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천선구 과장은 과연 자신이 오성 전자 연구소 한구석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런데 김현우 수석 부장이 갑자기 나타나서 ETRI 위성방송 사업에 대한 소송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내막을 듣고 나서는 혀를 찼다.
“ETRI와의 갈등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ETRI를 상대로 소송하는 일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이 그걸 모르지 않았다. 아니, 그는 이창명 이사에게 당한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분명히 날 이용해서 토사구팽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정식 소송이 진행되면 그렇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관은 없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면 큰일 아닙니까?”
김현우 수석 부장은 집요한 최민혁 실장을 떠올리면서 이를 갈았다.
“다시 말하지만, ETRI와 싸우는 척하는 것이 핵심이야. 실상 위성방송 사업은 정보통신부도 관련되어 있고, 정부 정책 사업 중의 하나야. 그런 점을 잘만 활용하면 얻는 것이 많아.”
천선구 과장은 KM전자 STB 사업부에 있을 때, 비슷한 경험을 많이 했기에 그제야 김현우 수석 부장의 의도를 알아챘다.
“하긴 정보통신부와 ETRI를 잘만 활용해도 공동 프로젝트 하나는 얼마든지 따올 수 있으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 반대로 이번 위성 사업을 잘못 건드려서 자극했다가는 오히려 정보통신부 인사에게 찍히니까.”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천선구 과장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당연히 조심하겠습니다. 오성 그룹 윗선에 압력을 넣고도 남을 자들이니.”
“그러니 상대편에도 적당한 소송이라는 점을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밝혀. 갈등 분위기를 잘만 조성하면 그것을 빌미로 우리 입지도 강화시킬 수가 있잖아. 기회가 생기면 이번 위성 사업에도 숟가락을 얹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천 과장, 잘 생각해 봐. 이번 위성 방송 사업은 엮여 있는 것이 많아. 잘만 해결한다면 ETRI나 정보통신부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그런 시각에서 봐야 해. 그러니 소송에만 집착하지 마.”
그는 김현우 수석 부장의 잔머리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쇼만 하는 정도라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다만 저는 내막을 잘 몰라서 말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연루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증거도 확실치 않습니다.”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천선구 과장의 모습에 김현우 수석 부장이 피식 웃었다.
“내가 이일태 이사 만나서 최민혁 실장이 어느 정도 엮여 있는지 상황 파악을 해볼 테니, 너무 불안해하지 마. 최 실장이 쓴 꼼수만 알면 이번 일로 제대로 보복할 수 있으니까.”
“…네.”
천선구 과장은 김현우 수석 부장의 말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망해 버린 위성 사업에 적당히 끼어들어서 이익을 보려는 김현우 수석 부장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하긴 지금은 이런 일이라도 해야 해.’
* * *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일태 이사에게 연락해서 서울의 한 고급 한정식집에서 만났다.
이일태 이사는 이전과는 또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장승일 실장 통해서 연락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것 때문에 크게 당황했다.
장승일 실장의 행동은 이랬다가 저랬다 들쭉날쭉했고, 기준도 없었다.
더 황당한 것은 전혀 반응이 없다는 거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술 한 잔을 마신 후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일 거야. KM 그룹 역시 이 사업에 꽤 관심이 있으니까. 아니, 사실 그 이상이라고 봐야지.”
“그런데 왜 저에게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애매하잖아. 위성 사업부는 수신기 쪽에만 집중하니까. ETRI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잘 모르는 자네와 이야기해 봐야 골치가 아플 거야.”
“하.”
내심 욕설을 퍼부은 이일태 이사는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자기 일이 ETRI와 관련이 있는지 몰랐다.
문득 자신이 관리하던 위성 사업부가 떠올랐다.
위성 수신기와 유선 STB는 어떻게 보면 TV 사업부와 맥을 같이 했다. KM 전자에 두 가지 사업부가 있던 이유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STB 사업부를 일방적으로 매각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STB 사업부를 매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지난 일이야.”
하지만 김현우 수석 부장은 뒤늦게 STB 사업부를 매각한 것을 후회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창명 이사 같은 사이코 밑에서 병신 같은 짓을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니, 새삼 최민혁 실장에 대한 원한이 다시 떠올렸고, 이를 악물었다.
이일태 이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하면 지금 ETRI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또 뭡니까?”
김현우 수석 부장도 절박한 상황이라서 이일태 이사에게 오큘러스 프로젝트 관련된 안건을 말해주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위성 STB(위성 수신기)와 관련이 있는 사업으로 자네 역시 들어는 봤을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위성 수신기 쪽만 팠습니다. 시스템 쪽은 ETRI 측에서도 저희 쪽에 제대로 정보를 넘기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긴 그럴 수도 있어.”
답답한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일태 이사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KM 전자가 가지는 위치 때문에 ETRI도 냉대했다.
ETRI는 오성, HY 전자 같은 대기업을 주도 상대하는 곳이였다.
그러니 KM 전자를 괄시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주는 것만 받아먹으란 식이었던 것이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일태 이사가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을 깨닫자 한숨을 내쉰 채 일단 자신이 조사한 것과 추론한 것을 말해주었다.
설명이 진행될수록 이일태 이사는 황당한 얼굴로 멍하니 듣기만 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ETRI의 위성 사업을 총책임진 박재호 실장이 사임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 이미 이것 때문에 기사가 나올 정도니까. 현재 이번 일 때문에 우리 오성 전자도…….”
이일태 이사도 오성 전자 내의 복잡한 내부 갈등 이야기에 굳은 얼굴을 한 채 듣기만 했다.
그도 장승일 실장이 왜 자신을 냉대하는지 몰랐는데, 뒤늦게야 상황을 알아챘다.
“자, 잠깐만요. 그, 그러면 오큘러스 프로젝트대로 상황이 바뀐다면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잖아. 오성 전자도 다를 것이 없어. 이것 때문에 난리가 났으니까.”
“하, 하지만 우리 사업부는 오성 전자와는 또 상황이 다릅니다. 오직 수신기 하나에만 매달렸는데, 이제는 완전히 아웃되게 생겼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말해주고 있잖아.”
이일태 이사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아, 아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잔뜩 화가 난 이일태 이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정보를 얻으러 왔다가 오히려 정보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 참담했다. 하지만 그도 곧 기발한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기다려 봐. 일단 ETRI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예정인데, 자네 사업부가 손실 난 것을 이용해서 같이 소송하는 방법도 있어.”
“하, 하지만 괜히 ETRI에 소송을 걸었다가…….”
물론 승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마냥 ETRI 탓만 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박재호 실장이 이창명 이사와 같이 엮여 있는 것이었다.
즉 오성 전자도 책임을 일부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이미 소송 검토 항목을 본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일단 내 말만 믿고 시키는 대로 해. 아, 그리고 괜히 회사에서 문제를 만들지 말고, 죽은 듯이 있어. 지금 상황이 복잡해서 꼬이면 진짜 답 없어.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장 실장에게 완전히 찍힐 수도 있어.”
“아,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최 실장이 괴롭히면 일절 답변도 하지 마.”
이번에 징계를 당한 이일태 이사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최근 최민혁 실장에게 당한 일을 떠올리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최민혁 실장이 무슨 짓을 해도 반응하지 못할 상황이니, 억장이 무너졌다. 그렇다고 김현우 수석 부장의 제안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상무님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고.”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일태 이사와 술자리를 같이하면서 머리를 계속 굴렸다. 비록 필요한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잘하면 KM 전자 같은 기업을 모아서 사건을 재미있게 연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아, 이일태 이 친구를 잘 활용해서 소송을 한 번 제대로 검토하면 더 나은 대안이 올 것 같아. 이 정도 정보라면 천 과장이 알아서 잘할 거야.’
* * *
천선구 과장은 이창명 이사 시선을 의식해서 오성 전자 법무 팀이 아니라 오성 전자와의 소송을 통해서 알게 된 대원 법률 사무소 측에 연락했다.
다행히 그쪽에서는 김현우 수석 부장을 잘 알아서 이번 일을 받아들였다.
오성 전자와 소송하는 것이면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하는 척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다.
대원 법률 사무소는 오성 전자를 대리해서 ETRI 측 법무 팀과 만나서 정식으로 소송하기에 앞서서 사전 조율로 만났다.
여기서 당장 나온 안건은 바로 오성 전자의 시스템 사업부에서 개발한 수신기 칩이다.
위성 시스템이 변경되면서 이 칩도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ETRI 측은 오성 전자가 임의대로 수신기 칩을 개발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미 LC 전자 측에서는 공동표준규격 재정과 관련해서 오성 전자가 임의대로 행동해서 항의했고, 이미 기사화까지 된 상황입니다!]
[흥, 그거야 무궁화호 관련해서 이미 ETRI 측에서 다 검증이 끝났다고 한 것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이미 위성방송 시스템에 대한 것은 끝난 사안입니다. 다만 저희가 임의로 변경한 것은 규격 제정과 관련해서 몇 가지를 추가한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오성 전자는 이번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기와 관련해서 보안과 같은 부분에 따로 몇 가지를 추가했을 뿐이다.
이 부분이 ETRI 측에서 개발한 것과는 호환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성 전자는 이것을 빌미로 공동표준규격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실상 오성 전자를 옹호하는 ETRI 연구원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건 박재호 실장이 자기 독단적으로 결정한 일입니다. 이미 그 문제 때문에 박재호 실장은 고발당한 상황입니다.]
이 고발 건에서 오성 전자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원래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던 일도 소송 쟁점이 되면서 횡령과 같은 문제가 하나둘씩 드러났다.
박재호 실장 건은 자칫하면 횡령 문제로 여기에 엮인 오성 전자 직원도 구속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지긋지긋하게 당한 김현우 수석 부장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에 혀를 내둘렀다.
‘뒤에서 별 지랄을 다 했구나. 이따위로 일하니, 다른 대기업에게도 욕먹지.’
애초에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번 일을 키울 생각이 없어서 굳이 더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는 넌지시 이 조율 문제를 대원 변호사 통해서 정보통신부에 다시 흘렸다.
* * *
이번 위성방송 사업은 처음부터 정보통신부도 슬쩍 물러나서 지켜만 봤다.
다만 오현종 박사를 통해서 정보를 얻고 나서는 태도를 바꾸어서 이번 위성 사업에 적극 나섰다.
정보통신부 정보통신 정책실은 이 문제 때문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잘만 홍보를 이끌어간다면 정부 정책 홍보에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예민해 있던 정보통신 정책실에 갑자기 ETRI 소송이란 폭탄이 떨어지자 크게 당황했다.
이원한 실장에게 한 소리 들은 박성환 팀장도 어떤 미친놈이 황당한 짓을 저질렀는지 바로 알아보았다. 오성 전자가 ETRI를 상대로 이번 위성 개발과 관련해서 소송 준비(?) 중이라는 정보를 파악했다.
그는 황당해서 이 안건을 이원한 실장에게 보고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이원한 실장은 길길이 날뛰었고, 오성 전자 황준엽 부사장을 직접 만나서 따로 경고했다.
“요즘 오성 전자도 우리 정보통신부를 아주 우습게 보나 봅니다.”
“……?”
황준엽 부사장은 황당한 이야기에 기가 막혀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부 사장님은 정말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모른 척하시는 겁니까?”
“저는 정말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이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도 오성 전자에 대해서 불만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이번 일이 빌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부와 오성 전자의 관계에는 늘 문제가 있었다.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다만 이번 ETRI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오성 전자가 깽판을 친다면 상황이 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