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제 나이도 있고 해서 정말 이런 말을 안 하려고……. 네?”
즉시 꼬리를 마는 권태성 실장 행동에 최민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김현우 수석 부장 일도 있고 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는 오큘러스 사업 미래가 불 보듯 보인 터라 권태성 실장을 심하게 질책하지 않았다.
오큐럴스 사업이 갑자기 홀딩 되고, 적자가 산처럼 쌓인다면 권태성 실장을 산 채로 파묻는 미래가 펼쳐지게 된다.
최민혁 실장도 양심은 있어서 이번 권태성 실장의 무례는 가볍게 넘어갔다.
“…뭐 STB 사업부 일도 있으니, 저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일도 저랑 관계가 없습니다. 권 실장님이 충분히 검토해서 계약한 것이니까.”
‘그래서 내가 최 실장 당신을 못 믿겠다고 하잖아!’
권태성 실장 가슴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후유.”
사람 맞은편에 앉아서 한숨까지 내쉰 권태성 실장은 최민혁 실장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정말 이런저런 많은 상념이 떠올랐다. 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최민혁 모습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십니까?”
“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쪽에서 계약하자고 찾아온 것 아닙니까?”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사무실 서랍 안을 뒤졌다. 녹음기 하나를 꺼내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녹음기 전원 버튼을 누르자 지금 대화가 녹음되었다.
“혹시나 나중에 딴소리할 것 같아서 증거로 남깁니다. 오큘러스 지분 매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괜히 또 괜한 손실을 보고 나서 절 원망하지 마세요.”
“지,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아뇨. 나중에 분명히 딴소리할 것 같아서 이렇게 녹음하려 합니다. 제가 장담하지만, 이 녹음을 다시 들을 날이 있을 겁니다.”
분한 권태성 실장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실장님,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최민혁은 녹음기 상태를 확인하면서 방긋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오큘러스 지분 매각이 잘되면 좋겠죠.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와는 안면이 있으니까요. 두 사람에게 적은 돈(?)도 투자했으니, 이익금이 커지는 것도 있습니다.”
그도 뒤늦게 말하면서 송한성 교수 연구 기간을 당기기 위해서 제법 많은 자금을 투자한 것을 떠올렸다. 필요한 장비나 설비에 돈을 펑펑 쓴 것이다.
‘100억은 안 되는 걸로 기억하는데, 생각해보니 제법 투자했구나.’
“작은 돈? 아 좋습니다. 제가 거기까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게 다입니까?”
최민혁도 피식 웃었다. 이제는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300만 개 낸드 메모리 공급 계약이라면 권태성 실장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이 계약을 어떻게 제안할까 생각했다. 원칙적으로 말해서 오성 전자 메모리 대리점 통해서 제안할까도 고민했다. 공급 수량이 많으니, 어차피 기획 팀에서 관리할 테니까. 하지만 괜히 시간만 낭비할 것 같았다.
“사실 64MB 낸드 메모리를 공급받았으면 합니다.”
권태성 실장도 메모리 사업부에서 미는 64MB 낸드 메모리를 모를 수가 없었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이지만 64MB 낸드 메모리는 아직 개발 중입니다.”
“압니다. 그래서 메모리 양산 기간을 좀 더 당겨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갑툭튀로 튀어나온 최민혁 제안에 권태성 실장은 차마 화는 내지 못한 채 별생각 없이 반박했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1-2천 개 물량 정도는 공급이 가능할 겁니다. 그건 제가 따로 말해놓겠습니다.”
최민혁 눈빛이 달빛처럼 반짝였다.
“아뇨. 제가 원하는 수량이 좀 많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량을 요구하기에 이러는 겁니까. 전 겁이 납니다.”
“300만 개!”
“……?!”
메모리 공급 단가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최저 3만 원 선에 잡아도 대략 900억. 즉 적어도 1,000억이 넘는 물량이었다.
권태성 실장도 처음에 숫자를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을 끔뻑거렸다.
최민혁은 느긋하게 앉은 채 피식 웃었다.
“장난 아닙니다. 적어도 내년 초반까지 필요한 물량이 300만 개이고, 아마 그 이상을 더 추가로 요구할 겁니다. 그 정도 물량이라면 오성 전자도 개발 기간 단축을 요구할 수 있겠죠. 아, 공급 계약만 체결된다면 계약금 100억은 당장 오성 전자 법인 계좌로 쏴줄 겁니다.”
1,000억 물량 계약.
아무리 권태성 실장이라고 해도 가볍게 볼 거래는 아니었다. 아직 64MB 낸드 메모리 양산은 끝나지도 않았다. 즉 여기에 계약금을 투자해서 비용 절감도 할 수 있었다.
“…지, 진심입니까?”
“네. 그 물량만 보장해 준다면 오성 전자 쪽에 오큘러스 지분이 더 많이 넘어가도록 도와주죠. 지분 협상도 오성 쪽에 유리하도록 밀어주겠습니다. 하지만 제 할아버지 입장이 있어서 DL 그룹에도 지분 일부를 넘겨야 합니다. 그런 점은 양해를 해주셔야 해요.”
“으음.”
권태성 실장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최민혁 제안을 곰곰이 고민했다. 그도 최민혁 실장이 농담으로 저런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보다는 다른 고민에 빠졌다.
‘아니, 도대체 어디에 쓰는데, 그 많은 물량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아마 다른 사람과 있었다면 이런저런 질문을 했겠지만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최민혁 얼굴을 보자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객에게 자세한 질문을 할 수도 없다.
“그건 이 자리에서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압니다. 그러면 다시 일정을 잡도록 하죠. 아마 조사해야 할 것도 많은 것 같은데, 제가 굳이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흠.”
권태성 기획실장은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서도 최민혁 표정을 계속 살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몰랐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알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서 질문했다.
“혹시 64MB 낸드 메모리를 어디에 사용할지 알 수 없을까요?”
“노코멘트로 답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권태성 기획실장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조성돈 팀장이 연락받고 들어왔다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최민혁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혀를 찼다.
“오성 전자 측에 정보를 전혀 주지 않을 생각입니까?”
“네.”
심술이 가득한 최민혁 얼굴을 본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차고 말았다. 어차피 이제는 곧 MP3 정보를 알 수밖에 없었다.
굳이 메모리 공급업체에 정보를 통제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개발이 다 끝났고, 양산성 검토만 수십 차례를 한 상황에서도 보안을 유지하다니. 실장님도 참.’
* * *
오성 전자 기획실은 생각보다 다양한 영역을 살핀다.
LCD, 시스템 사업부와 같은 사업이 그 하나다.
그리고 메모리 사업부는 오성 그룹 차원에서 지켜보는 핵심 사업이다.
따라서 평소에도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오성 그룹 차원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시끄러웠다.
그만큼 안건민 회장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오성 전자로 돌아오기 무섭게 우선 기획 팀 팀장을 다 불러 모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분노한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오성 전자 기획실을 총동원해서 KM 전자를 파헤쳤는데, 정작 64MB 낸드 메모리와 관련된 정보를 얻지 못했다.
“…….”
다들 침묵했다.
특히 메모리 사업부를 담당한 정형식 팀장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다른 것을 떠나서 KM 전자와 관련된 정보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리점을 통해서 넘어간 테스트 샘플이라서 그 정보를 알기는 어려웠다.
물론 최민혁이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이번에는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완전히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64MB 낸드 메모리 대량 공급 계약은 절대 가볍지 않은 안건이었다.
분노를 잔뜩 토로해서 겨우 안정을 찾은 권태성 실장은 일단 64MB 낸드 메모리 현황부터 살폈다. 예상대로 아직은 양산 전 단계였다.
‘아니 거의 끝자락이군. 128MB 시제품도 이미 나왔어. 아직 언론에 알리지 않은 것뿐이야.’
아직은 외부에 64MB 낸드 메모리에 대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최민혁 실장 요구가 의아했다.
다행히 황광수 차장이 직접 메모리 사업부 쪽에서 몇 가지 정보를 가져왔다.
64MB 낸드 메모리 시제품이 KM 전자로 넘어간 현황이 드러났다.
“200개라, 물량이 적기는 적네.”
“물량이 워낙에 적어서 보고가 올라왔기는 하지만 검토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대리점 측에서도 자세한 것은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메모리 대리점 통해서 넘어간 물량이라서 기획실에서 검토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최민혁 제안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만큼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뭔가 있다고 확신했다.
“왠지 이거 같아.”
“네?”
“지금까지 최 실장이 엉뚱한 짓을 한 것도 이 일과 관련이 있어.”
“설마 음악 연습실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도 연관이 있을거야.”
“하지만 낸드 메모리랑 음악 연습실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게 문제이기는 한데…….”
낸드 메모리 양산 보고서를 살피던 임권수 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합니다. TV에 64MB 낸드 메모리가 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뭔가 더 있어.”
정형식 팀장은 다행히 메모리 사업부 기획 팀 통해서 몇 가지 추가 정보를 받았다.
“최근 KM 전자 측에서 몇 가지 칩 제작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다만 이 칩은 단순히 차세대 TV에 들어갈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한번 알아볼까요?”
“그래, 일단 이것부터 먼저 확인한 후에 오큘러스 지분 계약을 검토해. 최 실장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굳이 오큘러스 지분 매각을 무리하게 진행하지는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오성 전자 기획 팀이 열심히 움직여서 파도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 MP3 칩이나 전원 칩 파일만 봐서는 그 용도를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권태성 실장이 실력자라고 해도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새로운 모바일 기기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 * *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에게서 별다른 연락이 없자 혀를 찼다.
그는 잠깐 고민을 하다가 조성돈 팀장을 호출해서 권태성 실장과 미팅 일정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물론 도시바 측과 협상한 내용을 권태성 실장 귀에 들어가도록 흘려야 합니다.”
도시바 측 담당자 반응은 권태성 실장과는 조금 달랐다.
무려 1,000억이 넘는 메모리 납품 계약에 그들은 적극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권태성 실장은 그 다음 날에 최민혁을 다시 찾아왔다. 그는 잔뜩 열받아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보다는 최민혁이 자신을 가지고 계속 저울질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이성을 차린 덕분에 이전처럼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솔직히 공급 계약에 앞서서 가격 협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오큘러스 지분 계약을 앞두고 한 최민혁의 행동이 문제다.
‘오큘러스 때문에 낸드 메모리가 적용되는 제품에 대해 확인을 하지 못했어.’
권태성 기획실장은 이미 콜린스 삽질을 경험한 덕분에 최민혁 실장의 표정을 다시 한번 살폈다. 도대체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최민혁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그쪽은 메모리를 생산해서 판매하는 업체 아닙니까. 고객이 요구하는데, 팔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권태성 실장은 씁쓸한 얼굴을 한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물론 꿍꿍이가 있는 최민혁은 권태성 실장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따로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그래요. 간단하게 가죠. 어떻게 하실 겁니까? 64MB 양산 물품 공급은 언제까지 할 수 있습니까? 단가는 어떻게 됩니까?”
“그건 검토를 해봐야 합니다. 아, 물론 분위기는 긍정적입니다. 다만 제 마음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윗선에도 보고해야 합니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수율입니다.”
“아직 문제가 많습니까?”
“거의 마무리 단계이지만 아직은 미흡한 구석이 있습니다. 양산 기간을 당기려면 그룹 기조실에서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