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오성 전자가 깽판을 친다고 해서 정부가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제야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황준엽 부사장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내부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런가요?”
그는 허겁지겁 이 안건에 대해서 다급하게 알아 온 비서의 이야기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정식으로 소송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ETRI와 사소한 갈등 때문에 대립한 것뿐입니다. 설마 오성 전자가 ETRI를 상대로 소송을 걸 리가 있겠습니까?”
이원한 실장도 이미 아는 사실이다. 다만 괜히 카더라 이야기라고 해도 언론 통해서 외부에 알려진다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이 자리에 온 것뿐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일이 크게 비화하면 저도 그냥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이번 일은 윗선에서도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일이니, 괜한 잡음이 없도록 잘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변명하던 황준엽 부사장도 내심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른 척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이미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문제는 그 일의 당사자가 이창명 이사라서 자신이 크게 간섭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이런저런 문제가 터져 나왔지만, 권태성 기획실장처럼 그냥 지켜만 봤던 것이다.
‘도대체 이창명 이사가 무슨 일을 했기에 소송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 * *
황준엽 부사장도 회사에 돌아오기가 무섭게 이리저리 내부 사정을 알아봤다. 역시나 그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하면 이창명 이사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가 침묵한다고 해서 그 밑에 임직원들까지 다들 조용히 있지 않았다.
그들 나름대로 이리저리 내부 소식통을 통해서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아봤다.
당연히 무성한 이야기가 물밑에서 오갔다.
어떤 이들은 ETRI에 반드시 보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황준엽 부사장도 오성 전자 사내에 소문이 무성해지자 난감했다. 다만 이창명 이사를 생각해서라도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안건민 회장의 장남 안재운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가 조심스럽게 연락을 취해왔다.
황준엽 부사장은 약속 장소인 서울 강남의 고급 한정식집을 찾았다.
70년 전통의 조안관은 세련되면서도 현대적인 내부 장식을 갖추었다. 다양한 한국식 소품으로 꾸며져 가게의 한국적인 정서가 인상적이다.
입구 내부도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었다.
안에는 이미 안재운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수행 비서인 김인주 과장이 경호원에게 지시하는 중이었다. 그는 황준엽 부사장을 보자 눈인사를 한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김인주 과장이 안재운의 비밀스러운 일까지 다 처리하는 측근이라는 것은 황준엽 부사장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가 알기로 안재운은 이미 일본 유학이 결정 난 것으로 알았다.
‘이상하네.’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황 부사장님을 괜히 번거롭게 해드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술잔을 따라주는 안재운은 평소와는 달리 조바심이 가득했다.
처음 접하는 안재운 모습에 황준엽 부사장도 이번 만남이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하긴 위성방송 사업도 소프트웨어 사업이니까.’
안재운은 늘 주변 지인을 만날 때마다 고부가가치 사업을 강조했다. 미국 IT 산업 대박에 관한 이야기를 숨기지 않았다.
제조업 중심의 한국 산업이 새롭게 변하지 않고서는 한국 경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다.
불행히도 이런 그의 의욕과는 달리 오성 전자 생활은 순탄치가 않았다.
안건민 회장의 직계인 안재운을 함부로 다룰 오성 전자 임직원은 별로 없었다.
과장이고 차장이고를 떠나서 직급에 상관없이 안재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다소 불합리한 점이 있어도 안재운의 주장에 따랐다.
경영 기획실에서 그런 짓을 하니, 기획실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회사 실적이 박살이 나자 그제야 말들이 나왔다.
안재운과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안재운 안면에서 책임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도련님’ 타령만 한 채 안재운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일방적인 이런 인간관계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안재운은 정작 실무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경영 기획실에 적응하지도 못했다.
결국 갈등이 극에 달하자 안건민 회장도 일본 유학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선택했다.
안재운도 자신의 실수를 순순히 인정했고, 차라리 자신도 잘 모르는 일본 대학에 가서 경험을 쌓는 것이 좋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가 일본에 막 가려고 준비할 때 최민혁 사태가 터졌다.
이후 최민혁의 행보는 딱 안재운 그 자신이 꿈꾸던 미래였다.
특히 그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KM 전자의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서 증여세를 절감한 부분이다.
그냥 증여 받았다면 천문학적으로 나올 수 있는 세금을 절감해서 1조 자산가가 된 최민혁의 수완을 안재운은 솔직히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이것은 안재운만의 생각이 아니라 오성 그룹 구조조정 본부에서도 원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런 차에 ETRI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후유, 이거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굳이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안재운 생각을 알아본 황준엽 부사장은 눈치만 봤다. 이미 경영 기획실에 적응하지 못한 안재운 상황을 황준엽 부사장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도련님 마음은 저도 이해하지만 지금 당장은 일본에 가시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어린 최민혁 실장도 하는 일인데, 저라고 해서 못하겠습니까.”
“…….”
최민혁 실장 이야기가 나오자 황준엽 부사장도 입을 다물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최민혁 실장.
최용욱 회장의 바지 사장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콜린스 사업의 대박도 최용욱 회장이 장승일 실장을 이용해서 주도했고, 얼굴마담으로 최민혁 실장을 내세운 것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다.
그 어린 최민혁 실장이 콜린스 초대박 같은 일을 벌였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유언비어가 돌아도 최민혁 실장이 KM 전자를 혁신과 변화의 기업으로 만드는 데 공헌한 것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경험이 많은 황준엽 부사장은 당연히 최민혁 실장의 성공 스토리를 다 믿지는 않았다.
“물론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콜린스 같은 비즈니스 모델이 오성 전자 내에 흔한 것은 아닙니다. 설사 있다고 해도 끼어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어때요?”
“네? 물론 오큘러스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대기업에게 쉽게 문을 열어줄 리가 없습니다.”
“황 부사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실망입니다.”
“…제 말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겠죠? 그러면 대안이 뭐가 있을까요?”
안재운 표정은 아주 달라졌다. 그 역시 경영 기획실 입사 후에 경험한 실패를 떨치고 싶었다. 이번 일을 잘만 활용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부활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도 더 일본 가라는 소리도 하지 않을 거야.’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초조하지 않았던 안재운.
그런 그도 최민혁 실장의 행보와 비교를 당하자 쉽게 견딜 수가 없었다.
안건민 회장조차 최민혁 실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황준엽 부사장도 안재운의 사정을 깨닫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넘어간다고 해도 이창명 이사는 좀 달랐다.
“이번 일은 이창명 이사가 책임지고 진행하는 일입니다. 만약 지금 도련님이 끼어들면 이창명 이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제 생각은 달라요. 지금까지 이창명 이사의 실패는 차고 넘치니까. 더욱이 뉴스에서 그 난리를 쳤지 않습니까. 아버지도 이창명 이사에게 크게 실망하고 있어요.”
“으음.”
황준엽 부사장도 잠깐 머리를 굴렸다. 그 역시 다 아는 사실이다. 다만 이창명 이사는 안건민 회장과 소통 채널이 있어서 거리를 뒀을 뿐이다.
만약 안재운이 나서서 이창명 이사를 견제한다면 굳이 못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괜히 나서서 정보통신부와 ETRI를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상황을 봐서 도련님이 자연스럽게 끼어들 수 있도록 판을 만들겠습니다.”
“좋네요. 역시 황 부사장님의 시원스러운 대답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황준엽 부사장은 굳이 저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비록 무능하다는 소문이 파다한 안재운이지만 그가 오성 그룹의 황태자란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안재운은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준엽 부사장은 솔직히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안재운의 인정을 받는다면 오성 전자의 사장을 넘어서 그 이상도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기회야.’
* * *
황준엽 부사장은 안재운과의 만남 이후에 이번 일에 어떻게 관여할까 고민하다가 간단한 대안을 떠올렸다.
이창명 이사를 압박하는 것이다.
설사 이창명 이사가 안재운을 쉬운 상대로 본다고 해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즉 이창명 이사가 서두르다가 실수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안재운이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관심을 둔다는 입소문이 갑자기 오성 전자 내에 돌았다.
오성 전자 내부에서도 계속 말이 나오자 언론도 안재운의 행보를 두고 이번 일에 관심을 뒀다.
위성방송을 둘러싼 갈등이 서서히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 사태가 시간이 갈수록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오큘러스 프로젝트가 돈이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언론사 역시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콘텐츠 사업자이기에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디지털 위성에 관한 기대 기사가 나오기가 무섭게 생뚱맞은 기사도 나왔다.
[디지털 위성 사업 이권을 둘러싼 갈등이 드디어 표면화되는가?]
요즘 MP3 관련 특허 모으기에 단단히 재미를 붙인 임기석 부장은 회의실을 나서면서도 후끈 달아오른 위성방송 관련 기사를 읽었다.
‘진짜 끝내주네.’
아니 이제 좀 위성 사업이 되는가 싶었는데, 그걸 둘러싸고 또 내부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동호 교수와의 공동 연구, 그리고 송한성 교수에 대해서 잘 알았다. 최민혁 실장이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 몰라도 어느 정도 상황 파악 정도는 했다.
그러니 오큘러스 프로젝트 관련 기사의 깊은 내면에 감춰진 진실을 읽었다.
‘또 최 실장님인가?’
심지어 기사엔 오성 전자와 ETRI 사이의 소송 문제 이야기도 나왔다.
소송한다는 것이 아니라 소송이 일어날 정도로 첨예한 갈등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최 실장님이구나.’
둘 사이의 복잡한 문제는 몰라도 돌아가는 정황만 보고서도 최민혁 실장이 두 세력 간에 이간질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를 챘다.
MP3 사업 기획을 담당한 박상기 차장은 기획팀과 미팅 보고서를 정리하면서 툴툴거렸다.
“뭘 그렇게 재미있게 봅니까?”
“아, 오성 전자랑 ETRI가 재미있게 싸우는 것 같아서요.”
“설마 둘 다 긴밀한 사이인데, 기사처럼 싸울까요? 기자가 너무 도를 넘은 것 같습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보통신부는 정부 기관입니다. 아무리 오성 전자의 파워가 대단하다고 해도 대놓고 정부 기관과 대립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 다른 아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박상기 차장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그는 임기석 부장이 외부 특허를 관리하기 때문에 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해서 계속 물고 늘어졌다.
피곤한 임기석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인데, 이제는 굳이 비밀로 할 이유가 없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 연구 팀의 결과가 많이 반영되어 있어요. 특히 특허가 꽤 많죠.”
“네? 정말입니까?!”
박상기 차장도 이번 일에 대해서 흥미롭게 지켜봤기에 깜짝 놀랐다.
임기석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지 않고야 오큘러스 프로젝트 결과는 말이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지인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로는 쓰레기였던 결과물이 지금은 금이 되었다고 합니다.”
박상기 차장은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곤 임기석 부장과 동행한 채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