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23화 (223/1,021)

#223.

“오성 전자가 쉽게 안 물러나겠네.”

“네. 그게 문제일 겁니다.”

“하.”

김현탁 본부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깡그리 잊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번 사업에 끼어들까만 고민했다.

아니, 그의 욕망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아, 씨발, 분명히 방법이 있을 거야. 이번 일만 제대로 끝내면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후계 구도에서 한 걸음 앞서 나가. 오성 전자라도 싸울 수밖에 없어!’

* * *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한영 일보 일 면을 통해서 정식으로 알려졌다.

[디지털 위성방송 시대가 시작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위성방송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사였다.

특히 이 기사에서 주로 다룬 것은 다채널 장점이 있는 디지털 위성방송에 대한 것이다.

[최근 방송 분야는 디지털 시대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접해 있습니다. 이에 대응해서 정보통신부는 지금까지 3,00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투자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 과실이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통해서 빛을 발했습니다.]

그리고 통합 방송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것도 언급했다.

단순히 선동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 여기에는 구체적인 기술과 방향성에 대해서 명확히 예제를 들었다.

특히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세계 최초라는 미국 디지털 방송보다 더 발전되었다는 점을 피력했다.

다만 좀 웃기는 사실은 일 면 사진으로 나온 것은 최민혁이 ETRI 실무진을 상대로 장관 코스프레 하는 장면이라는 것이었다.

기사 내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진.

사진 하단부에는 최민혁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민혁 실장은 뭐지?

-아, IFA 연설로 유명한 최민혁 실장이잖아. 가만 그런데 이 일에는 왜 언급되는 걸까?

기사 내용 중에는 단 한 마디도 최민혁 실장을 언급하지 않았다.

기자가 사진을 잘못 붙인 것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이 기사를 본 이들은 잘못 붙인 사진보다도 기사 내용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거 정말인가?

-기사 내용을 봐서는 그럴듯하기는 한데, 너무 과장된 것 같아.

-무궁화 위성은 언제 쏘는 거야. 디지털 방송은 하기는 하는 건가?

물론 여전히 부정적인 사람은 진행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ETRI와 같은 정부 연구 기관이 얼마나 맹탕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궁화 위성 발사 이슈와 엮여서 이 기사는 큰 이슈가 되었다. 다른 언론사에서도 뒤늦게 디지털 위성방송에 대해 기사화했다.

최민혁으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 한 기사라서 어이가 없었다.

사진을 찍었으면 이와 관련된 기사를 쓰던지, 그것도 아니면 사진에서 최민혁을 빼서 기사와 맞추든지 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 기사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묘한 기사였다.

‘별 쓸데없는 기사를 다 쓰고 난리야.’

괜히 자기 사진이 올라간 것이 신경이 쓰였다.

이번 일에 자기가 관여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불편했기 때문이다.

‘아니, 차라리 나을 수도 있어. 이런 기사를 이창명 이사가 본다면 길길이 날뛸 거야. 이 친구가 제대로 설치면 괜찮은 가격에 내 지분을 팔아치울 수 있을 텐데…….’

* * *

푸념을 털어놓는 최민혁과는 달리 디지털 위성방송 이슈를 선점하려고 했던 이는 다름 아닌 이창명 이사였다.

그는 자기 대신 최민혁이 기사를 탄 것에 분노했고, 사무실에서 분노의 함성을 터뜨리면서 길길이 날뛰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사무실 책상을 뒤엎었고, 안국호 부장을 괴롭혔다.

“이 새끼야, 뒤져!”

안국호 부장은 골프채로 맞으면서도 반항하지 못했다.

늘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미친놈의 행동을 지켜보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눈치를 보다가 이창명 이사의 흥분이 가라앉자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이사님, 일단 소송부터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최민혁 실장에게 당한 분노로 미쳐 있던 이창명 이사가 버럭 소리쳤다.

“야, 돼지야, 이게 소송한다고 해결될 문제야?!”

“그게…….”

“이 병신아, 너 같은 쓰레기가 생각하는 것은 뻔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것 아냐!”

갖은 모욕과 독설은 보통 사람이 들었다면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심각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입술에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문 채 참았다.

하지만 그는 이 기회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최민혁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이창명 이사의 인정을 받아야 했다.

“이사님, 어차피 소송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ETRI가 우리 오성 전자를 병신 취급할 겁니다. 설마 그걸 두고 보실 겁니까?”

“돼지 새끼야, 너 죽을래?”

거듭되는 독설에 모멸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김현우 수석 부장은 참고 또 참았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돼지 같은 덩치와는 달리 차분한 음성으로 자신의 의사를 반복해서 말했다.

“대신 얻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이제까지 진행한 일에 대한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대화가 된다고 확신하자 김현우 수석 부장은 설득에 들어갔다.

“제가 ETRI 측을 통해서 알아본 바로는 DL 정보통신의 김현탁 본부장이 이번 일에 나섰다고 합니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다른 기업도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 소송을 걸어서 우리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합니다.”

이창명 이사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물러난다면 자칫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거기다 시간이 지나서 책임 유무를 따질 때 큰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의 주장처럼 뭔가 하기는 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안국호 부장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가 다시 김현우 수석 부장에게 말했다.

“…자세히 말해봐.”

“일단 소송을 걸게 되면, 기존 권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수신기 칩과 관련된 부분에서도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걸 빌미로 다른 부분에 권리를 확장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다른 기업도 우리 눈치를 보게 될 겁니다.”

비록 오성 전자가 먼저 나서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두 회사 계약서상에 사양 변경에 따른 조항도 있었다.

억지이기는 하지만 이 계약서를 빌미로 ETRI를 압박한다면 ETRI도 마냥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

소송에서 여전히 ETRI가 유리하다고 해도 만약 대법원까지 가서 소송이 늘어진다면 지금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중단될 수도 있다.

분노를 가라앉힌 이창명 이사도 그제야 정색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가 이제까지 투자한 것이 있으니, 당연한 주장이군.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이번 사업에 욕심을 부리는 DL 정보통신 같은 이들도 한 걸음 물러날 겁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 권리를 챙기면 됩니다.”

“호.”

이창명 이사도 그제야 수긍했다. 그는 멍하니 고민에 빠진 안국호 부장을 짜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국호 부장은 무서운 눈으로 김현우 수석 부장을 쳐다보았다.

이번 일을 빌미로 김현우 수석 부장이 이창명 이사에게 접근하려고 한 것을 깨달았다.

‘저 새끼가.’

하지만 김현우 수석 부장은 마치 그런 시선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이번 일과는 별개로 솔직히 최민혁 실장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이번 프로젝트에 투자한 부분에서 확보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걸 보장받는다면 여러 가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고, 최민혁 실장 뜻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일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창명 이사도 김현우 수석 부장의 합리적인 주장에 고민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그 개같은 최민혁 실장 새끼를 엿 먹일 수 있다는 점에 만족했다.

물론 김현우 수석 부장의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일에 대한 처리다. 어떻게 해서라도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몽땅 뒤집어쓰고 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아무리 회장의 서자라고 해도 오성 전자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았다.

‘경영 기획실의 안재운 그 새끼가 이번 일을 빌미로 나서려고 할 수도 있어. 안 그래도 오성 전자에 적응 못 해서 일본으로 유학 간다는 소리가 있는데 이걸 빌미로 내세워서 사내에 남으려고 할 수도 있어. 그렇게 둘 수는 없어!’

안건민 회장의 장남 안재운은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에 오성 전자 경영 기획실에 입사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경영 기획실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안재운의 이런 행보는 어지간한 기업 재벌 3세와는 달라서 알게 모르게 사내에서도 말이 돌았다. 특히 최민혁 실장이 독보적인 명성을 떨치면서 더 뒤에서 말이 나왔다. 오성 그룹에서 워낙에 철저하게 정보를 관리해서 외부에 돌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이창명 이사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안건민 회장에게 제대로 인정을 받아서 위로 쭉쭉 올라가면 비록 서자라는 한계가 있지만, 오성 그룹 계열사 하나 정도는 챙길 수가 있다고 봤다.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처럼 말이다.

무려 1조가 넘는 주식을 증여받은 최민혁의 행보는 그의 롤 모델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최민혁 실장을 떠올리자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생각할수록 화가 다 나네.’

이창명 이사는 시기, 질투, 분노와 같은 감정 때문에 한동안 부들부들 떨었다.

만약 김현우 수석 부장이 나서서 일을 더 키운다면 나쁘지 않았다.

‘가만 소송을 이용해서 일이 잘되면 그걸로 좋고, 최악의 상황에 잘만하면 김 수석 이놈에게 다 뒤집어씌울 수도 있잖아.’

물론 지금 이대로는 곤란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이 이 일에 깊이 연루되어야 했다.

“좋아. 그거 좋은 방법이네. 자신 있어?”

“물론입니다. 제가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아니, 이번 일을 잘 끝낼 수 있습니다.”

이창명 이사는 김현우 수석 부장을 띄우는 척하다가 슬그머니 한 가지 점을 지적했다.

“이번 일은 오성 전자 내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므로 자칫 문제가 커지면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건…….”

김현우 수석 부장은 차가운 이창명 이사 눈빛을 보자 그의 속셈을 금방 읽었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이번이 기회야.’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습니다.”

“좋아. 김 수석이 모든 일을 책임지고, 작품을 한 번 만들어봐.”

“감사합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김현우 수석 부장은 곧 이사실을 나갔다.

안국호 부장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김 수석을 믿으시는 겁니까?”

“믿을 리가 없잖아.”

“네?”

분노의 화신 코스프레를 하던 이창명 이사의 안색은 마치 로맨스 영화의 주연을 연기한 것처럼 어느 샌가 평소처럼 바뀌었다.

“아니, 생각을 해봐. 김현우 수석 부장이 위성 사업을 나서서 책임지겠다고 하잖아. 그러니 나는 지켜볼 수밖에 없어.”

안국호 부장도 그제야 슬쩍 욕심냈다.

“하지만 저도…….”

“만약 일이 잘못되면 안국호 부장이 전적으로 책임질 거야? 자칫하면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는데, 그래도 해보겠다는 거야?”

“네?!”

깜짝 놀란 안국호 부장.

이창명 이사는 냉혹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입은 손실만 해도 수백억은 넘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냐. 그냥 말로만 가볍게 띄우고 넘어갈 거야? 권태성 기획실장뿐만 아니라 황준엽 부사장도 틈만 나면 날 쳐내려고 하는 것을 알면서 그래?”

권태성 기획실장도 이창명 이사를 싫어하지만 황준엽 부사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성 전자 내에서 이창명 이사를 진심으로 따르는 이는 손으로 꼽았다.

소름 돋는 말에 안국호 부장은 입을 딱 벌린 채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는 이창명 이사가 희생양을 찾는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창명 이사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우리가 이제까지 한 일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불안하면 안 부장이 김 수석 행동을 살펴봐.”

“…알겠습니다.”

* * *

천선구 과장은 사업부가 해체된 후에 불안한 나날을 보냈지만 다른 대안이 없어서 지금까지 김현우 수석 부장만 믿고 버텼다.

김현우 수석 부장이 이창명 이사의 인정을 받은 후에 천선구 과장은 김현우 수석 부장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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