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배종대 과장 눈빛이 반짝였다.
“정말? 최 실장님 생각을 알 것 같다고? 그게 뭔데?”
“그런데 정확하지는 않아요.”
다소 어눌한 말투가 다시 튀어나왔지만 그걸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정성근 대리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미 정성근 대리에 익숙한 기획 팀은 굳이 정성근 대리를 타박하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런데 정성근 대리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배종대 과장이 결국 정성근 대리의 목을 비틀면서 구박했다.
“야, 정 대리, 너 또 말장난하는 거면 그냥 안 둔다!”
정성근 대리는 헉헉거리면서도 쉽게 대답하지 않다가 결국 제풀에 지쳐서 말했다.
“기획사라면 아예 간판을 걸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그냥 큰 노래방처럼 관리하는 것 같습니다.”
내심 큰 기대를 한 배종대 과장은 혀를 찼다.
“노래방이라니. 정 대리, 그건 좀 아니다.”
“이 건물 지하에 식당도 있던 것 같던데, 그러면 먹고 자고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돈이 없어서 재능을 펼치지 못한 이들을 위한 환경입니다. 대신에 어느 정도 인기를 얻으면 외주 기획사에 계약을 넘겨도 되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번 기획사 소동도 언론사가 최 실장님을 견제한 것이잖아요. 기획사 밥그릇에 정말 끼어들면 문제가 심각해질 겁니다. 그리고 퍼주는 것을 싫어하는 실장님이라면 지금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아마 무명 연습생을 키워서 음원을 MP3에 탑재하는 방식으로 그만큼 이익을 볼 생각인 거죠.”
결국 히트가 될 만한 곡을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에게 줘서 재미만 보고 난 후에 그 후속 문제는 다른 기획사에게 넘기는 식이다.
굳이 KM 전자가 음원 장사로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기획사와 갈등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에 얻는 것이라면 이 특이한 마케팅으로 MP3 이슈를 극대화해서 홍보하는 것이다.
배종대 과장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만 한다면 이번 기획사 소동 같은 사태는 피해갈 수가 있겠어.”
“특히 미국 메이저 음반 업계랑 부딪칠 일도 없게 되니까요. MP3 시장을 통한 매출을 고려하면 손해는 아닐 겁니다. MP3 초기 시장을 우리가 주도한다면 천문학적인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
다들 해외 음반 시장이란 말에 침묵했다. 뒤늦게 최민혁이 부른 노래를 떠올렸다. 정성근 대리의 주장이 뜻밖에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존재했다.
배종대 과장은 피아노에 앉은 채로 건반을 치면서 툴툴거렸다.
“그런데 과연 그게 효과가 있을까? MP3 탑재 곡이 대박을 치지 않는 이상에는 그런 마케팅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자기 말에 곰곰이 생각하는 팀원 모습에 정성근 대리도 기타로 칠갑산을 연주했다. 그도 생소한 방식의 홍보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조 팀장님이 이미 말씀했지만 스팅의 저작권까지 사들여서 샘플링까지 한다고 했잖아요. 그 정도 곡이라면 충분히 매력적인 마케팅 수단일 것 같아요. 그러면 다른 곡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배종대 과장은 이 악기 저 악기를 만지면서 툴툴거렸다.
“설마 최 실장님이 이미 다른 곡도 선정을 끝내놓았다는 거야?”
“최 실장님이 지금까지 일한 방식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것 아닐까요?”
“흠.”
하지만 배종대 과장도 그렇지만 기획 팀도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한 곡은 그렇다고 쳐도 다른 곡까지 그럴까 하는 의문이다.
국내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미국이나 유럽이라면 아예 불가능했다.
다만 조성돈 팀장은 정성근 대리의 주장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 지시를 받아서 발 빠르게 움직인다고 왜 이렇게 진행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다.
그런데 정성근 대리 주장처럼 된다면 최민혁이 지금 염두에 둔 마케팅이 이상할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정 대리 주장대로일까?’
기획 팀 분위기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몇 차례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한 덕분에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아니야. 이전에도 그랬지. 정말 이번 일도 최 실장님의 의도가 먹힐까? 진짜 한두 곡만 성공해도 대박이기는 한데…….’
* * *
최민혁도 기획사 소동 때문에 혼쭐이 난 후에 일단 기획 팀 분위기부터 살폈다.
음악 연습실을 갔다 온 기획 팀은 무조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을 시작할 수는 있어.’
솔직히 기획 팀의 곡 선정은 믿지 않았다. 자신도 인생 2회차라서 이 황당한 계획대로 진행하는 것이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의 보고를 받은 후에 한 가지 점만 지적했다.
“곡 선정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한번 골라보세요. 가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기획사가 아니므로 굳이 음원과 관련해서 이익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일회성 이벤트라는 점을 고려하세요. 이번 한 번만 성공하면 됩니다. MP3 시장이 만들어지고 나면 우리가 굳이 더 나서지 않아도 MP3 산업은 굴러갈 겁니다.”
“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곡 선정은 제가 주도할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기획 팀이 전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획 팀 나름 뭔가 노력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부분은 팀원에게 주지시키겠습니다.”
“좋네요. 사장님에게는 제가 따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 * *
오영근 사장은 그 어느 때보다 활력적인 생활을 보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꼴로 최용욱 회장을 찾아가서 KM 전자 내부 사정을 보고했다.
그 과정에서 최민혁 실장이 최용욱 회장을 얼마나 압박하는지도 들었다.
‘황당하네.’
특히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오큘러스 프로젝트 관련 내용이다.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에 투자한 것까지는 보고받았지만 그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생긴 변화는 보고 이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최용욱 회장과 이야기할 때도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본인이 사장인데도 밑에 기획 실장 선에서 보고한 의미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만 빼면 생활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오성 전자, 대운 전자, DL 정보통신에 있던 선후배에게서도 자주 연락을 받았고, 가끔 모임에도 나갔다.
인생의 절정기를 다시 보내는 기분.
오영근 사장은 그 덕분에 최민혁 실장이 최용욱 회장에게조차 얼마나 무자비하고, 장승일 실장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까지 보고받았다.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에게 직접 나서서 제안까지 받았다.
실소가 절로 나왔다.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 실장의 역량이 겉보기와 다르다는 것을 알자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어도 최민혁 실장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 차에 나온 기획사 소동은 의아했지만 일단 지켜만 봤다.
역시 최민혁 실장은 직접 언론사 기자를 불러 모아서 군기 반장 노릇을 했고, 언론사를 압박해서 깔끔하게 처리했다.
따라서 최민혁 실장의 기획사 진출 소동에 대한 의문 한 가지만 확인했다.
“굳이 음악 연습실을 위해서 빌딩까지 사들일 필요가 있었나?”
“개인적으로 투자를 좀 했는데, 여윳돈이 생겨서 힘을 쓴 것뿐입니다.”
‘그 여윳돈이 수백억짜리 빌딩을 살 정도냐.’라고 묻지는 않았다. 이미 증여받은 주식 가치만 해도 조 단위를 넘어갔기 때문이다.
의문은 제법 더 있었다.
하지만 오영근 사장은 최용욱 회장 통해서 들은 최민혁 실장의 진정한 실력을 알자 말을 조심했다.
최민혁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두 사람에게는 MP3 음원 탑재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하지 않았다. 기획 팀도 지금 오락가락하는데, 두 사람을 당장 설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 결과가 나오면 그때 가서 보여주는 것이 좋겠어.’
최민혁은 기획사 문제를 대충 정리한 후에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이제 MP3 제품 양산을 준비해야 합니다.”
오영근 사장 역시 도대체 언제 MP3 양산을 하나 궁금했던 차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그 일도 중요하지.”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최민혁 실장 입만 쳐다보았다.
MP3 프로젝트는 두 사람 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어서 뭐라고 주장하기에는 그랬다.
다만 도대체 최민혁이 왜 MP3 개발을 붙잡고 질질 끄는지 그게 궁금했다.
“MP3 양산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는 건가?”
최민혁은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곤 피식 웃었다.
“MP3 완성도 때문입니다. 일, 이만 대 파는 것이 아니라 수십만 대 이상을 팔아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품질 문제에 신경을 더 써야 했습니다.”
오영근 사장은 자기 앞에 놓인 녹차를 마시면서 최민혁 눈치를 봤다. 최용욱 회장 통해서 들은 최민혁의 능력 때문에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회장님도 최 실장에게 질려 있는데, 나라고 뾰쪽한 수가 없잖아.’
“품질이 중요하지. 하지만 콜린스 때와는 또 다른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하하하, 그렇습니까. 뭐 의도가 전혀 없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최민혁은 번거로운 질문이 없어서 마음이 편했다.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뒤늦게 호출을 받아서 이 자리에 참석한 최병연 팀장에게 시선을 줬다.
최병연 팀장이 나서서 MP3 개발 현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다른 것은 다 넘어갔는데, 양산성 테스트 단계를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최 실장님이 대량 양산 때문에 사소한 문제라도 철저하게 검토하라고 해서 현재 이 부분을 파는 중입니다.”
양산성 테스트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그만큼 생산량 목표가 많아서 최민혁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단적인 예로 10만 대를 찍었는데, 문제가 생겨서 리콜 사태가 생기면 손실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양산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최민혁 실장이 꼭 그 문제 때문에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은 굳이 의견을 피력하기보다 이미 최민혁 실장이 뭔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묵묵히 최민혁 실장 입만 쳐다보았다.
최민혁도 이제 굳이 두 사람에게 숨길 이유는 없었다.
“MP3 초도 양산 이후에 생산되는 물량은 기존 제품처럼 십만 대 수준이 아닙니다. 최하가 백만 대를 넘어갈 겁니다.”
“……!”
깜짝 놀란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
최민혁은 두 사람이 경악하자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그렇게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아마 그 정도 물량도 부족할 겁니다. 차후 따로 보고를 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오영근 사장은 국내 수요를 떠올렸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 실장 마음은 잘 알아. 하지만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LP와 같은 멀티미디어 기기도 잘 나가야 고작 몇만 대 수준에 불과해. 1~2년 정도 지나서 MP3의 필요성을 알면 달라지겠지만 그건 시간이 지난 후지 않은가.”
최민혁도 순순히 인정했다.
“국내만 팔면 그렇죠. 하지만 MP3 세계 시장을 노린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번에도 오영근 사장은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콜린스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하면 유럽 시장이나 미국 시장을 뚫기가 만만치 않을 거네.”
최민혁도 MP3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려다가 망한 기업을 떠올렸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몰락했는지 잘 알기에 오영근 사장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중소기업에서 특허권을 무시한 채 베껴서 팔 수도 있었다. 소송으로 싸워야 하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아예 MP3 시장이 확고하다면 좀 다를 수가 있지만, 초창기 고만고만한 시장이라면 문제가 된다. 이때는 시장 수요가 작아서 소송해도 큰 의미가 없다.
‘역시 관록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부정적인 이야기를 꽤 늘어놓았는데, 그 주장은 MP3 인생 1회차 미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MP3 가지고 재미를 단단히 봤던 1세대 MP3 회사는 실제로 그렇게 하나둘씩 무너졌기 때문이다.
최민혁 역시 그런 점을 우려했다. 그냥 MP3 만들어서 판매하는 소극적인 전략을 취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슈를 통해서 MP3 시장 흐름을 한 방에 바꿀 계획을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