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63화 (263/1,021)

#263.

최용욱 회장은 수십 차례 MP3를 만져도 보고, 관련 보고서를 다 읽고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맞아, 오 사장이 이상할 정도로 민혁이 그 녀석 편을 들었어. 그때 말할 수가 없다고 했던 것이 이 MP3 사업이었을까? 그렇지. 오 사장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나보다 더 놀랐을 거야.’

최민혁과 최용욱 회장 사이의 지분 증여를 둘러싼 갈등 시에 오영근 사장이 직접 찾아와서 자신과 최민혁의 갈등을 중재했다.

‘그때 이미 MP3 개발 프로젝트는 이미 어느 단계를 넘어섰구나.’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가 MP3에 들어가는 칩을 살피면서 불쑥 장승일 실장에게 질문했다.

“…이 칩도 설마 그 녀석이 고안한 건가?”

“네. 이미 콜린스 이전부터 이 제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내부에 들어가는 칩은 이미 몇 달 전에 개발한 상태입니다.”

“콜린스로 난리가 났을 때 말이야?”

“네. 최 실장님은 그때 이미 또 다른 사업 아이템에 착수했습니다.”

최용욱 회장도 이제는 너무 놀라서 허탈한 웃음만이 나올 뿐이다. 최문경 부회장만 해도 당장 TRS 사업을 정리도 못 하고 버벅이는 중이다.

그런데 손자 최민혁은 아예 MP3라는 새로운 산업 자체를 창출했다. 그야말로 미래 산업을 홀로 개척한 셈이다.

최용욱 회장 자신도 반도체 선구자란 명예를 늘 가슴에 품고 있었기에 손자 최민혁의 행보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 이거야 원, 귀신에 홀린 기분이야.”

“미래가 불투명한 아날로그 TV 사업부를 매각하고, MP3 사업을 중심으로 회사 체질 자체를 개선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구먼. 그런데 말이 쉽지 일을 이렇게 풀어가기는 어려워. 나도 이렇게는 할 수 없어. 장 실장 자네 말이 맞아.”

장승일 실장은 힐끗 테이블 위에 놓인 KM 전자 보고서를 다시 살폈다.

“아무래도 최 실장님은 TV 사업부 매각을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 온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 모든 일은 앞뒤가 맞지 않아. 가만 그러면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어떻게 된 건가?”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오성 전자의 시선을 끌 목적이었던 같습니다.”

“점입가경이군.”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만약 다른 기업이 MP3 개발에 대한 것을 알았다면 알게 모르게 간섭했을 것이다.

‘일단 이 특허가 가장 큰 문제였겠지.’

500건이 넘는 특허 중에는 핵심 특허로 분류된 항목도 있었다. 각 특허를 인수하는 과정에 관한 결과도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톰슨 멀티 미디어, 브라운 연구소, 심지어 시즈벨에 대한 것까지 말이다.

보통 사람이 봤다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재계에 잔뼈가 굵은 최용욱 회장만큼은 그 과정을 충분히 공감했다. 그는 그래서 더 손자 최민혁에게 경탄했다.

다들 콜린스의 성공에 젖어 있을 때도 최민혁은 파티를 즐기지 않았다.

최민혁은 뒤로 따로 미래를 대비한 준비를 계속해 온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이전과는 달리 KM 전자 보고서를 다시 수십 차례 계속 읽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행간의 의미를 조금씩 파악했다.

‘…이것도 다른 뜻이 있을 거야. 아직도 제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어. 왜 굳이 이렇게까지 했을까. 하긴 내가 몇 달 전에 이 보고서 이야기를 들었다면, 받아들이지 못했을 거야.’

당시만 해도 그냥 나온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손자 최민혁은 황당하게 올해만 7천억 이상 매출액을 올린 TV 사업부를 진짜 정리할 계획이었다.

다만 매각 대상은 누굴까 고민했다.

“…오성 전자일까?”

“현재로서는 오성 전자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다만 최 실장님 성격을 봐서는 소니를 비롯한 다른 업체도 제안서를 넣어서 공개 입찰 방식으로 갈 확률이 높습니다.”

“…매각 대금은 얼마 정도일까?”

“최하가 1조는 넘을 겁니다.”

현금 1조.

많이 쳐 줘야 고작 1,200억 가치에 불과했던 TV 사업부의 가치가 무려 1조가 넘었다. 10배 이상 가치를 키운 것이다.

“허허허.”

최용욱 회장은 한동안 넋을 잃은 채 웃기만 했다. 그는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인 MP3를 보면서 손자 최민혁의 의도를 뒤늦게야 깨달았다.

돈 안 되는 사업은 다 정리하고, 돈 되는 사업만 남겨 놓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안건민 회장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어.”

“하지만 지금 오성 전자가 만약 KM 전자 TV 사업부를 인수한다면, 내년만 해도 3~4조 이상 매출을 늘릴 수 있습니다. 오성 전자 가전 사업 부분에 미치는 효과까지 참작하면 적어도 5~6조 가까운 매출 신장세를 보일 겁니다. 최 실장님의 제안을 절대로 거절하기 힘들 겁니다.”

“기가 막히는군.”

최용욱 회장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TV 사업부 매각에 반대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사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최민혁을 호출해서 이 안건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질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전화한 것도 그렇다.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난리를 친 것은 자신의 잘못이었다. 손자 최민혁은 이미 자신과 격이 달랐던 것이었다.

‘…정말 난 놈은 난 놈이다.’

* * *

최용욱 회장은 성급하게 최민혁을 부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장승일 실장에게 지시해서 최민혁의 계획이 과연 괜찮은지 확인부터 지시했다.

결과는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판단이라는 것이었다.

콜린스 절정기는 올 년을 거쳐서 내년 상반기까지였다.

그 시점이 지난다면 콜린스 가치도 시간이 갈수록 떨어진다.

2~3년 후라면 오성 전자도 TV 사업부 인수에 큰 강점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리고 KM 전자가 콜린스 때문에 재미를 보는 기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기간도 있다.

즉 콜린스 양산을 위해서 무리하게 공장을 늘렸을 때 오히려 부메랑을 맞을 수가 있다.

만약 차세대 콜린스 모델이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불행히도 차세대 콜린스 모델은 디지털 TV가 될 확률이 높았다.

만약 최민혁의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오히려 콜린스로 인한 공장 증설이나 무리한 확장 때문에 KM 전자가 휘청할 수도 있다.

차라리 톰슨 멀티미디어와 같은 기업과 손잡고 간접적인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리스크 관리에 좋았던 것이었다.

장승일 실장도 큰 고비를 넘겼다고 판단하자 최민혁에게 바로 보고했다.

[좋네요. 아, 한 가지 더 부탁해요. 이왕이면 기조실 내에 TV 사업부 매각에 대한 정보를 흘리세요. 가능하면 오성 전자 귀에 들어가도록 말입니다.]

[…오성 전자가 먼저 관심을 보이기를 원하는 겁니까?]

[네. 다만 신중할 필요는 있어요. 이쪽에서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렸다고 하면 권태성 실장은 또 다른 생각을 할 겁니다. 그러니 입 가벼운 임직원을 잘 활용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지시에 혀를 차면서도 무시하지 않았다.

정보를 흘리는 것은 간단했다. 기조실 직원을 한 번 불러 모은 후에 TV 사업부 매각에 따른 보고서를 만들라고 지시하면 되기 때문이다.

“……?!”

KM 그룹 기조실 직원은 다들 입을 딱 벌린 장승일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너무 그렇게 어렵게 생각 마. 단순히 검토만 하는 것이니까.”

장승일 실장의 지시 덕분에 KM 그룹 기조실은 어수선했다.

이전과는 달리 지금 KM 그룹 계열사는 이미 구조조정 단계에 들어갔고, 다른 계열사도 계속 검토 중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TV 사업부 매각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임권수 부장은 이런 KM 그룹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회사 내에 반골 성향이 다분한 천경구 과장을 따로 만났다.

천경구 과장 역시 기조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임권수 부장을 만나기가 무섭게 불만을 토로했다.

“아, 정말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차라리 임 부장님이 있을 때가 좋았습니다. 장승일 실장님을 견제할 사람이 없으니, 온통 주먹구구식으로 풀어갑니다.”

천경구 과장은 임권수 부장이 따라주는 술을 계속해서 들이켰다.

그는 지금 상황이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임 부장님이 가장 이상적인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하기는 그렇지만 오성 그룹과 KM 그룹을 비교하기는 그렇지.”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임 부장님 따라서 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나도 천 과장 좋아해. 하지만 아직은 자리가 나지 않았어.”

“어, 자리가 나면 절 스카우트라도 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천 과장은 나랑 잘 맞으니까.”

임권수 부장은 부도수표를 마구잡이로 남발했다. 천경구 과장이 그 자신과 손발이 맞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능력이 있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어차피 이 술자리는 KM 그룹의 내부 사정을 듣기 위함이었다.

천경구 과장은 임권수 부장의 스카우트 제안에 혹해서 최근 KM 그룹 내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다 폭로했다.

거기에 전혀 예상도 못 한 이야기도 있었다.

“사업부 구조조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장 실장님이 지금 오성 전자를 따라 한다고 돈이 안 되는 계열사 사업부를 다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난리입니다.”

실제로 KM 계열사 구조조정 이야기가 최근 돌면서 KM 그룹도 어수선했다.

계열사 살생부가 있다는 소리가 돌면서 혼란에 혼란을 거듭했다.

남의 집 불구경이나 마찬가지인 사건이라서 임권수 부장은 천경구 과장 의견에 찬성만 했다.

그런데 천경구 과장은 술이 좀 들어가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폭로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정보입니다. 제가 임 부장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아, 글쎄, 우리 장 실장님이 KM 전자의 TV 사업부 매각까지 검토하지 뭡니까?!”

“응?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거 진짜야? 말도 안 되잖아. 도대체 KM 전자가 뭐가 아쉬워서 TV 사업부를 매각해?!”

“임 부장님도 놀라시는군요. 일단 기조실 내부에서 검토만 하고 있는데, 세상에 그 결과가 뭔지 아십니까. TV 사업부를 매각하는 것이 KM 그룹에 이익이랍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자, 잠깐만 자세한 이야기를 좀 해봐. 내가 천 과장 자네를 믿는 거 알지. 나만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자리를 만들 수도 있어.”

“어? 그렇습니까.”

천경구 과장은 내친 김에 미주알고주알 계속 이야기했다.

주로 TV 사업부 사업성 평가에 따른 내용이다.

충격에 빠진 임권수 부장은 이 얘기를 당연히 의심했다.

“하지만 TV 사업부를 매각하면 KM 전자에 남는 것이 없을 텐데?”

“신사업을 한다지 뭡니까. 아니, 몇 번 사업에 성공했다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만 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하지 뭡니까.”

“…그렇지. 그건 아니지.”

“그래서 제가 속이 탄다 아닙니까. 불안해서 회사에 다니질 못하겠습니다.”

“…자네가 힘들 만하네. 나도 자네에게 듣지 않았다면 믿을 수가 없었을 거야.”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걱정하지 마. 우리가 남인가.”

“역시 부장님밖에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 * *

임권수 부장은 오성 전자로 복귀하기가 무섭게 권태성 실장을 찾아가서 KM 그룹에서 진행되는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군. KM 그룹이 자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해도 당장 구조조정을 할 정도로 나빠졌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내부적으로 이미 적자 사업을 정리하고, 기업 체질 개선을 꾸준하게 진행 중이라서 그 정도는 아닙니다. KM 산업 역시 사상 최고 매출을 갱신하면서 현금이 쌓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하잖아. KM 그룹 자체적으로 돈이 남아돌 텐데, 왜 굳이 알짜 사업부를 이런 식으로 막 정리하려는 거야?”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듣기로는 KM 전자 보고서 때문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KM 전자 보고서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권태성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KM 전자 기준으로 나름의 설득력이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게 KM 그룹 전체적으로 적용되느냐는 좀 다른 문제다.

‘최용욱 회장이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권태성 실장은 영문을 잘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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