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자네 말은 뭔가 다른 일이 생겨서 디지털 위성 사업에 차질이 생긴다는 말인가?”
정확히는 IMF다. KM 전자 보고서에는 큰 위기가 있다고 되어 있지, 정확히 그 규모가 어느 정도라고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국가부도 사태까지는 두 사람도 전혀 상상을 못한 것이다.
최민혁은 굳이 두 사람의 머리를 더 혼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것까지 제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전 안 좋을 가능성을 높이 봅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기에 굳이 위성 사업부 지분을 들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허.”
문형섭 부사장은 몇 가지 더 질문했지만 애매한 답만 들었다.
오영근 사장도 대충 최민혁이 하는 말을 깨닫자 굳이 더 질문하지 않았다.
‘뭔가 있구나.’
이미 이와 비슷한 일을 수차례 경험한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오영근 사장은 잠깐 고민하다가 굳이 위성 사업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TV 사업부 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매각 말입니까. 하루아침에 정할 일이 아닙니다. 조금은, 아니 상당 기간 시간이 더 필요해요.”
“…다른 대안이 있나?”
“이왕이면 좀 더 비싼 가격에 팔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한 조연에게 연락해서 미끼를 던져놓아야죠. 지금 당장은 단역인 언론을 통해서 일단 TV 사업부 매각 정보를 흘리는 것으로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올해는 아니라는 말이군.”
“1조 가치가 넘는 사업부를 단 몇 개월 만에 매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굳이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더욱이 임직원이 동요할 만한 문제입니다. 그러니 임직원들이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차 싶었다. 최용욱 회장만 용납하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임직원이 이 정보를 얻고 나면 혼란이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알겠네.”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이번 디지털 지분 매각 협상을 보면서 최민혁 서둘러서 일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괜한 걱정이었군. 하긴 최 실장이 호락호락한 친구는 아니니까.’
* * *
박광민 사원은 최근 인센티브로 무려 500만 원이나 받아서 많이 들떴다. 그 어떤 대기업도 KM 전자만큼 인센티브를 많이 주는 곳은 흔치 않았다.
동창 모임에 나가서 한 번 자랑하고 나서 질시를 받기도 했다.
그는 이제 KM 전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어제 MP3에 탑재할 노래 선정 때문에 야근해서 11시에 출근하는 중에 습관적으로 신문을 봤다.
[[단독]KM 전자의 TV 사업부 매각설!]
“……?!”
처음에는 그도 왠 지라시가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데 기사 내용은 전혀 아니었다. 익명의 제보자를 통해서 얻은 정보로 KM 전자가 TV 사업부 매각을 검토한다는 기사였다.
박광민 사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그는 마치 100m 단거리 선수처럼 기획 팀으로 달려가서 이 기사를 보여주었다.
기획 팀 역시 다들 깜짝 놀랐다.
“에이, 말도 안 돼!”
대다수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KM 전자의 지금 주가 모멘텀이나 마찬가지인 사업부가 바로 TV 사업부다.
그런데 그 TV 사업부가 사라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물론 정성근 대리 생각은 좀 달랐다.
“그게…….”
다시 버벅거리는 정성근 대리.
배종대 과장이 화를 버럭 내다가 정성근 대리를 보고 소리쳤다.
“야, 정 대리, 너 정말 꼭 그래야겠냐?!”
“죄송해요.”
“아니, 생각이 있으면 똑바로 말을 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정성근 대리도 답답한 마음에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기획 팀의 따가운 눈총을 받자 심호흡까지 했다. 보는 사람이 미칠 지경이었다.
“정 대리, 그만해!”
질책은 효과가 있었다. 정성근 대리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MP3 사업이 기획대로만 된다면 굳이 TV 사업부에 매달릴 이유는 없습니다.”
“그건 정해진 것이 없잖아. 재수 없어서 MP3가 쪽박을 차면 어떻게 해?”
“카세트 플레이어 시장만큼은 먹습니다. 일본 소니, 파나소닉 같은 회사 매출만 먹어도 아마 TV 사업부보다 더 이익이 클 겁니다.”
“흠.”
거기엔 배종대 과장도 답하지 못했다. 다른 기획 팀도 그제야 이성적으로 주판을 튕기고 나서야 정성근 대리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성근 대리는 한 수 더 떴다.
“TV 시장은 점점 디지털 위주로 흘러갈 텐데, 자금력이 떨어지는 우리 회사는 경쟁사를 따라잡기 힘들 겁니다.”
“…….”
다들 침묵했다. 생각도 못 한 지적이었다.
그런데 박상기 차장 역시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LC 전자가 제니스사를 인수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어떻게 보면 가전 시장 판도를 완전히 뒤바꿀 사건이야.”
배종대 과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어, 사실이야. LC 전자 역시 가진 생산 기술과 비교해 볼 때 상표 가치가 많이 떨어져. 막대한 투자를 한다고 해도 쉽게 따라잡기는 어려워. 콜린스라는 모델 가지고도 우리 회사가 고전하는 것과 비슷해.”
콜린스는 확실히 대박을 터뜨렸지만 세계 시장 전체로 보면 아니었다.
아직은 RCA, 필립스, 일본 가전 왕국보다는 몇 수 아래라는 이미지가 있다.
소비자도 콜린스 명성을 듣기는 하지만 선뜻 나서서 구매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콜린스 덕분에 KM 전자는 이제 브랜드 가치를 점점 키워가는 중이었다.
배종대 과장도 혀를 내둘렀다.
“하, 그건 정말 충격입니다. 설마 LC 전자가 제니스를 인수하려고 하다니. 가만 그거 혹시 콜린스 때문인 겁니까?”
“그래. 특히 대형 TV 생산성 향상 때문이야. 제니스는 우리처럼 완전 평면 브라운관 기술을 가지고 있어. HDTV 기술은 미국 표준 규격인데, 케이블 TV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니까.”
정확히는 월마트도 제니스와 계속 협상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다만 월마트가 선뜻 제니스 TV로 결정을 못 하는 것은 품질 차이 때문이다.
두 회사 제품 다 평범한 브라운관 기술이기는 하지만 화질 면에서 콜린스의 판정승이었다. 실제로 유럽 시장에서 두 가지 제품에 대한 비교 벤치마크가 있었는데, 83 : 97로 나왔다.
그만큼 콜린스의 완성도는 현존하는 그 어떤 TV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건 쇼킹한 일이네요.”
박상기 차장도 최민혁 실장의 판단을 이제는 인정했다.
“나도 최 실장님이 너무 성급하게 나서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아. 만약 콜린스만 믿고 무리하게 사업을 밀어붙였다가는 내년에 가서 큰 위기를 닥칠 수도 있어.”
박광민 사원은 멍하니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 그러면 정말 우리 회사가 TV 사업부를 매각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게 될 수도…….”
조성돈 팀장이 때마침 기획 팀으로 돌아오다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역시 기획 팀을 설득하기는 곤란해서 시선을 피했다.
그는 따가운 시선을 받자 일축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으니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는 마.”
물론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기획 팀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다들 머릿속이 복잡했다. MP3 미래 가치가 괜찮다는 것을 알아도 선뜻 TV 사업부 매각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조용히 끝났으면 좋겠어. 그런데 최 실장님이 그걸 원치 않으니, 문제야. 설마 언론에 흘리라고 할 줄은 몰랐어.’
* * *
KM 전자 위성 사업부 매각설은 기획 팀뿐만 아니라 KM 전자 본사를 넘어서 주변으로 퍼지면서 끊임없이 나돌았다.
그 덕분에 위성 사업부 매각 결정이 나도 위성 사업부 팀은 매우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남은 인원도 그렇게 많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허훈 과장은 자기 짐을 챙기면서 굳은 얼굴의 이석우 부장을 쳐다보았다.
“이 부장님, 괜찮습니까?”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런데 TV 사업부 매각이 정말일까요?”
“우리가 인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어. 더욱이 카더라 이야기만 나오잖아.”
“하지만 이번 일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닌 것 같아서요. 우리 사업부도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지만 결국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만하자.”
하지만 불안한 허훈 과장의 입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긴 그래도 고용 승계가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일태 이사님이 DL 정보통신과도 인맥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고요.”
확신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석우 부장이라면 앞일을 잘 알 것 같아서 한 질문이다.
이일태 이사에게서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이석우 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직원들도 자기 짐을 챙기면서 계속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고용 승계가 된다고 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위성 사업부 자체가 지금까지 낸 실적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성 사업부에서 ETRI와 공동 연구를 하면서 얻은 지분이 있기에 그나마 버티는 것이었다.
DL 정보통신도 그런 점을 고려해서 위성 사업부를 인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만 쓸모가 없어진다면 과연 자신들을 그냥 둘까 하는 점이 걸렸다.
문제는 지금 남은 직원이 다른 회사에 이직을 알아봐도 면접에서 다 떨어졌다는 점이다. 그 잘나가는 KM 전자를 왜 그만두는지 다들 궁금해했던 것이다.
창백한 얼굴의 이일태 이사가 마침 이사실을 나와서 위성 사업 팀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도 할 말은 많았지만 차마 언급하지 못했다.
지금 그 자신조차 앞으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데, 다른 임직원까지 챙겨주기는 어려웠다.
“너무 걱정하지 마. DL 그룹에서 단단히 투자를 진행했으니까. 우리가 갈 DL 스카이는 자본금만 100억이 넘는 회사야.”
DL 스카이는 e오성처럼 DL 정보통신에서 분리된 회사다.
겉으로 봐서는 DL 이름만 들어갈 뿐이지, DL 계열사는 아니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지만 괜한 소란을 피하고자 김상구 회장이 한 조치였다.
이일태 이사는 그래서 더 불안했다. 차라리 DL 정보통신에 매각된다면 오히려 안심했을 것이다. 일단 자리를 잡은 회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DL 스카이는 막말로 아무것도 없다. 자칫하다가는 어느 정도 위성 사업 세팅만 끝나면 토사구팽당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렇게 되겠지.’
착잡한 이일태 이사는 계속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설마 최민혁 이사와의 갈등이 이런 결말을 맺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때마침 나타난 문형섭 부사장은 이일태 이사 모습에 선뜻 말을 걸지도 못했다.
“문 부사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문형섭 부사장은 딱히 이일태 이사에게 감정은 없어서 더 안타까웠다.
“미안해.”
“그런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차라리 최 실장님을 만나서 한번 사과를 해보는 것이 어떤가?”
이일태 이사는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최 실장님 성정을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애초에 제 주제 파악을 못 했던 겁니다.”
뒤늦은 후회.
이일태 이사는 자신이 최훈열 전무와 김현우 상무 라인을 탔던 것을 자책했다. 아니, 김현우 상무가 나갈 때 그때 떠나야 했다.
지금 위성 사업부에 남은 직원은 고작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제는 어디 가도 내세울 것이 없었다.
자신이 생존할 방법은 DL 스카이에 가서 실적을 쌓는 것뿐이다.
‘다행이라면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아. 디지털 위성 사업 장래는 밝으니까.’
특히 곧 있으면 무궁화 위성이 발사된다. 그 이후로 디지털 사업은 정보통신부가 주관해서 빠르게 진행이 된다.
그 중심은 오큘러스 법인이다.
그러니 절망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소식을 듣고 나타난 최민혁은 마침 이일태 이사 얼굴에 떠오른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피식 웃으면서 잠깐 쳐다보았다.
이일태 이사가 뒤늦게 최민혁을 발견하자 깜짝 놀랐다.
“아, 최, 최 실장님.”
그만 놀란 것이 아니다.
허훈 과장을 비롯한 이석우 부장 역시 화들짝 놀라서 몸을 떨었다.
최민혁은 힐끗 그들의 표정 변화를 살피면서 내심 만족했다.
‘저 두 사람이 악명이 자자한 그 친구들이군.’
악착같이 회사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두 사람.
그들은 절묘한 방법으로 사내에 이런저런 문제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