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
“하지만 흐름이 좋아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 첫째 큰아버지를 계속 흔들 필요가 있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아뇨.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주는 것이 장승일 실장에게도 좋습니다. 그래야 KM 그룹에서 진행하는 일도 무난하게 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 팀장님 마음은 저도 잘 압니다. 잘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찍힌 덕분에 이번에는 조용했죠. 그게 아니었다면 다른 술수를 부렸을 겁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인생 1회차의 기억을 떠올린 최민혁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첫째 큰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겁니다. 지금은 우리 최문경 부회장님이 잽에 난타당해서 구석으로 몰린 것에 불과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확실히 몰아붙여서 KO를 따내는 것이 좋습니다.”
“…정 대리 통해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에게 오큘러스 프로젝트 관련 지분 평가 작업도 일정을 당기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바로 그거죠.”
“…….”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면서 스트레이트 포즈를 취하는 최민혁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조성돈 팀장은 굳이 더 대답하지 않았다.
* * *
송한성 교수와 이동호 교수의 법정 대리인인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정성근 대리에게 추가 지시를 받기가 무섭게 정보통신 정책실의 이원한 실장을 직접 만났다.
“위성 시스템이 뭔지 아십니까?”
“…당연히 압니다.”
“그렇다면 지금 송한성 교수가 개발한 오큘러스 시스템이 어느 정도 효율이 있는지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 기술이 디지털 위성 방송 표준에 해당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는 것도 아십니까?”
“그거야…….”
이원한 실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다. 그 역시 박성환 팀장에게 오큘러스 프로젝트 성과가 대단하다는 것만 알았다. 실제로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송한성 교수에게 받은 자료를 토대로 어떤 원천 기술이 적용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동기 알고리즘에 적용된 기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기술을 압도합니다. 프레임 길이와 관련된 변조 특허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이런 기술은 대부분이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검증이 된 것이다.
이론적으로도, 실험적으로도 나무랄 것이 없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MP3 디지털 시스템에 관한 것도 언급되어 있었다.
오큘러스 시스템은 단순히 위성 시스템뿐만이 아니라 교환기, 수신기를 포함한 광범위한 영역을 구체적으로 정해놓았다.
ETRI 연구원의 연구는 이 덕분에 더 빛을 발했다.
단순히 실험적인 연구 결과만 내는 게 아니라 실제 시스템에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최민혁이 만든 특허 외에도 송한성 교수나 이동호 교수가 추가한 특허의 숫자 역시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이건 말입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입니다. 당신네 정보통신부는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계산한 평가 가치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한 밀당도 적당히 이어졌다.
그는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가지는 권리를 이용해서 이원한 실장을 노골적으로 압박한 것이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충분히 논의를 거쳐서…….”
“자꾸 시간을 끌면 저도 원칙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쪽에서 그만큼 정책 과제로 투자한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그쪽 지분도 충분히 인정해 준 겁니다. 우리 연구원이 고생한 것을 적당히 떼서 말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것 아닙니까?”
집요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말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질린 이원한 실장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후유, 잘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이원한 실장은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달리 권력을 이용해서 연구 팀의 두 사람이 가진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다루지 못했다. 늘 하는 것처럼 권력으로 찍어 누르려고 했는데, 그것이 실패한 것이었다.
자칫하다가는 미국 연방 법원에서 싸우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오큘러스 법인 지분 27%를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에게 넘겼다. 물론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지분의 대부분은 최민혁 실장의 소유다.
기존에 투자한 수천억, 심지어 합류하는 수백억 투자 금액을 다 합치면, 자본금만 해도 어지간한 중견 기업을 능가해 위성방송 법인 지분의 27%를 넘긴 것이었다.
27%의 지분 가치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했다.
* * *
김상구 회장은 뒤늦게야 송한성 교수에게 손을 쓰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언론사와 메이저 방송국과는 달리 DL 그룹은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돈뿐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최용욱 회장에게서 자신이 줄 수 있는 협상 카드에 대한 연락을 받았다. 투자금 1,500억을 최저 금리로 주겠다고 협상했다.
김현탁 본부장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아버지 DL 화재 김희찬 부사장에게서 들었다.
“역시 최 회장이 만만한 사람은 아니야. 설마 최민혁 실장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투자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물론 이 이야기는 김희찬 부사장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최용욱 회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이 권리를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에 대해 욕심을 드러냈다.
“이번 일은 잘 처리해야 한다. 비록 KM 그룹 계열사를 담보로 투자했지만, 이자가 너무 많아서 수익성이 좋지 않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네놈은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아. 굳이 내가 DL 정보통신 본사까지 찾아온 것도 경고를 해주기 위함이야. 지금까지는 기업 설립 후에 제대로 된 노하우도 없고, 기반이 없어서 회사 적자를 넘어갔어.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가 없다.”
냉랭한 표정의 김희찬 부사장은 이번 일이 썩 마음에 든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최훈열 전무 사태 이후로 김용만을 찍어 눌렀지만 아직은 안도할 수 없었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책임이 자신에게 전가될 수도 있었다.
평소에는 근엄한 목소리로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던 사람이 김희찬 부사장이다. 언론에 보이는 그의 모습은 성공한 재벌 2세 그 자체다.
아들 김현탁 본부장의 유럽 금융가 행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항공 마약 사건 이후에 김현탁 본부장이 박살 나면서 개망신을 당했다.
지금은 시간이 제법 흘러서 쉬쉬하지만, 김희찬 부사장은 그 일을 잊지 않았다.
“다시 한번 언론에 불미스러운 일로 오르내리면, 그냥 안 둘 테다!”
“아, 알겠습니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지난 흑역사에 김현탁 본부장은 내심 이를 갈았다.
‘최 실장, 이 개 같은 쓰레기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 * *
항공 마약 사건을 다시 떠올린 김현탁 본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버지 김희찬 부사장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다.
‘진짜 조심해야 해.’
김현탁 본부장은 자신의 오른팔인 박태정 부장을 호출했다.
“KM 그룹 분위기는 어때?”
“그쪽도 어수선합니다. 송한성 교수의 법정 대리인인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마치 자신이 사장인 양 난리를 쳐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도대체 그 작자는 어떻게 알고 이 사태에 끼어든 거야?”
“그 부분은 아직 송한성 교수를 만날 수가 없어서 확인 중입니다.”
“…설마 배후가 최 실장은 아니겠죠?”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이가 없네.”
김현탁 본부장도 KM 그룹 내부가 얼마나 혼란한지 잘 알았다. 그 모든 일이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튀면서 일어난 일이다.
문제는 이 작자가 지적 재산권 소송 전문가라서 만만한 상태가 아니란 점이다.
‘정말 최 실장이 배후일까? 아니, 제이미 이사 같은 인간을 어떻게 포섭한 것일까?’
그로서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시즈벨에 왜 구차하게 한국 법인까지 만들어서 국내 일에 끼어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은 어때?”
“최용욱 회장도 저희 쪽의 투자 제안을 쉽게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위성 사업부 인원은 이제 20명이 채 안 됩니다. 이것만 봐서는 회장님의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울 겁니다.”
“TRS 사업도 접는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면 뽑은 인력은 어떻게 되는 거야?”
“제가 알아본 바로는 TRS 사업부에 배정될 예정이었던 사원을 KM 그룹 계열사 전체로 배정을 다시 재조정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차피 TRS 사업부보다는 안정적인 다른 계열사로 옮기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더욱이 KM 전자 같은 경우에는 특히 인력이 부족한 점도 고려한 것 같습니다.”
“최 실장이 그걸 받았다고?”
“사원 배정 문제는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부적으로 그렇게 검토하는 것 같습니다.”
“쉽지 않을 거야. 내가 아는 최민혁 실장, 그 인간이 얼마나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는데, 순순히 허락할 리가 없어.”
“아마 KM 계열사 지분을 어떤 식으로든지 넘기지 않을까요?”
“흠, 그럴지도.”
그랬다.
장승일 실장도 부정적인 최민혁 실장 태도 때문에 차라리 오큘러스 투자를 포기하고, 김상구 회장의 투자를 받는 것을 긍정적으로 고민했다.
특히 그렇게 되면 TRS 사업부 신규 인력을 KM 전자 쪽으로 돌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이 제안을 받을지에 대해서는 결론 내리지 못했다.
협상의 큰 틀을 확인한 박태정 부장은 이번 협상이 어렵지 않다고 확신했다.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KM 전자 측은 위성 사업부를 완전히 넘기려고 할 겁니다.”
“남은 인원이 스무 명 정도가 다라고 했지?”
“네. 그런데 고용 승계를 다 하실 겁니까? 이일태 이사 경우는…….”
“아, 이일태 이사라.”
김현탁 본부장은 잠깐 고민하나 싶었지만 바로 결정을 내렸다.
“인수할 때는 그대로 받고, 적당한 시기 봐서 바로 정리를 해야지. 그 무능한 양반 뽑았다가 사업을 다 말아먹을 수는 없잖아?”
“…그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김현탁 본부장은 겨우 오큘러스 법인 지분 인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끝내고 나자 피곤했다. 이번 일 때문에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직접 불려 가서 압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숨을 돌리자 다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만 최 실장, 그 새끼는 지금 뭐 하고 있어?”
“그게 파산을 얼마 앞둔 신영 기획사를 인수했습니다.”
“……?”
뜬금없는 이야기에 김현탁 본부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신영 기획사에 대한 보고서를 살폈다. 다만 그 역시 잘나가는 재벌 3세답게 최민혁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여자 연예인 사냥이라도 하는 거야?”
“신영 기획사를 인수한 후에 정리한 것을 봐서는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그러면 기획사를 왜 인수한 거야?”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허.”
최민혁 실장에게 이를 갈고 있던 김현탁 본부장도 영문을 몰라서 잠깐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도 최민혁 실장 그 새끼라면 치가 떨렸다.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에게 직접 복수하려고 했었지만, 도저히 대안이 없어서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다행히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 김상구 회장이 나서면서 이번 일로 최민혁과 대립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현탁 본부장은 지난 일에 대한 보복을 반드시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뜬금없는 기획사 이야기에 허탈해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앞으로의 행보를 우려하거나 조사하는 선에서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김현탁 본부장은 지금까지 최민혁에 당한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결국 최 실장이 연예 기획사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이야기잖아. 이걸 그냥 둬서는 곤란하겠지?”
“네?”
“아니, 생각을 해봐. 최 실장이 가지고 있는 지분 중에 일부만 팔아서 얼마든지 한국 연예가에 진출할 수도 있어. 대기업도 눈치가 보여서 그러지 못하는데, 이 인간이 그렇게 하도록 둘 수는 없잖아?”
“…한영 일보를 비롯한 아는 언론사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좀 과장해도 좋아. 사람들이 위기감을 알 수 있도록 손을 써 봐!”
“알겠습니다.”
“다만 아직 계약을 앞둔 마당에 우리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