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60화 (260/1,021)

#260.

“투자 위험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설립하는 디자인 하우스 외에 설계 능력이 우수한 곳과도 제휴 협상을 할 예정입니다.”

“그쪽 지분 인수도 가능해?”

“그건 현재 검토 중입니다. 그런데 자금 압박을 받고 있는 업체 몇 곳은 긍정적입니다.”

“부지는 대략 6천 평 정도 생각하고 있으니,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 사업 자체가 조립 사업이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진행하는 보험 성격이 강해.”

“잘 알고 있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장녀 최영란의 똑 부러진 대답에 만족했다.

그는 최영란이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마중하러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문득 최용욱 회장이 도착한 것을 발견했다.

TRS 상황을 떠올린 그는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 * *

최용욱 회장은 손녀 최영란의 능력을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비록 실적만 놓고 보면 최민혁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최영란을 나름 인정했다. 이번 디자인 하우스 설립을 밀어준 것도 그 이유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

그는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의 밝은 분위기에 꽤 만족했다.

디자인 하우스를 책임진 경영진과 악수를 하면서 그들의 강한 의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람을 잘 뽑았네.’

이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 설립에 모두 손녀 최영란이 관여했다. 인적 구성도 마찬가지다. 칩 설계 전문가를 불러 모은 것 자체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다만 그는 디자인 하우스 경영진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자기 시선을 피하는 최문경 부회장을 보면서 혀를 찼다.

최영란이 김이경을 데리고 한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최문경 부회장은 수행만 달랑 데리고 홀로 있었다. 평소에는 상상도 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넌 이 좋은 날 얼굴이 뭐냐?”

“…죄송합니다.”

“아직도 TRS와 협상이 안 풀려?”

최문경 부회장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제이미인지, 지랄미인지 그놈이 중간에서 계속 깽판 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막을 잘 아는 최용욱 회장도 장남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쪽에서 원하는 것이 뭐래?”

“…위약금을 원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주고 끝내면 되잖아.”

“…그게 500억을 달라고 합니다.”

“뭐? 아니, 미친놈 아냐. 자본금이 얼마인데, 500억을 달라는 거야?!”

“저도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송을 진행하게 되면 골치 아픕니다. 국내 소송은 어떻게 막는다고 해도 미국 소송은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꼭 미국에서 소송해야 하는 거야?”

“…합작 법인 계약서상에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지오텍과의 합작 법인은 KM 그룹이 먼저 미국에 있는 지오텍을 찾아가서 시작되었다.

KM 그룹이 을이고, 지오텍이 갑인 셈이다.

따라서 합작 법인 설립 계약서상에도 지오텍이 중심이었다.

소송이 진행되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진행된다는 의미다.

당시 최문경 부회장은 합작 법인이 끝날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오텍 역시 합작 법인이 무산되어서 소송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행히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조언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검토를 거친 결과 자금이 꽤 많이 필요하다고 결론 내렸다.

최민혁의 사주를 받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중간에서 계속 깽판을 놓았다. 두 회사 간의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이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허.”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을 질책할 힘도 나지 않았다. 무능해도 이렇게 무능할 수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최근 계속되는 악재는 최문경 부회장의 경영 능력을 계속 떨어뜨렸다.

특히 위기 극복 대처 능력은 최훈열 전무보다 못하는 평이 나돌고 있었다.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네 사내 평판도 문제가 될 거다. 계열사 사장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

“…압니다.”

“최선을 다하거라.”

“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이야기이기는 한데, 기획 조정실이 현재 TRS 사업뿐만 아니라 계열사 전체를 구조조정 한다는 루머가 파다합니다.”

“사실이다.”

“네? 서, 설마 부회장인 제가 모르는 일이 지금 진행된다는 말입니까?”

“너에게는 아직 말하지 말라고 그랬다. 당장 TRS 사업 정리도 못 하고 있지 않아!”

“그, 그건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굳이 지금처럼 경기가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계열사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할 필요가 있어. 일단 TRS 사업부터 마무리하면 말해주마.”

“아, 아버지!”

“쯧, 네가 정말 부회장인지 아니면 우리 계열사 사장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는 일마다 민혁이 그 녀석만 못하냐.”

“그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TRS 사업도 시작은 아버지 지시에 따라서 한 겁니다. 그런데 왜 제 탓만 합니까?”

“이놈이!”

최용욱 회장은 눈을 부라리면서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임직원들도 다들 눈치를 보면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 장승일 실장이 때마침 나타나서 최용욱 회장을 찾았다.

최용욱 회장도 장남 최문경 부회장의 기를 너무 죽인다고 생각해서인지 ‘다음에 이야기하자!’란 말로 수습한 후에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 실장, 지금 우리 큰 손녀가 이렇게 근사한 디자인 하우스를 설립했어. 도대체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뭐가 있나?!”

굳은 얼굴의 장승일 실장은 상당히 흥분한 얼굴로 최용욱 회장을 독촉했다. 그의 모습은 절대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모습이다.

“회장님, 시간을 좀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그래?”

옆에서 분노를 삭이고 있던 최문경 부회장이 끼어들었다.

“장 실장, 이젠 난 아예 보이지도 않나 봐. 아예 아는 척도 하지 않네.”

최민혁의 폭탄 발언에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장승일 실장은 뒤늦게야 최문경 부회장을 발견하곤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포도주를 홀짝이는 최문경 부회장이 혀를 찼다.

“완전히 엎드려서 절 받기야? 날 부회장이라고 생각은 하는 거야? 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곧 있으면 아버지까지 무시하겠어?”

원래가 떠받들기를 좋아하는 최문경 부회장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장승일 실장을 노골적으로 걸고넘어졌다.

최용욱 회장이 장남 성격을 아는 터라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만해.”

“아니, 아버지도 보셨지 않습니까? 장 실장이 지금 아래위도 구분 못 하는 거. 얼마나 건방지면 저렇게 행동하겠습니까?”

“장 실장이 급한 일이 있어서 몰라본 거잖아. 왜 그렇게 사소한 일로 문제를 만들어. 넌 매사에 그게 문제야!”

“아버지!”

“조용히 해라.”

냉랭한 최용욱 회장 말에 최문경 부회장은 다시 꼬리를 말았다. 포도주를 살짝 맛만 봤는데,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쉽게 취한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수행원을 데리고 장승일 실장과 같이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를 떠났다.

김이경이 뒤늦게 그 광경을 보곤 최문경 부회장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갈구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인상을 와락 구긴 채 이를 으드득 갈고 말았다. 그는 왠지 장승일 실장이 최민혁 실장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젠장맞을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이게 모두 최민혁 그놈 때문이야!’

그런데 때마침 보기 싫은 얼굴이 수행원 두 사람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바로 최민혁 실장이다.

* * *

최민혁은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 분위기를 살피면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활기에 넘치는 회사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통이 아니네. 시작부터가 좀 달라.’

김명준 과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미 한국 전력의 주문을 받아서 새로운 칩을 개발 중이라고 합니다. 개발 역시 어느 정도 끝나 있고, 두 달 안에 양산될 것이라 합니다.”

“빠르네요.”

“한국 전력 외주를 받은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법인을 설립했습니다. 거기에 KM 산업에서 투자를 받아서 스타팅 자체가 다른 기업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역시.”

최민혁도 최영란 과장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미 이 디자인 하우스 설립에 대한 미래도 알고 있었지만, 기간이 대폭 당겨졌다.

‘어쩌면 IMF에서도 살아남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건 꼭 장담하기 어렵다. IMF 시기에 한국 전력이라고 해서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민혁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신을 환대하는 사람을 만났다. 마른 체격으로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이다.

바로 KM 인스트루먼트의 김환진 사장이었다.

“아, 최 실장님, 이렇게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자주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요즘 회사에 문제가 생겨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50대 초반의 김환진 사장은 주변 눈치를 보지 않은 채 정중하게 최민혁에게 허리를 숙였다.

뒤늦게 그 모습을 본 다른 KM 계열사 관련자도 최민혁 주변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이번 행사 주인이 마치 최민혁이라도 되는 양 최민혁을 환대했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최문경 부회장이 섬뜩한 눈으로 다가왔다.

“요즘 잘나가는구나!”

차가운 최문경 부회장 시선에 몰려왔던 이들은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들도 최문경 부회장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을 봤다.

김이경은 최민혁 때문이 아니라 계열사 관련자가 보이는 모습 때문에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여보, 뭘 또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요!”

“어, 그, 그래.”

김이경의 끼어듬에 크게 당황한 최문경 부회장은 표독스러운 김이경 시선에 뒤로 물러났다.

김이경은 마치 최민혁 어머니라도 되는 양 최민혁을 환대했다.

“이 자리에 와줘서 정말 고맙구나.”

“당연히 와야 할 자리입니다.”

최민혁은 겉으로는 입가에 미소를 띈 채 김이경을 마주했다. 하지만 전생 1회차 기억을 떠올린 그는 쉽게 자제할 수가 없었다.

김이경 역시 최민혁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으로 서로 친족이라는 점만 내세울 뿐.

고만고만했다.

어지간한 김이경조차 최근 최민혁의 오큘러스 법인 사태 때문에 쉽게 진정하지 못했다. 이 법인 지분 매각 대금의 규모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최민혁이 이상할 정도로 오큘러스 법인에 대해서 나서지 않는 점이다.

만약 이 오큘러스 법인에도 최민혁이 관련이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계열사의 동요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최영란 과장은 세 사람의 겉도는 모습을 보자 한숨을 쉬면서 나섰다.

“왔어?”

“어, 누나 첫 사업인데, 당연히 와야지. 다른 사람은 안 보이네?”

“다들 얼굴만 내비치고, 떠났어. 요즘 회사 분위기가 어수선하잖아.”

최민혁도 KM 그룹 내부에 구조조정 소식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김환진 사장이 그 대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사태의 시발점은 최민혁 자신이어서 그들 시선을 피했다.

“할아버지는 안 보이네?”

“할아버지도 조금 전에 장승일 실장이 찾아와서 먼저 떠났어.”

“아, 장 실장.”

최민혁은 자신이 장승일 실장에게 한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피식 웃었다.

‘급하기는 급했나 보네.’

“이리 와. 내가 우리 회사 안내해 줄 테니까.”

“사양 안 할게.”

최민혁은 따가운 최문경 부회장과 김이경 여사의 눈총을 받으면서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는 최영란이 두 사람 모습에 한숨을 내쉬는 것도 봤다.

“미안해.”

“괜찮아.”

“나도 어떻게 중재를 하고 싶은데,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어.”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

“…꼭 두 분이랑 싸워야 해?”

“나도 웬만해서 싸우고 싶지 않아. 그렇다고 당해줄 수는 없잖아?”

“…….”

입술을 살짝 깨문 최영란은 잠깐 침묵했다. 그녀 역시 최민혁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갈등을 중재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이상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민혁아, 난 말이야.”

“아니, 됐어. 그런 이야기 하지 마. 누나 인생만 생각하는 것이 맞을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 회사 말이야. 키우고 싶잖아? 정말 생존하고 싶다면 KM 산업과 거리를 두는 것이 좋아.”

“그게 무슨 말이니?”

“스스로 알아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