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조성돈 팀장도 최두진 사장이 소집했던 임시 주주 총회에서의 소동을 떠올렸다. 당시 1,500원이었던 KM 전자 주가를 명분으로 삼아서 공격했다.
최민혁은 당시에 폭락한 KM 전자의 주가에 대해서 KM 전자가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피력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쓰게 웃고 말았다.
“제 얼굴에 금칠하기는 그러니, 대신에 최구만 과장을 비롯한 콜린스 개발의 주역을 영웅으로 만드는 기획안을 고민해 보세요. 완전 드라마 아닙니까. 그쪽에서도 제 인터뷰 요청을 해왔으니, 아마 방송국 PD도 관심을 둘 겁니다. 홍보 팀과 이야기해서 한번 언론사나 방송국과 정식으로 이야기해보라고 하세요.”
“방송사 말입니까?”
“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이번 이벤트를 이용해서 우리 KM 전자를 잘 모르는 시민을 위해 홍보를 하는 것으로 하죠. 그것도 회사 브랜드 가치 제고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이제는 망해가던 회사라는 이미지를 벗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성돈 팀장도 혀를 내둘렀다. 설마 지분 증여 이슈를 이런 식으로 덮으려고 할지는 상상도 못했다.
‘하긴 KM 전자의 지난 일을 사람들이 알면,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찬양할 테니. 특히 최 실장님이 한 행보를 일부만 알아도 사람들은 지분 이슈 따위는 신경도 안 쓸 거야.’
“…알겠습니다. 그러면 일정을 따로 잡겠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서 필요한 자료는 따로 요청하세요. 제가 줄 테니까.”
“…네.”
조성돈 팀장도 혀를 내두른 채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때마침 장승일 실장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자 다시 자리에서 기다렸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이겠지.’
* * *
기획실 안으로 들어온 장승일 실장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구길모 차장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자세였다.
구길모 차장은 감히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장승일 실장은 소극적으로 변한 구길모 차장의 행동이 이제야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점에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잠깐의 안부 인사에 이어서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장님, TRS 사업과 관련해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최민혁은 자신이 자극해 쑥대밭이 된 지오텍 내부 분위기를 잘 알기에 흥미로운 영화를 보듯이 장승일 실장 이야기를 듣기만 하다가 깜짝 놀란 척 소리쳤다.
“어, 정말 TRS지오텍 사업을 접기로 했습니까?! 지오텍이 그냥 있지 않을 텐데요?”
걱정이 살짝 들어간 연기는 완벽했다.
두 회사의 합작 법인 사업이 간단히 중단될 리가 없었다. 최소한의 사업 운영 기간도 있다.
즉 지금 사업을 정리한다면 소송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침착했다.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손실이 작지 않을 텐데…….”
“그 부분은 지오텍과 협상을 할 생각입니다.”
“저도 계약 내용을 잘 모르지만, 소송이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미국 애들이 그런 부분에서는 뜻밖에 예민해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법률대리인으로 찾아와서 KM 그룹을 상대로 협박하고 간 일을 떠올린 장승일 실장은 잠깐 멈칫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쪽에서도 일방적으로 고집을 부리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 다른 회사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극약처방을 하기 힘들 겁니다. 대신 국내 시장 공략을 위해서 도움이 필요한데, 그 부분을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지원해 줄 예정입니다.”
지오텍은 생각보다는 한국 시장을 다른 나라에 비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때문에 KM 그룹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지오텍이 굳이 합작 법인을 설립한 이유다. KM 그룹이 비록 합작 법인에서 손 뗀다고 해도 이런 점을 도와준다는데 굳이 소송할 이유는 없다.
그러면 협상이 안 될 이유가 없다.
최민혁도 덤덤한 장승일 실장 태도에 감탄했다. 나름 자신이 공작을 벌였지만, 장승일 실장은 의외로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승일 실장의 지적은 마냥 틀린 것도 아니었다.
몇 년 후에 자신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면 악착같이 KM 전자를 물고 늘어질 테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지오텍 스스로는 장래가 밝은 회사라고 생각했다. 굳이 돈을 노려서 다른 회사의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능력도 좋다니까.’
깔끔한 장승일 실장의 해결책에 최민혁도 내심 감탄했다. 그도 지오텍 문제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이보다 TRS 사업을 정리하는 것 자체에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가는 타격이 엄청나다는 점을 잘 알았다.
“할아버지는 그럴 수가 있다고 쳐도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그걸 용인한다는 겁니까?”
장승일 실장도 끝까지 최문경 부회장을 물고 늘어지는 최민혁 질문에 힐끗 쳐다보았다. 딱히 그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같은 경영권 승계 후보자로 최문경 부회장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네.”
“진짜 놀랍네요.”
최민혁은 진심으로 놀랐다. 그가 아는 집착남 최문경 부회장이 이렇게 순순하게 나올 리가 없었다. 다만 최근 최문경 부회장 근황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첫째 큰어머니의 솜씨일까?’
그럴 수 있었다.
인생 1회차에서 최민혁이 죽을 때까지 감시한 이들의 배후가 꼭 최문경 부회장이라고 하기는 힘들었다. 김이경이 뒤에서 지시했다고 봐야 옳다. 그만큼 김이경이 지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최민혁도 딱히 그 점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에게 한 짓은 그 이상이니까.
아니,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을 완전히 밑바닥으로 끌어내리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자기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자신은 인생 1회차처럼 몰락할 테니까.
꼭 그들 자신의 힘이 아니라고 해도 지금처럼 오성 전자 같은 이들을 부추기는 것은 그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최민혁 자신이 유리하지만,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몰랐다.
‘정신 차려야겠어.’
장승일 실장은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대한 질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 지분 증여에 대한 문제를 내밀었다.
“앞으로 회장님도 지난 지분 증여와 관련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네. 일전의 일도 회장님도 사람인지라 김상구 회장 때문에 무리수를 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회장님도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셨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김상구 회장이라…….”
DL 그룹 김상구 회장을 떠올린 최민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는 문득 최훈열 전무를 다시 떠올렸다. 그 배후에 DL 그룹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 복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최민혁은 장승일 실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직 본론은 이야기하지 않으셨네요.”
민망한 장승일 실장은 헛기침하다가 결국 이곳에 온 용건을 꺼냈다.
“사실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최 실장님이 ETRI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제가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고야 말이 안 되니까요. ETRI에서 삽질만 반복하던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최 실장님이 몇 번 왔다 갔다 한 후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다른 대기업을 떠나서 정보통신부가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는 것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정황증거군요.”
장승일 실장도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자세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최민혁과 많이 접하면서 순순히 자기 비밀을 최민혁이 말할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TRS지오텍이 그 증거다. 합작 법인 계약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최민혁이 뒤통수를 제대로 날렸다.
최문경 부회장을 엿 먹일 생각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최민혁이 순순히 대답할 거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일이다.
다만 최민혁에게도 이익이 되는 비즈니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 관련해서 저희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최민혁도 자신이 합작 법인에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지 않았다.
“합작 법인 지분을 얻고 싶다는 말입니까?”
“어차피 오큘러스 프로젝트 진행 속도를 봐서는 곧 합작 법인을 설립할 겁니다. 정보통신부, ETRI를 포함해서 이번 개발에 참여한 법인입니다. 그 법인의 지분 일부를 얻고 싶습니다. 당연히 지분에 대한 대가는 지급할 예정입니다.”
“합작 법인이라…….”
최민혁이 떠올린 것은 스카이라이프다. 그런데 인생 1회차에서는 무려 6년이 지난 후에야 진행된 사업이다. 위성방송 사업이 여러 가지 암초를 만나서 헤맨 덕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또 달랐다. 이제는 이르면 내년 안에도 합작 법인 설립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작아도 그야말로 꿀 빠는 사업이지.’
지분 일부만 있어도 매년 수백억씩 차곡차곡 쌓이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최민혁도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디지털 위성방송을 MP3 홍보 수단으로 생각했다.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결국 TRS 사업을 접는 대신에 위성방송 사업으로 물 타기 하고 싶다는 말이군요. 매입한 건물과 이번 일로 채용한 직원을 그쪽으로 돌리고요?”
“네. TRS지오텍 합작 법인 설립 취소로 말미암은 손실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신규 채용한 인원에 대한 처리도 문제입니다. 다른 계열사로 돌리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건 언론에서 알면 난리가 날 문제이니, 신규 법인 설립 쪽으로 돌리겠다는 말이군요.”
이제 와서 KM 그룹이 새로운 법인을 설립할 방법이 없었다. 더욱이 그 법인의 미래는 신입 사원의 욕구를 만족해야 한다.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이라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번 일만 도와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장승일 실장.
그 역시 이번 일에 대한 번민을 쉽게 떨치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TRS지오텍 사업으로 말미암은 손실에 관한 책임을 장승일 실장도 피해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이번 사업 정리에 따른 외견상 책임은 몽땅 최문경 부회장이 썼지만 말이다.
실제로 이번 일 때문에 KM 그룹 임직원은 최문경 부회장의 리더쉽에 대해서 의심했다.
덕분에 최민혁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KM 그룹 차세대 경영자로 뜨고 있었다.
‘더욱이 잘만 하면 비싼 가격에 위성 사업부를 최문경 부회장에게 넘길 수도 있어. 흠,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이 이일태 이사까지 받아줄지는 모르겠군.’
딱 떠오르는 시나리오는 역시 토사구팽.
자신이 이일태 이사를 자르는 것보다는 그게 더 확실한 복수처럼 보였다.
그런데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도 딱히 최문경 부회장에게 유리한 일만은 아니었다.
디지털 위성 합작 법인이 설립된다고 해도 수익이 나려면 내년 하반기가 되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적자가 쌓인다.
그 부분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IMF가 대기 타는 중이잖아. IMF가 터지면 어떻게 될까? 아마 디지털 위성 사업을 진행하기는 힘들 거야. 지분을 헐값에 팔아야 하겠지.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잖아. 이번 기회에 적당히 압력받는 척하면서 지분을 매각하고, IMF 시기에 다시 지분을 슬쩍 인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디지털 위성 사업이 제대로 굴러가기만 한다면 연간 순이익이 무려 600억이 넘는 사업이다. 결코, 가볍게 볼 사업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잠깐 침묵했다.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구길모 차장 모습도 봤다.
옆에 동석한 조성돈 팀장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역시 이런저런 이해관계 때문에 선뜻 나서지 않았다.
다만 신규 채용 인원 때문에 장승일 실장을 도와줄까 망설였다.
솔직히 신입 사원이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최민혁은 냉정했다. 그는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어떤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최민혁이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최민혁이 무슨 수를 부렸는지 묻지 않았다.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KM 전자 지분 증여 문제는 제가 알아서 따로 처리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는 곤란해요. 으음, 이렇게 하죠. KM 산업 지분 5%를 넘기세요. 아, 공짜로 받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저도 현금으로 깔끔하게 지불할 겁니다. 지난번과는 달리 할아버지도 저에게 한 일이 있으니,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