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최민혁도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하고는 피식 웃었다. 사실 아무리 언론사가 잘못했다고 해도 언론사를 상대로 공갈 협박 하는 것은 좋지가 않았다.
후환이 된다.
바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상황은 굳이 그렇게 갈 정도로 심각한 일도 아니었다.
서로 간만 봤다.
최민혁은 다른 일과는 달리 이번 일은 초장에 길을 들이기 위해서 이전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꾸준히 쌓은 영향력이 이번에는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자기 앞에서 벌벌 떠는 기자들 모습을 보고서야 자신의 입지를 확인했다.
‘나쁘지는 않아. 이런 이유 때문에 권력을 탐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애초에 권력 따위엔 관심도 없는 최민혁은 한 걸음 물러났다.
“…좋습니다. 뭐 제가 언론사를 상대로 협박하는 것도 보기가 좋지는 않겠지요.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낼 일은 아니니까.”
‘후유’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자들은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식은땀을 닦고 겨우 숨을 돌리면서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다들 이 시나리오를 기대했기에 하나의 팀처럼 움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긴장을 다 풀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이제까지 한 대 맞으면, 열 대로 때려서 철저하게 보복하는 사람이니까. 아니, 맞지 않아도 마음에 안 들면 교묘하게 사람을 괴롭혔다.
최민혁은 차가운 눈으로 기자들을 쳐다보았다. 내심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자기 꼴리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이 짓을 일삼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는 놈들이야.’
하지만 굳이 이들과 적대할 이유는 없었다. 믿을 수가 없다면 그것을 거꾸로 이용하면 되니까. 그것도 이자까지 붙여서 최대한 뽑아 먹으면 그뿐이다.
그는 집게손가락으로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당장 언론사로 돌아가서 김현탁 본부장이 이번 일을 작업했다는 것을 제대로 밝히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들을 절대로 그냥 안 둘 겁니다. 돈이 되었든, 권력이 되었든 이번 일에 연루된 언론사와 기자들을 확실히 매장해 버릴 겁니다.”
“…네.”
딱히 감정이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분개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듣는 기자는 전율마저 느낀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일반인과는 달리 KM 전자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느 정도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훈열 전무와 관련된 일은 최근에서야 파악했다.
최훈열 전무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내려서 결국 감옥에 보낸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니까.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잔혹한 인물인지 그들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최민혁은 가진 것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지금은 드러난 KM 전자 주식 가치만 1조를 넘겼다.
천문학적인 자금과 영향력이라면 언론사 하나 정도는 가루로 만들고도 남을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었다.
최민혁의 압박에 질린 기자들은 차마 최민혁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들 역시 바보가 아닌데, 최민혁 실장이 최근 벌이고 있는 일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다들 증거가 없어서 쉬쉬하면서도 뭔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이 일이 생길지 윗선에서도 알았다는 점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희생양은 바로 자신들이었다.
‘젠장, 괜히 일을 벌여서 일을 이 따위로 만드냐?’
* * *
최민혁의 협박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번 일에 연루된 언론사는 잽싸게 이번 기획사 소동에 대해서 정정 보도를 냈다.
[최민혁 실장은 왜 갑자기 연예 기획사를 인수한 것일까?]
[인수한 기획사를 정리한 후에 남아 있는 시설과 장비만을 이용해서 뭘 하려는 것일까?]
직접 전 신영 기획사 건물의 내부 사진까지 꼼꼼히 찍었다. 기획사 진출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사내 복지를 위한 KM 전자의 도전은 이렇게 시작되는가?]
[KM 전자가 기획사를 설립한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해프닝이었나.]
음악 연습실은 그 사이에 KM 전자의 사내 복지 시설로 둔갑했다.
그냥 잠깐 훅 끊어 오른 기사가 불과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서 촌극으로 끝난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 일을 작업한 증권사 브로커 이야기가 기사로 나왔다.
기사가 나오기가 무섭게 최민혁이 한 시민 단체를 이용해서 증권사의 브로커 한 사람이 KM 전자를 모략하기 위해서 이번 일을 꾸몄다고 검찰에 고소했다.
이번 일에 연루된 언론사는 어쩔 수 없이 이 사태를 자세하게 기사화했다.
그제야 난리가 났다.
찌라시 이야기가 무성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드러난 경우는 없었다.
대중은 이 사태에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이번 일의 배후에 김현탁 본부장이 연루되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재벌 연루 사건 전문가인 서울 중앙지검의 박두영 부장검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최민혁도 딱히 원한 이야깃거리가 아니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사건이 흘러갈지는 몰랐다.
그는 결국 박두영 부장검사의 연락을 받고 난 후에 그의 집 근처의 산책로에서 만났다. 운동하는 사람 틈에 끼어서 말이다.
땀을 제법 흘린 박두영 부장검사는 걸음을 나란히 한 채 툴툴거렸다.
“최 실장님은 요즘도 여전히 핫하시더군요.”
“딱히 제가 원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박두영 부장검사도 잠깐 머뭇거리다가 슬그머니 질문했다.
“으음, 이건 개인적인 질문입니다만 그 오큘러스 프로젝트도 최 실장님의 솜씨입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온 동네방네 다 소문이 났나 봅니다. 검찰 쪽에서도 그 일에 관심이 많네요.”
“일이 생각보다 커졌습니다. 이제는 정보 통신부 장관이 청와대에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인상을 와락 구긴 최민혁 실장은 혀를 찼다.
“장관 선에서 지켜봅니까?”
“네. 저도 덕분에 이번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가 평범하게 말해서 그렇지 이번 오큘러스 건은 정부 내에서도 바라보는 관심사가 간단하지 않았다.
정보 통신부는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별개로 이번 사태를 다시 원점에서 재조사했다. 다른 정부 국책 과제와는 결과가 전혀 달랐다.
정부 정책 과제가 뜨거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렇게 민간으로 넘어가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무궁화 위성 발사 이벤트를 이용해 쇼를 벌이면서 지지율도 대폭 끌어올렸다. 덕분에 보궐 선거에서도 좋은 결과를 냈다.
재미를 단단히 본 것이다.
그러니 한 다리 걸쳐 있는 이들은 다들 이 소식을 들었다.
정보 통신부를 통해서 정부 쪽으로 소문이 났고, 국회를 통해서 정치권에도 퍼졌으며, 민간 기업과 언론사를 통해서 사방으로 정보가 샜다.
이 과정에서 특혜 시비를 둘러싸고 고소 고발이 끊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도 그 대상 중 하나다. 다만 워낙에 협의가 없어서 관련 고소 건이 기각된 것뿐이다.
지금까지는 증거가 없어서 검찰 쪽에서도 이 부분을 예민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박두영 부장검사도 평소와는 좀 달랐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최소한 실장님 편이라는 걸 고려해 주십시오.”
“그렇다고 해두죠.”
모호하면서도 아리송한 대답.
역시 신중한 최민혁 대답에 박두영 부장검사도 감탄하고 말았다.
“…역시 실장님 솜씨군요. 차라리 검사를 하셨다면 정말 잘하셨을 것 같습니다.”
“검사는 제 취향과는 맞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히려 인적이 많은 곳으로 향했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딱히 두 사람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는 없었다.
최민혁 역시 박두영 부장검사를 오랜만에 만난 덕분에 지난 일을 새삼 떠올렸다. 인생 1회차에서 처음 만난 사람 중의 하나가 그라서 그것도 나름 추억이라면 추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연락한 겁니까?”
“제가 연락하고 싶어서 연락했겠습니다. 김현탁 본부장 때문입니다. 실장님은 김현탁 본부장을 어쩔 생각입니까?”
“아니, 그걸 저에게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잘 알면서 그런 말씀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김종도 차장검사님도 이번 사건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정보 통신부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최민혁 실장님에 관심을 둔 셈입니다.”
“김종도 차장검사라면 중앙지검 내에서도 청렴한 분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뭐, 다 옛날이야기죠. 그분도 최훈열 전무 사건 이후로 많이 변했습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최 실장님 솜씨죠. 검찰 내에서도 최민혁 실장님은 이미 유명 인사입니다.”
“그래요?”
“네!”
최민혁도 박두영 부장검사의 제안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딱히 검사란 칼자루를 휘두를 생각이 없었지만, 이것도 나름 유용해 보였다.
“…설마 저에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까?”
그제야 최민혁도 박두영 부장검사 라인이 자신에게 꽤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내가 이제까지 벌인 일이 많지.’
“…좋네요. 한번 자리를 마련해 보세요. 김현탁 본부장 일은 좀 더 생각해서 연락하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속도를 올려서 뛰어가는 박두영 부장검사 뒷모습은 확실히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도 그가 최민혁 실장과 거리를 두는 면을 보면 딱히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태도가 달라진 것은 최민혁 자신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제이미 이사를 이용해서 정보 통신부를 압박한 것도 안 것일까. 그건 아닐 거야. 중앙지검 정도라면 어느 정도 돌아가는 추이를 파악했을지도. 하지만 박 부장 검사 같은 이가 관심을 둘지는 몰랐어.’
박두영 부장검사의 갑작스러운 관심사는 단순히 그 자신만의 일은 아니다. 윗선에서도 최민혁 이야기가 계속 나왔기 때문이다.
비록 누명을 뒤집어썼다고는 해도 지난 마약 사건 때문에 수사받은 일도 있었다.
검찰에서도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본다는 의미다.
최민혁으로서는 달갑지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국내 시장이 아니라 해외 시장이었다.
만약 해외 시장에서 이번과 같은 사건을 당했다면 대안이 없었다.
위기감이 생겼다.
최민혁은 새삼 이번 일을 통해서 왜 굳이 실리콘 밸리 IT 기업이 다양한 이들에게 투자를 받는지 확실히 절감했다.
‘쯧, IT 기업이 그래서 아무에게나 투자를 받는 것이 아니었어. 자기 기업에 도움일 될 만한 자들에게서 투자를 받는 거겠지.’
그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문득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떠올렸다.
지금 최민혁이 아는 인맥 중에 해외 쪽 연결 고리가 될 사람이었다.
더욱이 이상할 정도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게 그냥 단순히 보이는 것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한번 만나 봐야겠어.’
* * *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최근 최민혁 일을 도와주면서 생각보다는 많은 것을 느꼈다.
그는 그로 인해 체력이 제법 떨어지자 건강관리의 필요성도 느꼈다.
오늘도 자신이 묶고 있는 포시즌 호텔을 나와서 근처 공원 쪽으로 뛰었다. 한국에 온 이후에 꾸준히 체력을 관리한 덕분에 다행히 몸이 좋아진 것을 느꼈다.
다만 휴대폰 진동음이 울리자 받을까 말까 하다가 결국 받고 말았다. 상대는 지금 미국에 가 있는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 이사였다.
[지금 영국 지사도 그렇고, 생각보다 산적한 일이 많다는 것은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언제까지 한국에 있을 겁니까?]
[패트릭 그 친구가 있는데, 뭘 걱정하는 겁니까?]
[패트릭 이사를 옆에서 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당신이 가줬으면 좋겠어요.]
[패트릭 그 친구가 자기 밥그릇에 숟가락을 올리면 그냥 둘 것 같습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 부리지 마세요.]
[설마 MP3 특허권 일로 아직 그러는 겁니까?]
[아니라고 말을 못 하겠네요.]
실상 MP3 특허는 제이미 니콜라스가 이사가 미는 시즈벨의 로드맵 중에 하나다. 그런데 그 특허가 최민혁에게 넘어간 이후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붕 떠버린 것이었다.
이제 와서 새로운 영역을 맡는 것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자존심상 그럴 수가 없었다.
[정 그러면 무선랜 관련한 특허에 대해서……]
[아, 됐습니다. 그런 제안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고작 그런 일로 전화를 건 겁니까. 거기 미국은 한창 늦은 새벽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