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최민혁은 고개를 갸웃한 채 인생 1회차의 안재운 행보를 떠올렸다. 일본 유학을 떠나서 오성 전자 내부 활동에서 벗어난 덕분에 앞으로 7년간은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일본 유학, 미국 유학을 거친 후에 돌아와서 e오성 사업을 진행했다가 몽땅 다 말아버린다. 당시 안재운은 e오성 손실을 오성 그룹 계열사에 몽땅 전가해서 맹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국내에 남겠다라? 이거 좀 변화가 있겠어. 당시 안재운이 e오성을 말아먹은 것은 IT 버블 시기와 맞물렸을 뿐이니까.’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오성 전자 내에서 말이 나올 것은 예상했다. 다만 그 당사자가 안재운이라는 것은 간과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안재운이 지금 이 시기에는 너무 의욕에 집착해서 얼마나 멍청한 짓을 많이 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TV 사업부 매각 문제가 터지면, 결국에는 안 회장이 직접 손을 쓸 것이라 예상했어. 잘하면 안 회장 대신에 안재운이 끼어들 수도 있겠어. 무능한 후계자를 띄우려면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꽤 괜찮은 아이템이니까.’
“저기 실장님…….”
“아, 잠깐 딴생각을 했습니다. 안재운 행보도 한번 잘 살펴보세요. 잘하면 재미있는 작품 하나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조성돈 팀장도 바보가 아닌데, 최민혁이 원하는 바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말씀은…….”
“안재운도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에 고민할 겁니다. 그러니 일단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된 오성 전자의 사업부를 한번 천천히 살펴보세요. 필요하다면 오성 전자에 있다가 온 이들의 도움을 얻어도 좋고요.”
집요한 최민혁의 주장에 조성돈 팀장은 힐끗 최민혁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아니, 당황했다.
이제까지 최민혁이 오성 전자나 최문경 부회장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타켓을 정해서 움직인 적은 없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 상황 파악이 우선입니다.”
“저기 실장님, 지금 50만 대 물량의 콜린스 계약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인데…….”
“어차피 계약하더라도 콜린스 부품 계약 때문에 내년 하반기까지 나누어야 할 겁니다. 서두를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공급한다면…….”
“글쎄요. 콜린스 한 대 팔아서 얼마 남는지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점이 있다면 회사 매출이 7~8배 커지는 정도? 그다지 영양가 없는 내용입니다. 실속 없는 2조 매출 따위에 사력을 다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고작 2조 매출’이란 말에 조성도 팀장도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역시 MP3의 수익성을 떠올리자 최민혁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 웃기는 일이 있다.
KM 전자에서 계속 배짱을 부리자 월마트도 이제 서서히 백기 투항 자세를 취했다.
사실 지금 KM 전자의 놀라운 점은 바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탄탄한 현금 흐름이었다. 물건을 주면, 반드시 대금을 받는 구조라서 그 흐름이 어느 때보다 탄탄했던 것이다.
순이익은 그다음 문제였다.
최민혁은 배 째라는 식으로 말했다.
“월마트 자기들이 아쉬우면 계약도 조정하고, 생산 일정도 도와줄 겁니다. 부품 공급 역시 걔들이 힘쓰면 우리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요. 목마른 놈이 우물 파기 마련입니다.”
조성돈 팀장도 막 나가는 최민혁 주장에 태클을 걸 수가 없었다.
이유는 현재 전부 최민혁 실장이 원한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최민혁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수긍하고 말았다. 다만 벼랑 끝 전술로 밀어붙이는 최민혁의 행보가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초대박 예상 아이템 MP3가 대기 타고 있는데, 뭐라고 반복하기도 그랬다.
‘일을 이렇게 크게 벌여도 괜찮을까. 지금까지는 실장님 지시대로 흘러가고는 있지만 정말 불안하네.’
* * *
안재운이 오큘러스 프로젝트 관련해서 일을 맡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오성 전자 내에서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황준엽 부사장이 판을 만들기 위해서 조금씩 작업을 진행한 결과였다.
이창명 이사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게 당황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이창명 이사에게 반감을 품은 이들은 이번 일 때문에 서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중에 하나가 ARM 기술 도입을 통해서 비메모리에 집중하는 시스템 사업부다.
시스템 사업부는 전략사업이 아니면 보통 외주 처리를 하는데, 위성 수신기 사업은 향후 무선통신 사업을 위한 사전 예행연습으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거기다 위성방송 시스템을 통한 기술 확보는 후에 모바일 사업에도 적용된다고 봐도 됐다.
다만 굳이 시작부터 자신이 직접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김정호 팀장은 나름 잔머리를 굴렸다.
실제로 위성방송 사업은 아직도 시작 단계라서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변화가 생긴 것은 역시 이창명 이사가 미친놈처럼 날뛰고 난 이후다.
비록 서자라고 해도 회사에서 이창명 이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있어서 일단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서두른 덕분에 무리하게 진행한 수신기 칩 개발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김정호 팀장은 계속해서 최호성 상무에게 이 문제를 보고했다.
“이대로 두고만 보실 겁니까?”
“지금 당장은 어쩔 수가 없어.”
“하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손실 난 부분에 대해서는 상무님이 몽땅 뒤집어쓰고 남습니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물론 최호성 상무도 장담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비록 이번에 손실이 크다고는 하지만 이제까지 탄탄대로를 걸어온 덕분에 수신기 칩 때문에 잘리지는 않을 거다.
다만 손실 난 부분에 관해서는 책임이 불가피했다.
이제 전무 진급이 확실한 최호성 상무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김정호 팀장은 이제까지 최호성 상무가 명확한 실적 확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이 싸우고, 노력해 왔는지 잘 알았다.
“이창명 이사가 의도적으로 상무님을 견제할 목적으로 수작을 부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싸워야 합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최호성 상무는 이창명 이사가 안건민 회장의 사냥개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불행히도 이창명 이사는 정상적인 관리자가 아니다. 안건민 회장의 눈이 되어서 사내의 불만 세력을 살피는 자였다.
경영 성과가 문제가 아니다.
이창명 이사라는 미친개를 이용해서 임직원의 내심을 살피는 것이 목적이다.
아무리 최호성 상무라고 해도 이창명 이사에게 이를 드러냈다가는 안건민 회장의 레이더에 찍힐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안재운 씨가 끼어든다면 이야기는 또 다르지. 다만 아직은 지켜봐야 할 시기야.’
“상무님, 전 정말 답답합니다. 이창명 이사, 그 새끼가 하는 짓을 뻔히 보고도 그냥 있습니까. 툭하면 남의 실적을 가로채기만 하는 인간 아닙니까?”
“입조심해!”
“상무님!”
잘생긴 얼굴 덕분에 여사원에게도 인기가 많은 최호성 상무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문제인데, 설마 이런 식으로 풀려갈지는 몰랐어.’
그 역시 이번 수신기 칩 개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비관적이었다.
그렇다고 이창명 이사의 부탁을 빙자한 노골적인 압박에 지시를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이창명 이사가 인사 팀에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자신의 전무 진급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창명 이사의 제안이 덫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성 그룹 내부의 감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창명 이사에게 찍히면 그 역시 곤란했다.
거기에 위성방송 사업 자체는 딱히 나쁘지 않았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한 걸음 성장한다면 차세대 프로젝트에서도 큰 도움이 될 거라 봤다.
그런데 오큘러스 프로젝트 발표 이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김정호 팀장은 심각했다.
“자칫하면 수신기 칩 개발을 다시 해야 합니다. 정말 그렇게 하실 생각입니까?”
“기다려 봐.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까.”
냉랭한 최호성 상무의 말은 평소처럼 침착했다.
하지만 김정호 팀장이 내놓은 보고서를 보자 인상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이게 진짜야?”
“그것 때문에 지금 설계 팀이고, 공장이고 모두 난리가 났습니다.”
“하.”
최호성 상무는 황당한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 * *
오성 그룹의 구조조정 이후에 가장 큰 주목을 받는 사업 중의 하나가 바로 비메모리 사업이다.
비록 아직은 여러 파트별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통폐합이 진행 중이었다.
ARM를 이용해서 단순히 선행 개발이 아니라 제품 개발에 집중하는 최호성 상무는 나름 이 상황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가 굳이 위성방송 수신기 칩 개발을 맡은 이유였다.
그리고 이 사업은 단순히 시스템 사업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획실에서 장기적으로 미는 비메모리 사업에 대한 중심축이었다.
최호성 상무가 굳이 권태성 기획실장을 찾아간 이유였다.
“이거 알고 계셨습니까? 도대체 수신기 칩을 다시 개발해야 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후유, 그게 말입니다.”
권태성 기획실장도 식은땀을 흘렸다. 그 역시 이 사태에 대해 이틀 전에 보고를 받았고, 현재 손실과 앞으로 대응책을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날벼락이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온종일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곧이어 위성 사업과 관련된 사업부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제대로 상황을 모르는 권태성 기획실장으로서는 진절머리를 쳤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 사업부의 실세인 최호성 상무는 직접 자신을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난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그냥 회사 그만두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저도 이런 말을 하기 그렇지만 이번 사업은 올 연말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진행될 일이었습니다. 김정호 팀장의 주장처럼 수신기 칩 개발이 간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위성방송 개발이…….”
“이봐요, 권 실장, 지금 내가 그런 변명 듣자고 여기까지 찾아온지 압니까? 책임을 누가 질 거냐고 묻지 않습니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무리한 진행을 반대했는데, 이 사업을 강제로 밀어붙인 이가 이창명 이사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창명 이사의 책임이란 말입니까?”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사전에 검토했다면 일정을 조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창명 이사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건 최호성 상무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흠.”
최호성 상무도 굳이 권태성 기획실장 주장을 반박하지 않았다. 이 안건은 이미 몇 달 전부터 계속 말이 나왔던 이야기였다.
다만 그가 굳이 이창명 이사 이름을 꺼내지 않은 것은 괜히 이창명 이사에게 찍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 실장님이 교통정리를 해주실 겁니까?”
“…그래야죠.”
권태성 기획실장도 부담스러운 얼굴로 수긍하고 말았다.
사실 ETRI에서 오큘러스 프로젝트 진행한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오현종 팀장은 이 작업을 할 때 넌지시 기존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몇 번에 걸쳐서 지적했다.
그런데 이걸 멋대로 해석해서 밀어붙인 것이 바로 이창명 이사였다.
사업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함이었다.
아니, 최민혁 실장을 압박하기 위해서 더 일정을 밀어붙였다.
내부에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떠들어도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 이사에 대한 증오에 미쳐서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기획실에 들어올 때는 잔뜩 분노한 상태였던 최호성 상무는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채 돌아섰다.
한창 회의 중이었던 기획실 내부에는 찬바람이 돌았다.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은 권태성 기획실장은 따가운 기획실 팀장들의 시선에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기획 3팀 임권수 부장이 다른 팀장들 눈치를 보면서 슬쩍 입을 열었다.
“괜찮을까요?”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최호성 상무 눈치를 봐서는 전부 실장님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 같은데,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이창명 이사가 자신이 잘못했다고 가만히 있을 사람도 아니고.”
“그렇겠지.”
과거에도 수십 차례 반복된 일로 그동안에도 이창명 이사가 문제를 일으킨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창명 이사는 절대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이 사업부 팀장. 저 사업부 팀장. 조 사업부 팀장에게 책임을 다 떠넘겼다.
변명과 거짓말이 이창명 이사의 주특기였던 것이다.
권태성 실장도 짜증스러웠다. 평소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유명한 이가 그였으나 지금 이 상황에선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