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최민혁 술수에 놀아나서 반쯤 정신이 나간 최문경 부회장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최민혁 실장에 관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이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보고서에서 최민혁 실장 이름을 빼고, 구두상으로만 최용욱 회장에게 보고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의아한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영문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봐, 부회장, 지금 ETRI가 오성 전자와 협상을 했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우리가 이 사업에 끼어드냐, 아니냐가 더 중요해.”
“…만약 이 보고서 문건이 사실이라면 무조건 하고 봐야 합니다.”
“…그렇겠지?”
“당장 디지털 방송과 관련해서 산적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리스크가 사라진다면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해야 할 일입니다. 더욱이 이미 정부에서도 대기업 배제를 주장한 상황이니, 우리 그룹에게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맞는 이야기야.”
그리고 두 사람의 의견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었다. 위성 정보통신 사업 규모를 보면 대기업이 들어가기에는 모호하고, KM 그룹 같은 중견 기업이 하기에는 딱 맞았다.
거기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에 시장이 좀 더 커질 수도 있었다.
여기서 상황이 좀 바뀐 것이다.
이렇게 보면 참 쉽게 결론이 난다.
하지만 몇 달 전만 해도 위성방송 사업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것이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단 ETRI 연구에 문제가 많았다. 오성 전자가 끼어들어서 밥그릇 싸움하면서도 연구 진행도 산으로 가는 경우가 있었다.
여기에 콘텐츠 업자끼리 서로 자기가 많이 먹겠다고 주장했다.
개발된 수신기는 성능이 안 나와서 제대로 된 테스트도 되지 않았다.
방송 법안은 돈이 안 되니, 아예 국회에서도 관심 두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총체적인 난국.
그 상황이 오큘러스 프로젝트 발표로 불과 2주일 남짓한 짧은 기간에 다 해결이 된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위성방송 사업 퀄리티가 미국 방송과 비교해도 더 나았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상황을 다시 고민한 최용욱 회장도 잠깐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도 이번 프로젝트의 변화가 최민혁이 끼어든 후에 생겼다는 보고서 안건을 봤다.
그는 새삼 손자 최민혁에 대해서 고민했다.
최민혁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당연히 당장 걸리는 몇 가지 문제가 떠올랐다.
지분 증여한 것을 가지고 걸고넘어진 문제.
‘설마 민혁이, 이놈이 저번 일을 두고 문제 삼지는 않겠지?’
최용욱 회장도 최근에야 손자 민혁이 얼마나 뒤끝이 심한지 알았다. 그는 괜히 지난 일을 후회했다. 아니 장승일 실장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중간에 장승일 실장이 나서면서 그나마 자기 생각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무진이 지시를 잘못 받아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되겠지. 문제는 이놈에게 민혁이 그 녀석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 아마 둘이 손잡으라고 하면 난리를 칠 것이 뻔해.’
하지만 그는 문득 자신이 손자 최민혁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자괴감마저 느꼈다.
설마 일이 이렇게 흘러갈지는 상상조차 못 했다.
“…….”
침묵하는 장승일 실장 눈과 마주치고서야 내심 혀를 찼다.
‘그랬군. 장 실장이 이미 이런 일을 예상해서 민혁이, 그 녀석과 대립을 반대했구나. 하, 이거야 원.’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이 생각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 부분을 공감하지 못한다고 하던데, 내가 그 꼴이야.’
복잡한 문제를 떨친 최용욱 회장은 아직 정신이 나가 있는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한결 목소리를 낮추어 장승일 실장에게 말했다.
“장 실장도 부회장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이번 일에 대해 진지하게 작업해 봐. 물론 쉽지는 않을 거야. 정보통신부도 문제고, 이쪽에 엮여 있는 국회의원도 있으니까.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중재해 줄 테니, 나머지 일만 제대로 확인해.”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심각한 얼굴로 굳어 있는 최문경 부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도 정보통신부와 ETRI 갈등이 워낙에 첨예해서 지켜만 봤을 것이다.
정확히는 최민혁 실장이 TRS를 명문 삼아서 최문경 부회장을 뒤흔들어서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보네. 최 실장님도 지난 일에 대해서 앙금이 아직 남아 있을 텐데,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겠고.’
다만 그는 최용욱 회장이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안 꺼내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최용욱 회장도 드디어 최민혁 실장 능력을 알아봤다고 느꼈다.
‘그래도 다행이다. 두 분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는 선에서 끝나서.’
* * *
장승일 실장은 기획조정실 직원을 죄다 불러서 이번 안건을 검토했다. 여기에는 TRS지오텍 지분 매각도 포함했다.
역시나 협박에 가까운 위약금 소송 문제가 나왔다.
“후유, 그건 지오텍이 원하는 것을 던져주면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쪽에서 원하는 것은 국내 TRS 시장이니까.”
남의 사업을 일방적으로 도와줘야 하는 일이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어서 나온 결론이었다.
구길모 차장도 굳이 합작 법인 설립을 계획한 지오텍 사정을 알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새로 채용한 인원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지금 당장은 그들에게 연락해서 사업부 매각을 진행 중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회사에 취업했다고 좋아했는데, 입사도 하기 전에 그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쉽게 상황이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구길모 차장은 차라리 다른 의견을 냈다.
“일단 해결책을 고안한 후에 연락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신입 사원 교육을 TRS지오텍 건물 문제로 연기되었다고 하면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게 좋겠지.”
그 침착한 장승일 실장도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지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정작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우리 KM 전자가 낄 수 있을까요?”
“KM 전자의 위성 사업부가 이 사업에 처음부터 끼어 있었잖아. 그러니 그 명분을 이용하면 낄 수는 있어. 우리 역시 꽤 손실이 났으니까.”
“하지만 샘플로 만든 물량도 별로 없고, 연구 단계였지 않습니까. 결국, 일정이 좀 늦어지는 건데, 그것으로 얻을 것이 있을까요?”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났잖아.”
“설사 그 부분은 넘어가도 오성 전자가 이미 한 짓을 보았듯이 또 수신기 물량은 10만 대씩 찍어낼 겁니다. 과연 그 물량과 경쟁할 수 있을까요?”
“…….”
장승일 실장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오성 전자가 한 짓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운 전자, LC 전자, HY 전자도 이제는 소극적이지 않을 것이다.
스펙이 제대로 확정되기만 한다면 막대한 물량 공세로 위성방송 시장을 선점하려고 할 것이다.
‘하긴 회장님도 이런 문제를 걱정했겠지.’
장승일 실장도 오성 전자 기획 팀에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정도로 머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10대 대기업과 물량 공세로 싸워서 이길 방안은 없었다.
다른 기획실 직원은 모두 입을 다문 채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들도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솔직히 ETRI 하나만 상대하는 것으로도 피로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눈치 없는 천경구 과장이 손을 들었다.
“…저기 KM 전자의 이일태 이사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옆에서보다 못한 박재광 과장이 팔꿈치로 천경구 과장을 쿡쿡 쥐어박았다.
“왜 그…….”
하지만 천경구 과장도 살기가 가득한 기획조정실 임직원 전체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비웃는 이도 있었다.
이번 회의는 기획조정실 전체 인원이 모여서 할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데 고작 하는 이야기가 이일태 이사였으니.
피곤했던 장승일 실장은 천경구 과장의 주장을 질책하지는 않았다.
“이일태 이사 이야기는 하지 마. 아, KM 전자에서 진행하는 내부 일도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최민혁 실장님을 자극할 만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마!”
“…네.”
이미 최민혁 음모론은 증권가에 파다했다. 기획조정실 직원이 그걸 모를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주도한 것이 최민혁이라는 설이 돌고 있었다.
결국 기조실 회의는 별다른 결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을 직접 찾아가서 이 결론을 보고했다. 그도 단단히 그에게 한 소리 들을 각오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지난 KM 전자 지분의 증여 문제를 걸고넘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민혁에게 말해 봐. 그 정도라면 녀석도 지난 일은 잊을 거야.”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묘한 얼굴을 한 채 곧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될까? 아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지분 증여 문제는 앞으로 계속 이야기가 나올 거야. 회장님이 도와준다고 하면 최 실장님도 부담을 덜 수 있으니까.’
* * *
최민혁도 부산한 KM 그룹의 분위기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그린 큰 그림 중에 한 부분의 퍼즐이 예상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성 전자, ETRI, DL 그룹 갈등은 예상과는 다르게 진행되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이 대립하면 대립할수록 자신이 가진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지분 가치는 올라간다. 굳이 내 재산을 불려주는 그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었다.
또한 실상 이번 일의 핵심 타깃 중의 하나는 최문경 부회장이었다.
최민혁 자신이 만든 그림이지만 생각보다는 더 복잡한 양상에 혀를 내둘렀다. 지오텍의 TRS 사업에 대한 집착을 간과한 것이다.
‘난잡해서 보기가 불편하지만,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가 없잖아. 이쪽은 그야말로 팝콘각으로 생각해야지.’
TRS 사업이나 오큘러스 프로젝트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
TRS 사업은 지오텍이 망하면서 쪼그라드는 사업이고,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500~600억 규모의 순이익이 꾸준하지만, 그가 관심을 둘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이보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는 오성 전자나 KM 그룹의 집요한 움직임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다면 MP3 개발에 별의별 짓을 다했을 것이다.
‘아마 MP3 특허 인수에 대한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중간에 가로챘을 수도 있어.’
심지어 MP3 칩 개발 관련해서도 얼마든지 방해 공작을 했을 수도 있었다.
다행이라면 오성 전자 쪽에서는 아직도 전혀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MP3 칩만 해도 신형 TV 제어 칩이라고 표기해서 주문을 넣었던 것이다.
다행히 외부 압력이 없는 덕분에 다양한 디자인 MP3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기획실과 디자인 팀이 나서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최민혁 역시 미래 대박 디자인을 알고 있었지만 넌지시 추가하는 것만으로 끝냈다. 그는 가능하면 이전처럼 적극 나서지 않았다.
‘아직은 MP3가 인터넷에 퍼지는 시간이 더 필요해.’
덕분에 정작 자신이 당면한 문제 한 가지를 느긋하게 볼 수가 있었다.
기획 팀에서 올라온 기획안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콜린스를 이용한 혁신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내세워서 지분 증여 문제를 덮는 소위 말하는 이슈로 이슈를 덮는 방식이다.
최민혁은 지분 문제를 간단하게 보지 않았다. 그 역시 과거 벨린 투자를 이용해서 최두진 사장을 비롯한 대주주 지분을 확보하면서 문제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기획실 직원에게도 주식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했어. 문제가 될 것이 없도록 손을 썼는데, 지분 가치가 너무 커지는 것까지는 간과했어. 이 기획안으로는 곤란해.’
잠깐의 고민.
그런데 문득 최민혁도 MP3의 홍보가 필요하다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붐을 만들기 위해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했다.
만약 콜린스 홍보의 뒷이야기로 MP3를 끼워 넣으면 어떨까.
그것을 천문학적인 지분 증여 절세에 민감한 이들이 보면 어떨까.
‘괜찮네. 물론 그 전에 정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가 더 있어.’
최민혁은 그제야 결심을 굳혔다.
“제가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당당한 계획이 필요합니다. 망해가는 KM 전자의 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던 그 모습처럼 말이죠. 임시 주주 총회에서도 있었던 일입니다. 벌써 잊은 겁니까?”
“아, 그렇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