났다.

KM 그룹 법무 팀에서 그 문제를 걸고 늘어지자 한부 그룹이 슬그머니 물러났다.

실상 한부 그룹은 계약을 빌미 삼아서 KM 그룹을 압박하려고 했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 이후에 소송 문제는 계속 말이 나돌았는데, 최근에 와서야 완전히 종결된 것이다.

‘한부 그룹에 문제가 많다는 소리가 있던데, 생각보다는 심각한가?’

“한부 그룹이 그렇게 쉽게 물러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문제가 많나 봐?”

“네, 생각보다는 부실이 더 큽니다. 우원 건설은 어떻게 보면 돈세탁 창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혹시 그 자료도 얻었어?”

“그건 아닙니다. 한부 그룹 분위기가 좋지 않아서 적당한 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쯧.”

최문경 부회장은 혀를 찼다. 한부 그룹의 아킬레스건이 있다면 협상용으로 딱 맞다. 다만 그 약점이 한부 그룹의 역린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이 최동영 상무의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에도 최민혁이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떠올리자 인상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씨발.’

KM 건설과 관련된 일이라서 자신과는 직접 연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호찌민 고속도로 건설도 백지화되었다.

필리핀 정부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혹시 필리핀 정부가 태클 걸지 않아?”

권재홍 비서실장도 순간 망설였다. KM 건설이 한 걸음 물러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바뀌었다. 그 때문에 정작 피해를 본 것은 필리핀 정부였다.

내부적으로 두 회사를 밀어주겠다고 밀약까지 한 상황인데, 갑자기 손을 뗐기 때문이다.

필리핀 관리가 화를 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아무래도 한번 만나보셔야 할 듯합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멋진 수영장 전망을 둘러보면서 툴툴거렸다.

“그 일은 왜 보고를 하지 않은 건가?”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부회장님은 국내 문제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 알았어. 그래, 내가 잘못한 것은 인정하지.”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최민혁 실장 때문에 정작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간과한 것을 깨달았다. 최용욱 회장 말이 맞았다. 자신은 최민혁에게 너무 집착했다. 냉정함을 회복했다.

그제야 좀 더 넓은 안목으로 KM 그룹을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KM 전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야. 정작 내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어.’

“연락해서 한번 미팅을 잡아봐.”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 * *

최문경 부회장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실무진과 만나서 머리를 낮출 생각조차 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필리핀 정부 반응은 달랐다.

피델 라모스 대통령이 초대한 것이다.

얼떨떨한 최문경 부회장은 필리핀에서 휴양을 즐기러 왔다가 말라카냥 대통령궁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피델 라모스 대통령의 태도였다.

그는 지난 일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KM 그룹이 부실한 업체에게 일을 맡겼다가 부실 공사가 일어날 것을 막아준 점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저희 KM 그룹은 성실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기업입니다.”

당황한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설마 우원 건설 일이 지금에서는 오히려 호재가 될지는 상상조차 못 했다.

하지만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KM 산업 반도체 증설 문제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그리고 TRS 정보통신에 대한 협력을 부탁합니다.”

“네, 네?!”

피델 라모스 대통령 앞이라는 것을 잊은 채 최문경 부회장은 크게 당황했다. 여기서 TRS 이야기가 거론될지 몰랐다.

같이 자리한 리잘리노 나바로 상공장관은 한 수 더 떴다.

“정보통신 분야에 우리 필리핀 정부는 관심이 많습니다. 이와 관련된 투자라면 세금 감면을 비롯한 기반 시설 인프라 구축에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좋다. 너무 좋아서 꿈이 아닌가 싶었다.

‘하필이면 TRS야!’

최문경 부회장은 순간 필리핀 인프라를 떠올려 보았다. 확실히 시장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과연 TRS 사업 트렌드가 무너질 때도 과연 필리핀 정부가 지켜보기만 할까라는 점이다.

최악의 경우에 TRS 사업이 필리핀 정권의 짐이 된다면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은 몇 년 후의 미래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정말 많이 고민했다.

아마 최민혁에게 된통 당한 경험이 없었다면 거짓말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경험이 최문경 부회장의 욕심을 밀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최민혁 실장에게 당한 경험 덕분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은 욕망을 가까스로 떨쳤다.

‘빌어먹을.’

조카 최민혁은 먼 한국에 있다. 그런데 망령이 되어서 최문경 부회장을 계속 압박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최문경 부회장은 넝마처럼 엉켜 있는 욕망을 가까스로 떨쳐냈다.

최민혁 때문에 분노한 상태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솔직하게 말했다.

“…TRS 사업은 저희 KM 그룹에서도 접기로 했습니다.”

“네?”

피델 라모스 대통령조차 깜짝 놀랐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다행히 TRS 관련 자료도 들고 왔다. 그는 수행원에게 연락해서 관련 자료를 가져와서 내밀었다.

“으음, 이건 좀 놀랐습니다.”

리잘리노 나바로 상공장관은 피델 대통령을 눈빛을 마주한 채 고개를 흔들었다.

피델 대통령 표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그 역시 이런 대답을 들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떠오른 표정은 미소였다.

신뢰가 듬뿍 담긴 미소.

그는 최문경 부회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역시 최 부회장님은 탐욕이 가득한 다른 기업과는 다릅니다.”

역시나 최문경 부회장의 기대를 벗어난 반응에 내심 깜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이 보고서를 저희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필요하면 자료를 더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제가 다시 초청할 테니, 그때는 편하게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 *

최문경 부회장은 말라카냥 대통령궁을 나설 때까지도 어리둥절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신뢰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부회장님 덕분에 앞으로 필리핀 일은 잘 풀릴 것 같습니다.”

“그런가?”

최문경 부회장도 피식 웃었다. 자신감도 생겼다. 그제야 최민혁에 대한 집착도 떨쳤다. 이성을 차리고 나서야 TRS 사업도 결국 최민혁 때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진짜 보통 놈이 아니구나.’

조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이번 만남은 단순해 보이지만 피델 대통령에게 신뢰를 줬다는 점에서 수천억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모습에 권재홍 비서실장이 소리쳤다.

“부회장님!”

“아, 미안. 민혁, 이놈을 잊으려고 노력해도 쉽지가 않아.”

“그래도 필리핀에 있을 때만큼은 국내 일을 멀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제 와서 지금 벌이고 있는 최민혁 실장 일에 끼어들기에는 너무 늦습니다.”

“그렇겠지? 그놈이 또 이상한 짓을 벌이겠지?”

“네. 지금은 지켜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상대는 오성 전자와 DL 그룹입니다. 아무리 최 실장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두 대기업을 상대로 한 싸움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해야겠어. 이이제이지. 굳이 내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어. 정말 멍청했다니까. 그래서는 안 되지.”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진짜로 최민혁에 대한 감정을 떨쳤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국내에서 최민혁이 벌이고 있는 일을 최문경 부회장이 안다면 또 헤까닥 돌아버릴 것이 분명했다.

특히 소니 오다 히로 부사장이 최민혁 실장을 찾아간 일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큘러스 지분 매각에 대해 루머가 일어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이 난리일까. 최 실장이 도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는 건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 참, 이일태 이사는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

* * *

충격을 받은 이일태 이사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필리핀으로 출장을 가버렸다.

이 중요한 시기에 출장이라니.

‘최 회장님의 압박 때문일까?’

그가 최용욱 회장조차 최민혁 일에는 끼어들지 않으려고 한 점에 놀랐다.

더 충격적인 일은 권태성 실장의 반응이었다.

오성 전자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KM 전자에 저자세를 취했다.

DL 그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최민혁 실장을 어떻게든 공격하려고 한 이들이 죄다 물러났다.

하지만 오다 히로 소니 부사장이 최민혁 실장은 만난 것은 단순히 충격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나온 TV 사업부 매각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콜린스를 정리할 정도라면 위성 사업부 매각은 일도 아니었어.’

이일태 이사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결국 김현우 수석 부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김현우 수석 부장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후유, 이 이사, 자네 사정이 나보다 더 좋아. 난 지금은 그저 엎드려 있어야만 해.”

“무,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창명 이사가 날 버림 패로 삼으려고 해. 그러니 살려면 몸조심해야지.”

양주 병째로 술을 마시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는 안재운이 이번 일에 끼어들지는 상상도 못했다.

“아니, 이걸 좋아해야 하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자네도 안재운 황태자에 대해서는 알지? 경영 기획실에 적응 못 해서 일본 유학을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번 오큘러스 법인 인수에 끼어들었어. 덕분에 이창명 이사는 찍소리도 못해. 오성 그룹 윗선에서 경고를 들었나 봐.”

“그 말씀은…….”

“어, 이번 일로 이창명 이사는 모든 책임을 나에게 다 뒤집어씌우려고 했어. 난 성공할 자신이 있었는데, 실패로 끝났어. 그런데 있잖아. 사람 일이 참 알 수가 없어. 안재운이 압력을 넣은 덕분에 이창명 이사가 숨을 죽이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나마 오성 전자에서 내가 무사할 수가 있었어. 이게 말이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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