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최민혁 자신이 원한 바였지만 묵묵히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상대가 먼저 제안을 했다는 점에서 내심 쾌재를 불렀다.
“어떤 의미에서 말이죠?”
“중요한 MP3 특허는 이미 다 모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KM 전자는 조용하더군요. 오히려 위성방송 사업과 같은 엉뚱한 일만 하고 있습니다. 이게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실장님이 비밀리에 뭔가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걸 감추기 위해서 오큘러스 프로젝트 사태를 벌였다고 봅니다.”
“계속해 보세요.”
“그게 뭔지 모릅니다. 다만 한국 내수 시장을 노린 것이라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세계 시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지금 KM 전자의 능력으로는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가 필요할 겁니다. 그 일을 제가 돕겠습니다.”
최민혁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 역시 KM 전자가 아직은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점을 잘 알았다. 그런데 서둘러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자신도 인생 1회차의 MP3 개척자가 MP3 시장이 만들어지는 시간 때문에 경험한 실패를 자신이 피한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즉 5년 안에 오백만 대를 판매하는 것과 1년 안에 오백만 대를 판매하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달랐다. 거기다 후자는 가속도가 붙어서 이듬해에 천만 대를 파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MP3 사업의 성장세를 통한 브랜드 인지도를 바탕으로 차세대 모델은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메이저 음반사도 문제야. 스티븐은 그 일을 잘 풀어갔지만 내 경우는 달라. 결국, 스티븐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게 차라리 인생 1회차를 최대한 이용할 방법이니까.’
문제는 최민혁에게 이런 쪽으로 인맥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이 IT 분야에 오랜 경험이 있고,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도 능력이 있는 이들로 말이다.
“…공짜는 아니겠군요.”
“KM 전자의 주식을 원합니다.”
최민혁은 곰곰이 고민했다. 어차피 우호 세력에게 주식 일부를 넘기고, 그만한 것을 챙긴다면 나쁜 거래는 아니라고 봤다.
특히 미국이나 유럽 시장의 안정적인 공략을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법이 되었던, 권력이 되었던, 언론이 되었던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공짜로 최민혁을 도와줄 이유는 없다.
그건 최민혁도 원한 바가 아니다. 그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바에는 차라리 보험을 들어주는 것이 났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바로 그들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다.
“몇 %를 원하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5%면 됩니다.”
‘앞으로 더 요구한다는 이야기는 그만한 카드를 더 보여주겠다는 뜻이겠지. 그게 판매 물량이 될지도 모르고, 수백만 대 추가 물량이라면 손해는 아냐. 하지만 공짜로 주식을 내놓을 수는 없지.’
“주당 가격은?”
“20만 원이면 됩니까?”
“20만 원이라…….”
최민혁은 놀라지 않았다. MP3 특허를 아는 이들에게라면 KM 전자 주식의 가치가 20만 원이라고 해도 낮은 금액은 아니었다.
아니, 현재 거래되는 KM 전자의 주가가 10만 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높은 금액이었다.
물론 높은 가격을 제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 주당 10만 원 가격으로 지분 5%를 사들일 방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루 거래되는 KM 전자 주식 물량이 많지 않았다.
주식을 매입할 방법이 없는 투자자라면 다른 대안을 쓸 수밖에 없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아주 이상적인 브로커였다.
최민혁도 지금처럼 막대한 KM 전자 주식을 다 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언론사가 이걸 물고 늘어질 것이 뻔했다.
실상 한국 10대 대기업 중에 KM 전자 같은 경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런 방법까지 쓴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애가 탔다는 이야기겠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그제야 밝게 웃었다. 그 역시 얻는 것이 있어야 했으니까. 물론 자기 자산으로는 저 주식을 일부만 매입할 수 있다.
대다수는 투자자가 나설 것이다.
그는 최근 자기 전화기에 불이 나도록 전화한 투자자를 떠올렸다.
그들의 집요한 욕망도 같이.
심지어 공갈 협박까지 한 이들도 있었다.
‘다들 만족하겠지.’
* * *
최민혁도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김현탁 본부장 일 때문에 아군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조성돈 팀장이 파악한 이번 사태도 최민혁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밝혀진 증권사 직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분명히 꼬리 자르기 하겠지.’
그럴 거면 하지 않는 것이 났다.
박두영 부장 검사의 제안은 매력적이지만 지금 시기에 쓰기에는 아까웠다.
차라리 김현탁 본부장이 한 짓을 명분으로 DL 그룹에서 더 뜯어내는 것이 훨씬 나았다. 상대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셈이니, 자신도 DL 정보통신이 아니라 DL 그룹을 포격할 구실을 얻었다.
“재미있네요. 정말 저에게 불만이 어지간한 것 같은데, 자료를 잘 준비해 주세요.”
“네?”
“나중에 지분 협상을 할 때 명분으로 쓸 생각입니다.”
“그게 될까요?”
“될 겁니다. DL 정보통신도 다른 대기업처럼 방송 사업에 관심이 많아요. 단순히 기업 수익성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안 되면, 되게 만들면 그만입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이 한 말이 결국 협박까지 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최훈열 전무의 경우만 봐도 무슨 결과가 나올지 뻔했다.
당장 이일태 이사 사건 때문에 지금 KM 전자 내에서는 굳이 최민혁이 뭔가 하지 않아도 최민혁 자체가 공포의 존재나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철저하게 증인과 진술을 확보해야 합니다. 어설픈 자료는 곤란해요.”
“그 말씀은…….”
“일단 DL 정보통신과 계약 끝나기 전까지는 최대한 이용해야죠. 계약 협상할 때 일방적으로 상황을 몰아갈 수 있는 것도 강점입니다. 그리고 계약이 끝난 후에는 제대로 보복해야죠.”
‘IMF 전에 덫을 만들어두는 것도 괜찮지.’
조성돈 팀장도 이제는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충분히 이해했다. 솔직히 이번 일은 확실한 보복이 나쁘지 않다고 봤다.
“…문제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아, 언론사 분위기는 어때요?”
“조용합니다. 제가 한 전화에도 일방적으로 자신이 잘못했다 시인했습니다. 실무진 선에서 오해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소리도 했습니다.”
심드렁한 최민혁은 툴툴거렸다.
“이번에는 아마 경고였을 겁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빌미 삼아서 언론사 영역을 끼어든 것 말입니까?”
“네.”
최민혁도 순순히 그 점을 시인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이번 일을 통해서 언론사 대응에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도 모르니, 자세히 살펴보세요.”
* * *
“후유.”
최경진 편집장은 식은땀을 닦으면서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수 부사장하고 같이 사장실에 불려가서 단단히 욕을 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시를 내린 사람이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몽땅 자기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이었다.
‘개새끼들. 이럴 거면 시작을 하지나 말든지, 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냐. 왜 쥐뿔도 없는 나보고 지랄이야!’
직장 생활이 다 그렇다고 말하지만, 막상 당하니 기분이 더러웠다.
막 사무실에 들어온 범용구 기자도 최경진 편집장의 표정을 보자 입을 꾹 다물었다. 최민혁 실장 협박에 급하게 처리한 듯 보이지만 실상 보험으로 다 준비했던 일이었다.
“정말 음악 연습실은 단순한 노래방이었어?”
“네. 딱히 뭔가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사내 복지를 위해서 수백억짜리 건물을 사들였다는 소리야?”
“…네.”
“제기랄, 돈이 썩어나나 보네.”
“최민혁 실장이 가진 지분보다 못하지만 벨린 투자도 가진 지분이 많습니다. 최두진 사장 지분을 포함해서 당시 유통되는 주식을 쓸어 담다 했습니다.”
“그때 평균 매입가가 1,700원이 안 된다고 그랬지?”
“네.”
“와아.”
사실 오너인 최민혁은 자신이 가진 주식을 팔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차명 지분인 벨린 투자가 가진 주식은 다르다.
그건 다 시장에 매각해도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은 외국 투자자들조차 벨린 투자의 문을 지겹게 두들겼다.
제발 팔아 달라고.
“이유는 아직도 몰라?”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이 아닐까요?”
“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위성방송 사업 매출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그거 많아 봐야 2조가 안 되는 시장이야. 그것도 지분에 따라서 나누면 얼마나 된다고 그래? 지분 매각해 봐야 고작 1~2천억에 불과한데,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외국 투자자가 그렇게 주식을 매집하겠어?”
‘고작 1-2천억’이란 말에 범용구 기자도 반박하려다가 살기가 가득한 최경진 편집장의 표정을 보자 즉시 꼬리를 말았다.
“그런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에 윗선에서 걱정했을 거야. 최 실장이라면 그 이상도 하고 남을 사람이니까. 언론사를 소유한 다른 대기업처럼 신문사에 욕심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이번 일은 너무 나간 것 같습니다. 지금 중앙지검에서도 이번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던데, 만약 잘못되면…….”
“아니, 그렇게 하지는 않을 거야. 생각을 해봐. 설사 이번 사건을 수사한다고 해도 드러나는 것은 증권사 직원을 비롯한 몇 사람인데, 그들로 김현탁 본부장까지 엮을 수 있겠어?”
“하지만 최 실장이라면 뭔가 다른 수를 부리지 않을까요?”
사실 이 부분은 최경진 편집장이나 사주도 걱정하는 부분이다. 홍길동도 울고 갈 정도로 붕붕 날아다니는 최민혁 실장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할 것이다.
“그래서 정정도 하고, 사과도 했잖아. 우리 한영 일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항복한 적이 있어? 설마 그렇게까지 했는데, 최 실장이 보복하겠어?!”
“물론 지금 당장은 손을 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광수 기자가 취재한 이일태 이사의 경우를 보면, 뒤에서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릅니다.”
최경진 편집장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역시 KM 전자 취재 소스를 봤기 때문에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잔혹한 인간인지 잘 알았다.
반대파인 이일태 이사를 쫓아내기 위해서 최민혁이 한 짓이 따지고 보면 오큘러스 사태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진짜 그러지는 않겠지?’
“…당분간 KM 전자를 적당히 띄우는 기사를 내보내면 최 실장도 그러지는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범용구 기자도 그제야 안도했다. 그 역시 지난주부터 준비 중인 KM 전자 찬양하기 기사를 떠올린 것이었다.
‘다행이다.’
* * *
한영 일보도 그랬지만 이번 일에 참여한 다른 언론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번 오큘러스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는 다들 최민혁 눈치를 봐야 했다.
최민혁은 KM 전자의 주식 매각 문제는 우영민 차장에게 넘겼다.
우영민 차장은 대규모 주식 거래에 오히려 찬성했다.
벨린 투자에서 들고 있는 KM 전자 주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가격과 조건이다.
투자자를 만나서 그들이 줄 수 있는 조건과 KM 전자가 얻을 것을 확인해야 했다.
우영민 차장은 특히 MP3의 시장 가치와 미래를 고려해야 했기에 검토할 것이 많았다.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물론 그것은 냅스트의 인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보다 냅스트는 더 빠른 속도로 미국 전역에 퍼져갔다.
공짜로 MP3 음원을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 것이다.
대형 언론사는 최민혁 인생 1회차 때처럼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최민혁은 MP3 음원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것 자체가 영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MP3의 파괴력을 얕보는 것이겠지. 물론 자기 밥그릇에 타격이 온다면 그때서는 움직임을 보일 테고 말이야.’
최민혁 역시 MP3 기획안 때문에 언론사를 두들겨 팰 수는 없었다. 앞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많았다.
“기획 팀 분위기는 어때요? MP3 탑재 음원 기획안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제 막 검토를 하려고 합니다만 잘될지는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