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공격적인 마케팅을 계획하고 있고, 그것은 기존의 방식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오면 바로 상세한 보고를 올릴 예정입니다.”
그가 내놓은 보고서는 개략적이었다.
차분한 최민혁 설명과 보고서에 두 사람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미국이나 유럽 수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품 품질뿐만 아니라 판로와 같은 다양한 문제를 고려해야 할 거야. 우리 KM 전자의 영업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어. 월마트 사태만 해도 그래.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해서 생긴 것 같아도 텃새 때문에 생긴 문제였네. 그것은 어떻게 극복할 생각인가?”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매집한 주식 일부를 블록딜로 매각할 생각입니다. 물론 거기에 따른 조건을 따로 챙길 건데, 그 조건이라면 미국 유통망에도 직접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지분 매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지 않나?”
최민혁이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KM 전자의 주가가 어느 정도 오르면 일부 주식을 매각하려고 했습니다. 더욱이 콜린스가 보여준 것처럼 온전히 KM 전자의 힘으로 성장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다른 기업의 도움을 얻어서 시간을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긴 시간이 돈이니까.”
“MP3 시장을 선점한 후에 그 흐름을 타고 계속 뻗어나갈 겁니다. 어차피 MP3 특허 수익만으로도 수익성은 보장받으니, 너무 작은 것에 집착해서 큰 것을 놓치지 않을 겁니다.”
MP3 시장만 선점하면 MP3 시장을 주도한 KM 전자는 결국 그 명성이 독보적일 수밖에 없다.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아이템 개척은 KM 전자를 단순히 국내만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흠.”
최민혁의 큰 그림을 어느 정도 읽은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은 최민혁 실장을 상대로 계속 까칠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최민혁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그는 마치 이런 사태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꼼꼼하게 답변했다.
두 사람도 질문을 더해갈수록 감탄을 금치 못했다.
‘콜린스 때도 그랬지만 이번 경우도 대단하구나. 회장님이 왜 최 실장에게 질겁하는지 알 것 같아. 보면 볼수록 놀라워.’
최민혁은 두 사람이 미처 간과한 부분도 지적해 주었다.
“아마 냅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MP3 파일 공유 서비스 때문에 MP3의 인지도가 급격히 달라지고 있습니다. MP3 양산 직전 단계쯤이면, MP3에 열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에서 MP3 모바일 전자기기는 우리 KM 전자가 유일할 테니까요.”
“…….”
오영근 사장은 냅스트에 대해서는 전혀 몰라서 몇 가지 질문하다가 워낙에 중요한 문제라서 회의를 잠깐 쉬기로 했다.
최민혁도 두 사람이 냅스트에 대해서 처음 들었다고 생각하자 일단 물러났다. 솔직히 몇 달 전이라면 두 사람도 크게 반대했을 거다. 최용욱 회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확실히 생각보다는 자잘한 리스크가 많아. 하지만 생각보다는 큰 반대가 없어서 다행이네. 혹시나 반발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지금 타이밍이 딱 좋은 것 같아.’
* * *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 실장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황했지만 일단 냅스트 관련된 안건에 대해서는 올라온 자료를 살폈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최민혁이 도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는지 몰라서 냅스트 관련 자료를 밑에 직원 통해서 다시 살핀 후에 오영근 사장을 찾았다.
“그저 놀랍기만 할 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가?”
“냅스트의 인기가 문제가 아니라 MP3 파일을 자유롭게 주고받는 사용자가 급증한 것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PC로만 MP3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MP3 모바일 기기 자체가 없습니다. 우리 제품이 전 세계에서 유일합니다.”
“…확실히 놀랍군.”
“더 황당한 것은 MP3 관련 특허는 죄다 우리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성 전자 같은 대기업은 우리 허락 없이는 제품을 못 만듭니다.”
“…특허도 이미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셈이군. 솔직히 감탄을 넘어서 무서울 지경이야.”
문형섭 부사장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최 실장이 딱 지금 이 시기에 MP3 양산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려고 한 것도 이런 냅스트 트랜드를 읽었기 때문일 겁니다.”
오영근 사장은 최근 나온 MP3 흰색 시제품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이어폰을 껴봤다. 그 역시 이제까지 시제품으로 나온 기기를 몇 번 사용해 봤기에 어렵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자신도 이 KM MP3가 없었다면 이런 제품 자체를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문형섭 부사장은 다른 어떤 것보다 MP3 모바일 시장이 태동한 것에 주목했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시점을 최민혁 실장은 알아봤습니다. 전 그게 더 믿기지가 않습니다.”
“후유, 그런가. 솔직히 당황스러워. 이런 전자기기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일단 최 실장을 불러 다시 보고를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세.”
* * *
오영근 사장 지시를 받고 다시 찾은 최민혁은 이전에 했던 보고를 다시 이어갔다.
오영근 사장도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서 다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면 MP3와 관련해서 다른 문제는 전혀 없다는 말인가?”
“있습니다. 다른 부품 수급은 큰 문제가 아닌데, 아직 개발 단계인 64MB 낸드 플래시는 상황이 다릅니다. 이건 오성 전자를 만나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결국 주문량이 문제라는 이야기군. 당해 판매 수량이 백만 대라면 적은 물량은 아니지.”
“아닙니다. 제가 3년간 주문하려는 낸드 물량은 천만 대입니다.”
오영근 사장도 이번에는 펄쩍 뛰었다.
“뭐? 그건 너무 많아!”
최민혁은 자기 손바닥을 펼친 채 오영근 사장에게 쑥 내밀었다.
“아니요, 많지 않습니다. MP3 산업을 제 손바닥 안에 넣을 겁니다. 저희에겐 공격적인 시도가 필요합니다.”
최민혁의 기백에 쫀 오영근 사장은 말을 망설였다.
“하지만…….”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초도 물량 계약을 키울 수밖에 없는 것은 생산 단가 때문입니다. 거기에 64MB 낸드 플래시의 양산 기간을 줄이기 위해서는 오성 전자에 그만한 물량 계약을 제안해야 합니다. 그래야 128MB 양산 기간도 대폭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최민혁이 굳이 낸드 메모리 용량을 키우려고 하는 이유가 있다. 64MB도 MP3 한 곡 용량을 고려하면 꼭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하드 디스크 타입 대박이 터진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최소한 128MB, 아니, 256MB 시대를 좀 더 당길 필요가 있어.’
“…설마 자네는 공급 물량으로 오성 전자를 압박할 셈인가?”
“네. 그래야 본격적으로 영업 활동을 진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콜린스도 제대로 생산을 못 해서 납품을 못하고 있어. 그만한 MP3 물량을 공장에서 생산할 수가 없네.”
최민혁은 지도가 담긴 보고서를 꺼내서 새로운 공장 인수와 관련된 계획을 내놓았다. 정확히는 IMF가 터진다고 해도 이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건 베트남 공장을 인수하는 것으로 대체할 겁니다. 물론 투자를 받아서 진행하면 간단히 될 겁니다. 현재 월마트와 이 안건을 넣어서 적극 협상에 임할 생각입니다.”
“그 말은…….”
오영근 사장은 처음에는 최민혁의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라서 선뜻 이해를 못 했다. 하지만 뒤늦게야 절묘하게 설계된 제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미국 시장 공략을 굳이 KM 전자가 직접 뛰는 것이 아니라 월마트 영업망을 통해서 진행한다면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피할 수도 있었다.
최민혁은 그제야 씩 웃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64MB 낸드 플래시 공급인데, 오성 전자도 MP3 시판 첫해에 최소 300만 개, 3년간 총 1,000만 개 물량 계약이라면 적극적으로 개발 기간을 당길 겁니다. 물론 도시바 쪽에도 같은 제안을 할 겁니다.”
“허허허.”
오영근 사장은 혀를 내두른 채 힐끗 문형섭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영근 사장과는 달리 스피커 때문에 MP3 생산 물량을 어느 정도 짐작한 문형섭 부사장은 놀라지 않았다.
“MP3용 스피커도 같은 건가?”
“네. 다만 품질 문제에 신경을 많이 써주셔야 합니다. 일이만 대 생산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노리는 것이니까요.”
“알겠네. 하지만 콜린스 계약 문제도 아직 매듭을 짓지 못했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밀고 있는 것은 TV 사업부인데, 굳이 일을 무리하게 끌고갈 필요가 있을까?”
최민혁도 잠깐 머뭇거렸다. 따가운 세 사람의 시선을 의식했다. 특히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최병연 팀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딱 시기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제는 세 사람도 알아야 했다.
다행이라면 최병연 팀장은 그다지 매우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MP3 개발을 진행하면서 최민혁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실을 말할 때였다.
“TV 사업부는 매각할 생각입니다.”
“…….”
실로 충격적인 제안에 세 사람은 침묵했다.
조 단위 매출을 기록하는 알짜배기 사업부를 매각하겠다니.
아마 몇 달 전이라면 두 사람은 결사반대를 외칠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은 최민혁 주장에 경악하지 않았다. 오영근 사장이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말이다. 최병연 팀장은 이미 어느 정도 예측한 터라 덤덤했다.
문형섭 부사장이 탄식하고 말았다.
“나도 최 실장 자네가 유별나게 콜린스에 소극적인 것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번에 보니 아날로그 TV 수명은 그렇게 길지가 않겠더군. 더욱이 자네가 들고 온 MP3 모바일 기기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네. 자네가 하려는 것은 기업 개선 작업이겠지.”
그랬다.
최민혁의 목표는 KM 전자의 구조 개혁이다. 디지털 시대에 밀려난 아날로그 TV를 버리고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 생산으로 체제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의도는 외부에 투자를 받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절정기에 오른 TV 사업부를 매각해서 구조 개혁을 진행하는 일이다.
사실 이런 계획을 이제 고작 20살짜리가 한다는 것에 세 사람은 그저 놀랐다. 그들은 넋을 잃은 채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탁월할 리더쉽.
차가운 결단력.
예언가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놀라운 안목.
그들은 그저 놀라운 눈으로 최민혁은 쳐다보기만 했다.
최민혁은 의외로 담담한 오영근 사장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장님은 놀라지 않으십니까?”
오영근 사장도 이런 흐름을 깨달은 것은 장승일 실장이 검토하고 있는 KM 전자 보고서 때문이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네. 자네는 이상할 정도로 콜린스를 등한시하면서 최문경 부회장이나 오성 전자를 건드렸네. 월마트 협상도 마찬가지야. 다른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지. 일테면 KM 전자 보고서처럼 TV 사업부 매각을 할 의도같은 것 말이야. 그러면 자네 행동이 설명되니까.”
최민혁은 힐끗 최병연 팀장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곤 편하게 말했다.
“거기에 TV 사업부 매각 전제 조건은 MP3 성공에 달려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MP3가 실패한다면 당분간은 TV 사업부를 끌고갈 겁니다.”
“…알겠네.”
최민혁은 세 사람의 반응에 꽤 만족했다. 사실 이런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지금까지 진행된 일이다.
‘세 사람 태도를 봐서는 할아버지나 장 실장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을 거야. 둘러가기는 했지만 잘한 선택이었어.’
세 사람은 각자 서로 다른 생각에 잠긴 채 최민혁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돌이켜 봤다. 그들은 특히 냅스트라는 독특한 서비스를 떠올리면서 최민혁의 계획에 새삼 감탄했다.
‘최민혁 실장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미래 안목이 탁월해서일까?’
오영근 사장은 문득 망설이다가 한 가지를 걸고넘어졌다.
“혹시 이일태 이사 말인데, 어떻게 할 생각인가?”
“위성 사업부는 우리 KM 전자와는 노선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니 현재로는 매각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다행히 제값을 주고 인수할 곳도 있습니다.”
“오성 전자와 DL 그룹인가? 하지만 오성 전자만 해도 STB 사업부 실패 때문에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네.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인가?”
“호락호락하게 할 겁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정도 조건이면 오성 전자에게 64MB 낸드 메모리 양산을 더 압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