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솔직히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하기보다는 그냥 최 실장님에게 솔직하게 묻는 것이 어떨까요. 지난 콜린스 사태 때도 그렇지만 최 실장님은 KM 계열사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저희가 먼저 나서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괄괄한 구길모 차장 의견을 무시하지는 못했다.
“그래, 맞아. 그게 낫겠지. 실장님도 KM 그룹 사정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야. 따지고 보면, 지금 사태가 일어난 것도 최 실장님의 조언 때문이니까.”
‘그래도 너무 자주 찾는 것 같아서 불편해. 설마 이번부터 컨설팅비를 따로 내라고 하지는 않겠지?’
* * *
최민혁은 최근 떡밥을 던져놓고서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봤다. 권태성 실장은 딱히 그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혹시라도 오성 전자가 딴짓을 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애초에 오성 전자를 믿지를 않았다.
그럼에도 오성 전자를 택한 것은 도시바보다는 오성 전자가 그나마 낫기 때문이다.
‘인텔은 낸드 가격이 너무 비싸. 거기다 온갖 갑질을 다 일삼을 것이 분명해. HY 전자는 아직 오성 전자보다는 한 수 아래고.’
하지만 권태성 실장이 순순히 당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약점을 안다면 권태성 실장은 얼마든지 뒤통수치지는 않는다고 해도 갑질을 일삼고도 남았다. 아니면 보복을 하던지 말이다.
장승일 실장이 다시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권태성 실장과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장승일 실장은 다른 것은 묻지 않고 지금 기조실에서 진행하는 구조조정 사안에 대해서 넌지시 자문했다.
“흠.”
“아직 최용욱 회장님에게도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세.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을 KM 그룹 정식 후계자인 것처럼 대우했다.
최민혁은 KM 그룹 계열사 사업부 중에 체크된 항목을 확인했다.
“붉은색 마크는 정리 대상이고, 노란색 마크는 현재 검토 중인 계열사입니다. 파란색은 구조조정 대상에서 배제했습니다.”
“…….”
최민혁은 옆에 앉아서 설명에 열중하는 장승일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장승일 실장에게 이전에 보인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
아니, 그는 단호한 장승일 실장의 결정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광학기기와 시계 사업부를 정리하려고 할 줄은 몰랐어. 이 사업부도 정리까지 가려면 적어도 6~7년은 있어야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KM 인스트루먼트 역시 선택과 집중을 택했다. 기존 사업부 중에서 의료기기 사업 부분을 완전히 도려내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이 의료기기 사업부는 정확히 KM 전자와 궁합이 맞습니다. 원하시면 의료기기 부분은 KM 전자 쪽으로 넘기고 싶습니다만.”
정확히는 따로 독립시켜서 분사시키는 방식이 0순위였다. 하지만 KM 전자에 넘겨 버리면, 뒤처리도 간단해서 최민혁을 넌지시 떠본 것이다.
사실 최민혁은 KM 계열사 구조조정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짐이 자신에게 넘어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최민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됩니다.”
“네?”
장승일 실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계열사 사업부를 그냥 주겠다는데, 완강하게 반대하는 최민혁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룹 승계 구도를 이을 후보 중에 한 사람이 최민혁이라면 자기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계열사가 많을수록 그 영향력은 커진다.
이번 계열사 사업 부분 정리는 최문경 부회장조차 받기 힘든 카드였다.
다만 그도 최민혁 실장 대답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정말 이 계열사는 가망이 없다는 소리구나.’
사실 그도 최민혁이 자기 제안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고민은 할 줄 알았다. 그런데 한마디로 거절하다니.
최민혁은 복잡한 문제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냉큼 반박했다.
“아, 흠, 말하자면 의료기기 쪽은 경쟁사를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독일의 지멘스 같은 기업과 싸워야 하는데,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아니, 실장님이라면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요?”
의료기기에 대한 경험이 없는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제가 아는 전문 분야가 따로 있습니다. 불행히도 의료기기는 그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도 한번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것도…….”
“실장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사업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닌데, 무슨 도전을 합니까. 가능성이 없는 쪽에는 투자 안 합니다.”
“아쉽습니다.”
집요한 장승일 실장의 행동에 최민혁은 혀를 찼다.
“설사 개발한다고 해도 병원 쪽에 영업하기도 간단하지 않아요.”
“…그게 문제입니다. 덕분에 계속 누적 적자가 쌓여서 KM 인스트루먼트 흑자를 갉아먹는 주범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조차 의료기기 자체가 수익성이 워낙에 높아서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그 집착이 계속 늘어진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도 의료기기는 훗날 돈이 된다고 확신하기에 계속 끌고갔다.
집착이 집착을 낳았다.
KM 그룹 계열사가 대부분 이와 비슷한 행태였다.
장승일 실장도 이런 그룹의 타성에 젖어 있어서 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특히 의료기기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할 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민혁은 이런 그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장승일 실장이 최민혁에게 계속 집착하는 이유였다.
한편으로 잘하는 것이다.
자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말 가능성이 없을까요?”
최민혁은 의료기기 벤처도 잘 알지만, 그 회사의 미래가 어떤지 인생 1회차를 통해서 배웠다. 굳이 복잡하고, 자세한 내막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전 의료기기 쪽은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합니다.”
최민혁은 저자세인 장승일 실장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할 말은 많았다. 그런데 굳이 복잡한 의료 사업 부분을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지금 KM 전자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합니다. 콜린스만 해도 산적한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도 실장님이라면…….”
“장 실장님이 뭔가 큰 착각을 하시는 것 같네요. 저라고 해서 모든 일을 잘할 수가 없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가장 잘하는 것을 하는 것뿐입니다.”
“으음.”
장승일 실장은 놀란 눈으로 최민혁의 표정을 살폈다. 요즘 한창 잘나가고 있는 최민혁 실장이 대놓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말할 줄은 몰랐다. 거만해도 이상하지 않을 최민혁 실장의 행동과는 사뭇 달랐다.
‘정말 예상 밖이구나.’
그건 이 자리에 참석한 구길모 차장을 비롯한 다른 기조실 직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최소한 최민혁 실장이 지금까지의 성공에 취해서 오만한 모습을 보일 것이라 봤다. 웬걸 그런 모습은 아예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면 역시 정리하는 것이 맞겠군요.”
장승일 실장은 붉은색 펜으로 의료기기 사업부에 ‘정리’라고 쓴 후에 두 줄로 쭉쭉 그었다.
“…….”
최민혁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리한다는 말은 그 사업 담당자를 다 정리해고 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였다.
담당 사업부 소속 직원은 하루아침에 회사에서 잘릴 수 있는 상황이다.
그게 좋은 이야기일 리가 없다.
‘구조조정 임직원에 대한 처리는 알아서 하겠지.’
“으음, 이런 말하기는 좀 그런데 꼭 그 이야기를 저에게 하셔야 합니까?”
“하지만 이번 구조조정도 결국 실장님의 조언에 따른 겁니다. 최소한의 충고는 해주셔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KM 그룹과 KM 전자는 남이 아닙니다. 최용욱 회장님도 실장님의 조언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흠.”
스토커처럼 집요한 장승일 실장의 태도에 최민혁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대로 둔다면 이 구조조정 안건을 가지고 온종일 이 사무실에 있을 분위기였다.
“알았습니다. 뭐 그렇다고 합시다. 긴 이야기는 할 것 없고, 거기 표시한 사업은 다 정리하세요. 아마 그게 정답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장승일 실장.
최민혁은 부담스러운 얼굴을 한 채 인상을 찌푸렸다.
장승일 실장은 마치 지난 일을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기조실에서 검토 중인 부실기업 정리 계획안을 일이 보고했다.
장승일 실장은 급한 일을 끝내자 그제야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지나가는 투로 낸드 메모리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도 오성 전자 쪽의 지인을 통해서 우연히 KM 전자가 낸드 메모리 300만 개 물량을 주문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라시 같지만, 혹시라도 사실이라면 최 실장님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서…….”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권태성 실장이 그냥 조용히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듣게 될 것이라고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지 따위는 자질구레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유언비어가 아닙니다.”
장승일 실장도 깜짝 놀랐다.
“네? 저, 정말 오성 전자에 낸드 메모리 1,000억 물량의 공급 계약을 진행 중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크게 당황했다.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쉽게 말할지 몰랐다. 그는 내친 김에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을까요?”
최민혁은 갖은 잔머리를 굴리는 장승일 실장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자기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아마 장승일 실장 모습이 어떻든 몇 달 전이라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성 전자와 낸드 메모리 공급 협상을 하는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다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직 기조실 직원이 알아서는 곤란했다.
‘뭐 이 정보가 퍼져도 상관은 없지만, 입이 얼마나 가벼운지 확인해 둘 필요는 있어.’
“잠깐 둘이 조용히 이야기하시죠.”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KM 전자 본사 사무실을 나와서 장승일 실장과 같이 본사 근처에 있는 KM 음악 연습실을 찾았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연차를 내고 음악 연습실을 찾은 임직원이 있었다.
노래방과는 격이 다른 설비에 폭 빠져서 음악을 즐겼다. 간간이 피아노와 기타 연주를 제법 할 줄 아는 임직원은 연주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 열창하는 이들은 최민혁 실장을 보자 바짝 긴장했다.
최민혁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 나서는 장승일 실장과 같이 KM 음악 연습실 건물에 있는 사무실을 들어갔다.
이곳은 아직 제대로 세팅이 되어 있지 않아서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최민혁은 손수 커피를 타서 장승일 실장에게 내밀었다.
“시설이 괜찮죠?”
“실장님 의도는 잘 알지만, 너무 과한 것 같습니다.”
“지나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너무 경직된 사고를 피하기 위한 좋은 대안이니까.”
“후유, 실장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힐끗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최민혁 실장이었다.
다른 재벌 3세와는 달리 여자나 마약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니, 이미 졸업했다고 해야 하나?’
최민혁은 생각에 잠긴 장승일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과거에는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던 이가 이제는 편한 부하 직원처럼 느꼈다.
‘내가 그만큼 컸다는 얘기지. 보자, 어차피 할아버지에게 알려지겠지. 그렇다면…….’
약간의 고민.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상황이 KM 전자의 변곡점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계획한 일을 이제부터 하나씩 풀어가야 했다. 따라서 장승일 실장 설득도 필요했다. 그다음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이 알아서 할 테니 말이다.
최민혁은 이제까지 마음 깊숙이 숨겨둔 진실 한 가지를 다시 꺼냈다.
“뭐 제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KM 전자 보고서에 대해서는 잘 아시죠?”
“…그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수십 번을 다시 검토하는 보고서입니다.”
그로서는 만족스러운 대답이다. 몇 달 전이라면 아예 대화조차 되지 않을 사람이 장승일 실장인데, 이제는 최민혁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래요. 그렇다면 말하기 편하겠네요. 우리 KM 전자도 KM 그룹과 비교하면 잘나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KM 전자 보고서가 가리키는 미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장승일 실장은 뜬금없는 최민혁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아니 그 잘나가는 KM 전자도 KM 보고서에서 피해갈 수가 없다니. 실장님이 잘못 아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