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다른 기획 1팀장이나 2팀장은 그저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다.
그들 역시 이번에 온갖 뜬소문이 난무하는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트레스를 참다못한 권태성 실장은 담배까지 베어 물었다. 그제야 좀 살 만했다. 회의실에서 금연이라는 것을 뻔히 아는 팀장들도 침묵했다.
그는 임권수 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마침 임권수 부장은 발표회장을 찍은 동영상 파일을 보여주었다. 특히 장관 대우를 받는 최민혁 실장 모습을 말이다.
‘또 최 실장 짓일까?’
“…기가 막히네.”
임권수 부장 역시 질린 눈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 역시 최 실장이 배후에서 손을 쓴 것 같습니다.”
착잡한 권태성 실장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TV 신기술이라면 나도 이해가 돼. 하지만 위성방송 기술을 무슨 수로 이용했다는 말이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됐네. 추론은 인제 그만해. 이제 지겨워. 끔찍해. 이창명 이사 이 새끼는 자신이 다 하겠다고 하고서는 또 남 탓하는 것도 끔찍해. 가만 지금 이창명 이사 그 인간은 뭐해?”
“그게 이미 안국호 부장이 이번 사업과 관련된 팀장 몇 사람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남겠지. 후유, 이 일을 어디서 손을 봐야 할지 모르겠어.”
“제가 위성방송 사업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제까지 그렇게 알아보고도 아무것도 못 찾았……. 아, 아니다. 그래, 일단 이창명 이사도 지켜봐. 어차피 최호성 상무를 비롯해서 나선 사람도 많으니, 이번 일은 변명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야. 이번 일 관련 팀장을 만나서 의견을 모아봐.”
“알겠습니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자신이 지시하고 나서도 기시감을 느꼈다. 이전에 계속 반복된 일이다. 그는 보고서를 보면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살펴보았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최민혁 실장의 장관 코스프레 사진이다.
저게 과연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 받은 대우일까.
일이 딱 최민혁 실장이 원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까지 수십 차례 최민혁 실장에게 당한 것 때문에 뒤늦게 아차 싶었다.
그는 회의실을 나서는 임권수 부장을 불렀다.
“만약 우리가 ETRI와 대립한다면 일이 크게 비화할 거야. 그렇게 된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겠지?”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겁니다. 이번 일 자체로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은 KM 전자입니다. 실상 지금 진행되는 월마트 협상을 파야 하는데…….”
“됐어. 월마트는 일단 접어. 이번 관련 사업부 담당자를 만나서 가장 빨리 협상에 임할 때 생기는 뒤처리를 철저하게 검토해 봐.”
“하지만 일을 이대로 덮어버리면…….”
“대신에 정보통신부나 ETRI도 이번 일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한 번 검토해 봐. 최 실장이 원한 대로 흘러가게는 할 수 없어!”
“…네.”
임권수 부장도 최민혁 실장이란 이름을 듣자 순순히 수긍했다. 기획실 내에서도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는 것을 잘 알았다.
‘설마 진짜 이번 일도 최 실장이 배후일까?’
* * *
시스템 사업부의 최호성 상무는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HDD 제어 칩이나, 멀티미디어 관련 칩을 많이 개발했다.
그는 자신의 실적을 바탕으로 ARM과 손을 잡아서 모바일 사업에도 손을 썼다.
위성 수신기 칩은 이런 시스템 사업부의 많은 업무 중 한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말은 꽤 힘이 있었다.
이번 위성 수신기 칩 사태와 관련해서 숨김없이 그대로 목소리를 냈다.
물론 권태성 기획실장이라는 이름을 반드시 걸고 넘어갔다.
자연스럽게 이번 사태와 관련된 사업부에서도 말이 나왔다.
사태가 점점 커지자 이창명 이사도 크게 당황했다. 그가 예상한 것보다는 관련 팀에서 극단적인 반응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김현우 수석 부장을 호출해서 이 문제를 따졌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ETRI 측과 계속 협상 중입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야, 지금 다른 사업부에서 난리가 났어. 입만 열면 내 욕을 해. 그런데 계속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야?!”
김현우 수석 부장도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고개 숙인 것과는 달리 내심은 좀 달랐다. 그는 사내 압박 때문에 이창명 이사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른 사업부 반응은 예상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실상 그들이 그래야 ETRI와의 협상에서 좀 더 우위에 설 수 있습니다.”
이창명 이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정말 이번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어? 만약 잘못되면 자네가 다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흠. 좋아. 그렇다면 김 수석이 알아서 진행해 봐.”
* * *
오큘러스 사태 때문에 오성 전자가 입은 손실이 생각보다 컸다.
관련 사업부에서 반발하는 것은 그들이 입은 손실도 문제지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그들을 일일이 만났다. 최호성 상무도 마찬가지다.
“잘 알고 있습니다. 최 상무님이 고민하는 일도 이미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번 ETRI와의 협상에서 그런 점을 분명히 할 겁니다.”
실제로 수신기 칩 개발과 관련된 부분은 ETRI 측 담당자도 잘 아는 사실이다.
비록 오성 전자가 임의대로 행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에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자기 임의대로 바꾼 것은 ETRI 측이다.
그 책임에서 ETRI가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현종 팀장은 오성 전자 측에서 일방적으로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점을 걸고 넘어갔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다른 대기업이 토로한 불만을 기록한 자료를 김현우 수석 부장에게 보여 주었다.
“오성 전자 측에서 아예 작정하고 소송을 걸 생각인데, 이번 일은 다른 기업도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이 관련 사업 팀의 자료를 취합해서 ETRI를 압박한 것처럼 ETRI 역시 관련 사업부와 다른 협력 업체 자료를 가지고 나왔다.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애초에 이번 협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예상을 벗어난 ETRI 대응에 크게 당황했다.
“오 팀장님.”
“아, 이번에 실장으로 진급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오 실장님, 정말 저희랑 끝까지 가보겠다는 말입니까?”
아마 한 달 전이라면 오현종 팀장도 적당히 좋게 말을 했을 테지만 실장이 되고 난 이후에는 그의 태도가 좀 달랐다.
“그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우리 ETRI가 그렇게 만만해 보입니까?”
“그,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그쪽에서 협박하면 우리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그냥 따를 것으로 생각한 겁니까?”
“그, 그게 아니라…….”
김현우 수석 부장은 크게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안국호 부장를 통해서 파악한 오현종 팀장의 행동이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김현우 수석 부장이 오현종 실장을 잘 몰라서 일어난 일이다.
오현종 팀장이 비록 소심하기는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박재호 실장 밑에 있을 때는 살아남기 위해서 조심했다.
그런데 지금은 실장으로 진급하고 난 이후다. 굳이 숙이면서 살 이유가 없었다.
석사, 박사를 거쳐서 ETRI 내의 경력 25년이 넘는 베테랑이 그였다.
“…저도 이번 일은 가능하면 좋게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성 전자가 극단적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애초에 이번 일에 대한 손실은 오성 전자가 자초한 겁니다. 우리 ETRI 측에서 수백 차례 프로젝트 일정을 조율해도 멋대로 진행한 것은 그쪽입니다. 더욱이 이창명 이사는 이제까지 자신이 ETRI 원장이라도 되는 양 멋대로 굴었어요. 그거 다 이번 일에 대해서 자신이 있으니, 그렇게 한 것 아닙니까?”
책임을 교묘하게 전가하는 오현종 실장의 말에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이거 골치 아프네.’
하지만 오현종 실장은 무조건 극단적으로 가지 않았다.
“다음 주에 정보통신부 주제로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실무자 협의가 있을 겁니다. 그때 나와서 이야기를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도 실무자 협의가 무슨 내용인지 안다. 무궁화 위성 발사를 앞두고 앞으로 일을 협의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소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해서는 이제까지 투자한 것을 고려하면 얻는 것이 너무 없었다.
‘자칫하면 다른 대기업에 이권을 다 빼앗길 수도 있어.’
* * *
오성 전자의 ETRI 압박에도 상황은 ETRI가 주도했다.
정보통신부의 이원한 실장이 나서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정부가 작정하고 이번 일을 밀어붙이는 모양새였다.
일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창명 이사는 안절부절못하는 김현우 수석 부장을 탓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일은 김현우 수석 부장 책임이라고 못 박은 다음에 슬쩍 넘어갔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끝까지 ETRI와 싸워서 이권을 따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공허한 말뿐이었다.
오성 전자 윗선에서는 이번 일로 정부와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비록 큰 손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빌미 삼아서 이번 일에 주도권을 잡는 쪽으로 결정 내렸다.
물론 이렇게 된 것에는 권태성 실장을 비롯한 이창명 이사의 반대 측에 선 이들이 모두 입을 모아서 주장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일에 대한 희생양으로 적임자도 있는 마당에 일을 복잡하게 꼬지 않았다.
김현우 수석 부장 나름 잔머리를 굴렸지만, 세상이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최민혁도 오성 전자가 결국 꼬리를 말았다는 것을 듣자 입맛을 다셨다. 그가 좀 더 작품을 만들까 고민했는데, 예상보다는 빨리 일이 마무리되어 버렸다.
“이상하네요. 김현우 수석 부장이 이번 일에 나섰다면 이렇게 쉽게 돌아갈 리가 없는데…….”
“…아마 실장님 때문일 겁니다.”
“저요?”
“아무래도 ETRI가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실장님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당장은 지난 일을 덮고, 적당히 이익만 챙기는 것으로 끝냈을 겁니다.”
그랬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최민혁에게 크게 당한 권태성 실장도 바보는 아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미적거릴 바에는 차라리 적당히 덮는 것으로 일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된 오성 전자 연구 팀 중에 최민혁 실장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조성돈 팀장도 혀를 내두른 채 계속 이야기했다.
“임 부장도 그렇지만 이번에 전에 오성 전자에 있다가 옮긴 직원도 아는 지인을 통해서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무성하다고 직접 전화를 할 정도입니다.”
“그렇습니까?”
“네. 장난 아닙니다. 특히 권태성 실장이 작정해서 이번 일을 주도했고, 이창명 이사도 이번 일에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가만히 있었답니까?”
“한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황준엽 부사장까지 나서면서 지금 오성 전자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안재운이 경영 기획실 복귀를 선언했습니다.”
이창명 이사도 안재운 복귀 후에는 이상할 정도로 침묵했다. 그 역시 이번 일이 너무 커져서 자칫하다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현우 수석 부장이 나서면서 이번 일도 그가 다 밀어붙인 것으로 오성 전자 내에 알려졌다.
목적을 달성한 마당에 굳이 일을 더 만들 이유는 없었다.
최민혁은 입맛을 다셨다. 김이 빠진 콜라를 마신 사람처럼 아쉽기만 했다.
‘김 수석이 아쉽네. 좀 더 집요하게 매달릴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안 되었나 봐.’
하지만 그는 굳이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이해관계가 복잡해서 일이 그렇게 쉽게 덮일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하군요.”
“이번 일에 권태성 실장이 직접 황준엽 부사장을 비롯한 최호성 상무와 같은 실세를 만나서 밀어붙였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권태성 실장의 영향력 때문에 그들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 우리 권 실장님이 나섰어요? 흐음, 그 양반이라면 무시할 수는 없죠. 일단 지켜봅시다. 오성 전자는 그렇게 물러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기업은 또 이야기가 다르니까요.”
“설마 이번 일이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