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정확히는 오성 전자 메모리가 국내에서만 소진되지 않았다. 전 세계에도 판매된다. 따라서 사소한 문제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큰 납품 계약을 권태성 실장 멋대로 판단할 수 없었다.
최민혁이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는 심지어 64MB 낸드 메모리 양산 시기를 당겨서 미래까지 바꾸려고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이용한 것도 오성 전자에 대한 압박을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무리한 일정 때문에 생기는 리스크 관리인가요?”
“네.”
반도체 생산이 그냥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시제품이 아니라 수백만 개 물량이라면 더 그렇다. KM 전자에 공급하고 난 후에 다른 회사에도 팔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따른 공정이 생각보다는 복잡하다.
최민혁도 그런 점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천억 원 가량의 물량이라면, 그쪽에서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수량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기간을 당길 동기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정말 300만 개를 원하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마 추가로 더 많은 물량을 요구할 겁니다. 128MB라면 더 좋고요. 아, 그 용량의 낸드 메모리도 추가로 요청하죠.”
64MB, 128MB 낸드 메모리 300만 개. 초도 물량이 그 정도라면 추가 물량은 더 될 수 있었다. 무려 2,000억이 넘는 물량이다.
아무리 권태성 실장이 최민혁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어떤 용도인지 알 수 없을까요?”
최민혁은 집요한 권태성 실장의 요구에 혀를 찼다.
“TV에 들어간다고만 아세요.”
“TV에 64MB 낸드 메모리와 칩이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칩’ 이야기마저 나오자 최민혁은 머리를 굴리다가 마침 괜찮은 아이템을 떠올렸다.
“…차세대 지능형 TV라고 해두죠.”
권태성 실장은 기다리던 새로운 단어가 나오자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차, 차세대 지능형 TV가 뭡니까?”
“일테면 TV가 컴퓨터처럼 소소한 처리를 작동으로 하는 TV를 말합니다. 으음, 이 정도만 하죠. 솔직히 저도 잘 모릅니다.”
“흠.”
권태성 실장도 최민혁과 대화를 통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쌓이자 최민혁을 째려봤다.
다시 한번 최민혁 얼굴을 살피다가 결심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오큘러스 지분 매각 약속을 지켜야 할 겁니다.”
“물론이죠. 다만 DL 그룹에서 제안하는 가격이 있으니, 최소한 그 기준에 맞춰 줘야 할 겁니다. 물론 오성 전자 상황도 이해가 갑니다. 일방적인 공정 단축으로 말미암은 리스크가 크다는 것 압니다. 반도체 공정 성격상 수백억, 아니 수천억이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자꾸 태클 걸면 그냥 도시바나 아니면 인텔 측과도 이야기해 볼 겁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이 떠난 난 후에 조성돈 팀장을 다시 호출했다. 그는 권태성 실장과 대화 중에 나온 하나의 사실이 의아했다.
“아직 MP3에 대한 정보가 외부에 나가지 않았습니까?”
“네. 아무래도 이일태 이사와 위성 사업부 일 때문에 다른 임직원도 몸을 사리는 것 같습니다. 괜히 회사 내부 정보를 흘렸다가 찍힐까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최근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문제다. 검찰에 구속되어서 감방에 간 이도 있었고, 모든 것을 탈탈 털린 예도 있다.
인센티브 폭탄 속에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러니 그 이상의 이익을 보장받지 않는 이상은 KM 전자 임직원 중에 쉽게 회사 내부 정보를 퍼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당연한 게 회사 지시만 따르면 아파트도 생기고, 행복하게 잘살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사람은 현재 KM 전자 직원 중에 없었다.
최민혁도 KM 전자의 도약 전에 마지막 점검을 거쳤다는 점에서 안도했다.
“이제는 딱히 중요한 정보도 아닌데, 이거 회사 보안이 좋아져서 좋아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모르니, 회사 내부 점검을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내부 정보가 새기를 원하는 건지, 보안을 원하는 건지 오락가락한 최민혁 태도에 조성돈 팀장은 망설이다가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 * *
권태성 실장은 오성 전자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메모리 사업부 쪽 실무진을 만나서 자세한 점검을 시작했다.
양산 기간 단축은 무리하다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미 9부 능선을 넘었다. 심지어 128MB 양산도 이미 고비를 넘겼다. 64MB 공급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권태성 실장은 오성 그룹 윗선에 보고를 올린 후에 공급 계약과 관련된 항목을 꼼꼼하게 검사하면서도 최민혁 실장이 이걸로 뭘 하는지 호기심을 떨치지 못했다.
‘설마 콜린스와 같은 대박 아이템이 또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도통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다.
황광수 차장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일태 이사 때문에 다들 겁을 집어먹어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괜히 폭탄 맞아서 모든 것을 잃을까 염려합니다.”
“우리 쪽에 자리를 만들어준다고 해도 그래?”
“전혀 안 먹힙니다. 절대로 KM 전자를 떠날 수 없다는 태도입니다.”
“허.”
권태성 실장도 최근 KM 전자 연봉, 상여금, 복지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들었다. 음악 연습실은 그야말로 황당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비록 기존 연습실 몇 곳을 제외했다고 해도 연예 기획사 수준의 시설을 일반 임직원에게 공개한 것이다.
그곳에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임권수 부장이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이거는 어떨까요. 굳이 우리만 KM 전자를 뒤질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다. KM 전자에 관심이 있는 쪽에 정보를 흘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쪽저쪽에서 KM 전자를 파고들면, 어떤 형태로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호오, 그거 괜찮네.”
“특히 최문경 부회장이 이 일을 알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좋아. 한번 정보를 흘려 봐. 우리는 지켜만 보자구. 도대체 숨기는 것이 뭔지 확인을 해봐야겠어. 이번 조사에 참여한 기획 팀도 그걸 중점적으로 파.”
“알겠습니다.”
* * *
임권수 부장은 굳이 이곳저곳에 정보를 흘리기보다는 KM 그룹 기획조정실 측에 정보를 흘리기만 했다. 나머지는 여기서 알아서 할 것이라 봤다.
다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최문경 부회장은 TRS 매각과 관련해서 제이미 이사와 갈등 때문에 이 문제에 신경 쓰지 못했다.
소송 전에 합의 문제로 변호사와 같이 법원에 갔다가 제이미 이사와 또 싸웠던 것이다.
그건 장승일 실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 문제 외에 자신이 새로 맡은 일 처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KM 인스트루먼트는 어때?”
“그게…….”
천경구 과장도 기조실 분위기를 아는 탓에 눈치를 봤다.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평소와는 달라서 자칫 한마디 말이라도 안 좋은 쪽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테면 사업 정리 말이다.
장승일 실장은 머리가 아파서인지 관자놀이를 쿡쿡 눌렀다.
“천 과장, 우리 시간 없어. 이번 주말도 밤을 새우고 싶어?”
“…그게 광학기기 사업부와 시계 사업부 적자가 계속 누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현상으로 앞으로 2~3년 후에는 흑자가 예상됩니다.”
“오성 전자는 2~3년 동안 놀고만 있는 거야? 더욱이 일본 측에서 광학 쪽은 일본 중소기업으로 돌린다는 이야기도 있어.”
일본 역시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압박 때문에 엔고는 무섭게 치솟았다. 그러니 일본 기업은 각자 살 길을 찾아야 했다.
“하, 하지만 그래도 이쪽 사업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직원만 해도 100여 명이 넘습니다. 이번에 뽑은 신입도 이 사업부로 돌리려고 하는데, 설마 이 사업을 정리할 생각입니까?”
“나도 안타까워. 하지만 이미 회장님이 지시한 안건이야. 돈이 안 되는 사업부를 과거처럼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어.”
“…….”
충격적인 이야기에 천경구 과장은 당황해서 박재광 과장이나 이수연 대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둘 다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자신이 담당한 사업부 역시 상황이 심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겉으로 봤을 때와 달리 내부를 파면 팔수록 부실이 기하급수적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사업이 유지된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최민혁 인생 1회차에서는 광학기기 사업부와 시계 사업부만 분리해서 계열사 하나를 만드는데, 그것이 KM 옵틱스다.
물론 이 KM 옵틱스는 결국 설립한 지 1년 만에 사업을 다 정리한다.
남아 있는 직원 100명 중에 30%는 권고사직을 받고, 나머지 60% 인원도 추가로 정리를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정리할 최소 인원만 남게 된다.
그런데 몇 년이나 앞서서 사업부를 그대로 정리하는 순서로 접어든 것이다.
이런 내막까지 잘 모르는 장승일 실장도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조언에 따라서 먼저 구조조정을 검토하는 것이다.
기조실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계속 밀어붙였다.
“정신 차려. 지금도 늦었어. 부실한 사업부를 정리해서 사업 체질 자체를 바꾸는 것이 정말 우리 회사가 가야 할 길이야!”
“…알겠습니다.”
최민혁 조언에 따라서 진행하는 일이지만 기업 체질 개선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손실은 둘째 치고, 불필요한 인원을 정리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이번에 TRS 사업 때문에 신규로 뽑은 인원도 있으니,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더욱이 장승일 실장은 계열사 사장이나 실무진을 만나서 설득해야 한다. 아무리 최용욱 회장의 허락이 있다고 해도 반발은 만만치 않다.
그들 중에는 특히 최문경 부회장 라인이 많다는 점도 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필수적인 인원은 챙겨야 해.’
머릿속이 복잡한 장승일 실장은 오성 전자에서 흘린 정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64MB 낸드 메모리가 장착된 신제품이라.’
솔직히 TV에 사용하기에는 충분한 오버 스펙이었다.
뭔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지금 당장은 지쳐서 확인하기 싫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도 KM 전자와 관련된 일이라서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하는 구조조정도 최민혁 실장의 조언에 따랐다. 혹시라도 최민혁 실장에게서 도움을 받는 일이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전에 컨설팅 비용 이야기도 있고 해서 최민혁 실장을 찾기 전에 내부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 차장 자네 생각은 어때?”
KM 그룹 계열사 정리 보고서를 검토한다고 최근 한 달 동안 주말에도 나와서 일해 지친 구길모 차장은 힘없는 어조로 툴툴거렸다.
“신제품인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수량이 너무 많아서 이 정보가 맞는 정보인지 의심스럽습니다.”
회사 생활 적응을 잘하는 박재광 과장 역시 구길모 차장 의견을 밀어줬다.
“최민혁 실장님이 낸드 메모리 300만 개를 주문했다니. 너무 나간 것이 아닐까요. 적어도 1,000억이 넘는 물량인데, 도대체 그 많은 물량을 어떻게 적용한다는 말일까요? 콜린스 차세대 모델이 아무리 잘 팔려도 이건 수용 못 합니다.”
‘300만 개라니, 저게 무슨 소리야?’
“…….”
장승일 실장은 보고서 뒤편에 달린 세부 항목을 그제야 읽고 나서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KM 그룹은 계열사 정리한다고 정신이 없다.
그런데 KM 전자는 무려 1,000억이나 되는 메모리 공급 계약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부럽고를 떠나서 솔직히 화가 났다.
장승일 실장 표정 변화를 살핀 구길모 차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TV 쪽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핸드폰과 같이 판매가 어느 정도 되는 제품일 겁니다. 아마 최 실장님이 비밀리에 개발 중인 제품일 수도 있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착잡한 얼굴을 한 채 양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정말 잘나가는 사람은 뭘 해도 다르구나.’
“…그렇겠지?”
장승일 실장도 이 정보의 출처가 의심스러웠지만, 그것까지 캐지는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KM 전자의 의도였다.
구길모 차장이 슬쩍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