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범용구 기자는 조성돈 팀장에게서 연락을 받자 어리둥절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작정하고 자신을 초대할지는 몰랐다.
당연히 편집장 최경진은 취재를 허락했다.
“다만 제대로 인터뷰를 해. 또 핵심이 되는 정보는 얻지 못한 채 엉뚱한 짓만 하지 말고, 이번 오큘러스 지분 매각처럼 어설프게 처리하면, 당장 잘라 버릴 테니까.”
그랬다.
뒤늦은 이야기이지만 오큘러스 지분이 매각된 이후에야 한영 일보는 오큘러스 지분 매각 소식을 들었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오성 전자와 DL 그룹 양쪽에서 압박이 들어왔다.
결국 오큘러스 지분 매각 소식은 한영 일보도 기사화하지 못했다.
이 정보를 아는 이들은 그저 KM 전자 임직원이나 아니면 이와 관련된 기업뿐이다. 그런 그들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언론을 통해서 제보해도 기사화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경진 편집장도 덕분에 사장에게 불려가서 열나게 깨졌다.
“…네.”
* * *
범용구 기자는 자리에 부담을 느끼자 경제 파트 전문인 최광수 기자를 같이 불렀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KM 전자를 찾아갔다.
그러다 KM 전자 본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을 발견했다.
일본인 몇 사람이 KM 전자 데스크 앞에서 소란을 피우는 중이었다.
[아, 정말 답답하네. 분명히 최민혁 실장과 약속을 잡았다니까!]
불행히도 데스크 안내는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다.
결국 KM 전자 경비가 나서서 이들 팔을 잡고 강제로 끌고 나갔다.
제일 뒤쪽에 양복을 입은 중년인은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 끌려 나가는 일본인을 째려봤다.
[요시다 부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죄, 죄송합니다.]
두 사람은 일본어를 사용한 덕분에 다른 사람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범용구 기자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 제가 일본어를 좀 합니다. 혹시 누구인지 알 수 없을까요?]
흥분한 요시다 마야 부장이 다급하게 범용구 기자 손을 잡았다.
[제발 말 좀 전해주십시오. 저희는 일본 소니 사에서 나왔습니다. 협상 때문에 최민혁 실장에게 사전에 약속을 잡았는데, 이쪽은 모른다고 합니다.]
[네? 소니에서 나왔다고요? 실례지만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저는 요시다 마야 부장이고, 이분은 오다 히로 부사장님입니다.]
‘트, 특종이다!’
[아, 부사장님!]
깜짝 놀란 범용구 기자가 나서서 통역을 해주었다.
다행히 데스크 안내도 뒤늦게 상황을 알자 곧바로 사과했다.
더욱이 때마침 점심을 먹고 회사로 복귀하던 기획 팀이 그 모습을 봤다.
일본어에도 능한 정성근 대리가 나서면서 상황이 그제야 풀렸다.
하지만 범용구 기자는 귀를 쫑긋한 채 이들 대화를 듣고 나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이들이 왜 이곳을 온 거지. 가만 설마 TV 사업부 매각 때문에 그래? 소니가 인수하려고 작정한 거야?!’
눈치를 보던 그는 중간에서 상황을 중재하는 정성근 대리 옆에 있는 배종대 과장에게 달라붙었다.
그는 기습했다.
“정말 KM 전자에서 TV 사업부 매각을 검토하는 중입니까?”
배종대 과장은 기자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 부인했다.
“아, 전 모릅니다.”
범용구 기자는 확신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서 집요하게 매달렸다.
“에이, 또 이러신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우리를 초청한 것 아닙니까. TV 사업부 같은 일이 아니면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불과 지난주에 이일태 이사를 포함한 위성 사업부가 매각된 사건을 잘 아는 배종대 과장은 슬쩍 물러나고 말았다.
“진짜 모른다니까!”
“아, 이러시지 좀 맙시다. 배종대 과장님은 기획실에서도 유명한 분 아닙니까?”
물러나기만 하던 배종대 과장은 버럭 소리쳤다.
“그 알 만한 기자 양반이 왜 그럽니까.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콜린스 신화를 이룩한 우리 회사가 그 콜린스를 매각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주도권을 잡은 범용구 기자는 정성근 대리 안내를 받아서 엘리베이터에 오른 일본 일행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소니의 오다 히로 부사장같이 바쁜 사람이 아무런 용건도 없이 KM 전자 본사로 찾아오겠습니까. 자꾸 이러시면 저희는 KM 전자가 TV 사업부를 소니에게 매각했다고 기사 내보겠습니다!”
황당한 협박에 열받은 배종대 과장은 삿대질까지 하면서 소리쳤다.
“아, 자꾸 억지 부리면 강제로 쫓아낼 거야. 그리고 그따위 가짜 뉴스를 쓰면 당신네 언론사가 무사할 줄 알아? 만약 허위 기사 때문에 주가가 폭락한다면 당신네 언론사가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하지만 분노한 배종대 과장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다른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가 이들 갈등을 봤기 때문이다.
십여 명의 기자가 우르르 몰려와서 배종대 과장 입에 마이크를 댔다.
“조금 전에 하신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설마 TV 사업부 매각이 사실이었다는 말입니까?”
“여기서 확실히 답변해 주셔야 합니다. TV 사업부 매각 소식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나중에 가서 소송하니, 다른 소리를 하시면 안 됩니다.”
“맙소사 설마 일본 소니에 TV 사업부를 매각하는 겁니까?!”
“아니, 아무리 소니가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국민이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소란은 점점 커졌다.
처음 기자의 질문 목소리와 마지막 기자의 말소리는 마치 증폭된 것처럼 KM 전자 본관 로비를 쩌렁쩌렁 울리고 말았다.
오가는 임직원조차 걸음을 멈춘 채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배종대 과장도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이 쓰레기가!’
범용구 기자는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TV 사업부를 정말 소니에 매각할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매각 대금은 어떻게 됩니까?!”
“……!!”
질문하던 기자들 눈이 왕방울처럼 크게 커졌고, 쓰나미 같은 질문 공세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배종대 과장도 질린 얼굴을 한 채 사무실로 도망치고 말았다.
다른 기획 팀 직원은 기자들을 따가운 눈으로 쳐다보면서 물러났다.
다행히 본사 경비가 나서면서 기자들의 혼란도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장 자기 휴대폰으로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정말입니다. 일본 소니의 오다 히로 부사장이 KM 전자를 직접 찾아왔습니다. 수행원 숫자만 봐서는 사전 만남이 틀림없습니다!]
막 닫치는 엘리베이트 문 사이로 이 광경을 본 배종대 과장은 양손을 얼굴을 덮고 말았다. 그 역시 예상치 못한 실수에 크게 당황했다.
‘크, 큰일이다.’
* * *
배종대 과장은 기획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조성돈 팀장을 찾았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15분 정도가 지난 후에 사무실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스트레스로 초췌해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한 지시는 모두 정상적인 업무와 달라서 적응을 잘 못 한 것이었다.
배종대 과장은 그런 조성돈 팀장 마음도 모른 채 후다닥 달려갔다.
“티, 팀장님, 크, 큰일 났습니다. 오다 히로 부사장이 우리 회사 방문한 것을 가지고 언론사에서 TV 사업부 매각한다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아마 몰랐다면 깜짝 놀랐을 테지만 이미 이런 상황을 유도 중인 조성돈 팀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배종대 과장을 질책했다.
“배 과장은 곡 선정에나 집중해!”
“아니, 팀장님, 정말 큰일 아닙니까. 아직 TV 사업부 매각이 완전히 결정 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꼭 그렇지도 않아.”
“네? 아니, 제 말은 TV 사업부 매각이 문제가 아니라 일본 소니와 이야기가 된다는 겁니다. 만약 이 소식이 알려진다면 난리가 날 겁니다!”
한숨을 내쉰 조성돈 팀장은 자기 자리에 앉은 후에 두통약을 먹었다. 최근 최민혁 실장 때문에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실수 때문에 당황하는 배종대 과장을 보자 피식 웃고 말았다.
“배 과장,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 실장님이 일본 소니에 TV 사업부를 넘기겠어? 아니, 생각을 해봐. 오다 히로 부사장이 온 타이밍에 기자들이 그렇게 몰려올 수가 있겠어?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안 들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배 과장, 자네는 말이야. 짜인 무대에 괜히 끼어들어서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설마 일본 소니 매각설을 의도적으로 언론사에 흘릴 목적이었습니까?”
그는 일 층 데스크 쪽에도 지시해서 의도적으로 소란을 만들었다. 다만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 되지 않았다.
굳이 미묘한 이 문제를 배종대 과장에게 말해서 문제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답답한 친구네. 꼭 똥인지 간장인지 찍어봐야 맛을 알아?”
“…….”
식은땀을 흘리던 배종대 과장은 넋을 잃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기획 팀 다른 팀원 역시 다들 입을 딱 벌린 채 조성돈 팀장 입만 쳐다보았다.
사전에 일을 만들고도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니.
자신이 아는 근엄한 조성돈 팀장인지 다들 의심했다.
조성돈 팀장은 따가운 시선에 혀를 찼다.
“그냥 그렇게 알아. 그렇다고 날 그런 눈으로 볼 필요가 없어. 내가 이런 술수를 부릴 머리가 없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잖아?”
“…실장님입니까?”
“아, 그 정도만 해. 아니 내가 지난주에 영국에 가서 스팅을 만나 저작권을 사들일 동안에 아무런 진척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거야?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 다른 곳에 눈을 돌려!”
“…죄송합니다.”
배종대 과장도 할 말은 많았지만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그나마 자리에 나타난 정성근 대리에게 툴툴거렸다.
“정 대리, 일본 애들은 어때?”
“실장님과 지금 미팅 중입니다.”
조성돈 팀장은 때마침 최민혁 실장 호출 전화를 받고 나서는 자리를 비웠다.
배종대 과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여전한 정성근 대리 얼굴을 쳐다보았다.
“혹시 다른 것은 없어? 기자를 불러 모으거나 하지 않았어?”
“김부영 영업 팀장님이 기자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특별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다 히로 부사장 이야기는 안 하고?”
“기자들이 묻기는 하지만 김부영 팀장님도 자세한 사안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그 말은…….”
배종대 과장도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는 조성돈 팀장이 설마 음모를 꾸밀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대충 짐작하는 듯 툴툴거렸다.
“아무래도 TV 사업부 매각 때문에 일본 소니를 만난 사실을 많은 사람이 알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누가?”
“최 실장님요.”
“…….”
기획 팀원은 다들 눈동자와 같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나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돈 때문인가?’
엉뚱한 일에 휩쓸려서 괜히 마음고생한 배종대 과장은 화가 났다.
“최 실장님은 정말 너무한 것 아냐. 꼭 그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해?!”
뒤에서 조용히 숨어 있던 박상기 차장이 커피를 홀짝이면서 앞으로 나섰다.
“소니 매각 소식을 일반인이 알면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고 오성이나 LC 전자에 그런 사실을 퍼뜨릴 수도 없잖아.”
“뭐 이런 식으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상관이고, 뭐고가 없잖아. 우린 TV 사업부를 매각한다는 소리를 한 적이 없어. 일본 소니 측에서 먼저 찾아온 것이니까.”
“설마 언론에 TV 사업부 매각 의사가 없다는 식으로 발표한다는 소리입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안 그러면 이미 이야기가 된 윗선은 그렇다고 해도 본사나 공장, 특히 공장 쪽은 큰 혼란이 일어날 거야.”
그랬다.
콜린스를 죽어라고 생산하는 공장 입장에서 갑자기 TV 사업부 매각 소식을 들으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