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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22화 (222/1,021)

#222.

하지만 위성방송 서비스가 늦어진 본질적인 문제는 수신기 제조업체가 제대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이다. 그들은 위성방송이 가능해진 후에도 성능이 떨어지는 수신기를 내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건 수신기 업체도 할 말이 많았다. ETRI에서 내놓은 위성방송 시스템 자체 성능이 너무 떨어져서 제대로 된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방송사 나름대로 콘텐츠를 공급하고 싶어도 쉽지가 않았다.

제대로 성능이 나오지 않는 디지털 위성방송 시스템에 자사의 컨텐츠를 먼저 들이대고 싶은 업체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디지털 위성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잡음도 문제였다.

정부는 대기업을 배제했는데, 대기업은 끝까지 로비를 해왔다.

물론 대기업은 눈치껏 ETRI 위성방송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자 발을 뺐었다.

그런데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최민혁의 인생 1회차 때의 시스템과는 그 격이 달랐다.

쉽게 말해서 돈이 되는 상업화 시스템이라는 거다.

이창명 이사는 이런 내막을 전혀 알 수가 없어서 박재호 실장을 쳐다보았다.

“박 실장님, 저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창피스러워서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박재호 실장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해왔던 실적을 통째로 빼앗긴 것에 분개했다.

비록 자신 때문에 망할 예정이었던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해도 배 선장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같은.’

이창명 이사는 자기 질문을 대답하지 않는 박재호 실장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박 실장, 당신도 내 말이 우스워?”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재호 실장은 다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 실은…….”

박재호 실장은 오현종 박사가 말하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그래서 이 자리에서 이창명 이사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짜증스러운 이창명 이사는 안국호 부장을 쳐다보았다.

안국호 부장도 자세한 것은 몰랐다.

“…아마 저희가 했던 공동 표준안은 다 의미가 없어질 겁니다.”

“그 정도면 큰 문제가 아니잖아?”

“아, 그게 샘플로 이미 사전에 제작한 디코더는… 아마 다시 다 제작해야 할 겁니다.”

“수량이 많지 않을 텐데?”

“…그게 좀 됩니다.”

정확히는 초도 물량으로 대략 10만 대 가까이 만들었다. 위성방송 유료 가입자를 상대로 선점하기 위해서 무리한 것이다.

70만 가입자를 감안해서 나온 숫자이기도 했다.

안국호 부장은 이 모든 일이 최민혁 실장을 죽이기 위해서 이창명 이사가 무리한 지시를 내려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10만 대라.”

큰 충격을 받은 이창명 이사도 넋을 잃은 채 안국호 부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지시를 뒤늦게 떠올렸다. 그 당시 최민혁 실장 보복에 미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많은 사람이 반대했음에도 디코더 시장 장악을 위해서 손실도 감수한 채 무리한 결과였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었다.

바로 LC 전자를 비롯한 대운 전자도 협상을 통해서 오성 전자의 공동 표준을 따르는 것으로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 발표회에 참석한 LC 전자, 대운 전자, HY 전자 실무진은 섬뜩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결국 이창명 이사의 분노가 폭발했다.

[아, 정말 미치겠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ETRI 저놈들 멋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고? 아니, 이 정도 규모면 저놈들이 바꾸어야 할 것 아냐?!!]

울분에 가득한 소리는 발표회장 전체를 뒤흔들 정도였다.

김문호 박사가 깜짝 놀라서 주춤했다.

발표회에 참여한 이들이 다들 이창명 이사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심지어 꼴좋다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오현종 팀장은 김문호 박사를 대신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답했다.

[저희도 바꾸고 싶어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방식대로 진행하면 천문학적인 비용의 소송이 걸리니 문제입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라이센스 문제가 아닙니다. 이 새로운 오큘러스 시스템은 기존의 모든 점을 다 해결해 줍니다.]

딱 찍어서 오성 전자의 디코더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이제는 순순히 오현종 팀장 말에 찬성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오현종 팀장은 확신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이전 시스템으로 작업한다면 디코드 문제 때문에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기까지 몇 년이나 더 걸릴 겁니다. 그 비용을 고려하면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맞는 소리야.

-오 박사, 자네가 했던 말과 비슷하네.

-내가 귀가 따갑도록 말해도 다 씹었잖아. 이 쓰레기 시스템으로 작업하면 우리 ETRI만 중간에 끼어서 박살 난다고, 그놈의 정부 눈치를 보지 말자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들었잖아.

-박재호 실장 문제가 많았지. 그 양반 때문에 이 모양이 된 것이니까.

몇 사람이 시작한 불만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발표회장에 참석한 연구원 귀에도 들어갔다. 각자 알아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자 박재호 실장 횡포에 입을 다물었던 이들도 한마디씩 했다.

결국 모든 책임은 박재호 실장으로 귀결되었다.

기회가 생기면 나서려고 했던 박재호 실장은 아예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이 자리에서 나섰다가 박살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현종 팀장은 차가운 눈으로 이창명 이사와 그 옆에 앉은 박재호 실장을 쳐다보면서 일축했다.

[아마 정보통신부에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니까. 따라서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지금은 오큘러스가 최고의 대안입니다!]

수정된 시스템의 소유가 누구인지는 오현종 팀장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어물쩍 ETRI 연구원이 힘을 합쳐서 위기를 타개했다는 말만 했다.

“……!”

이창명 이사는 그제야 기술 따위는 몰라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살기가 가득한 시선으로 박재호 시선과 안국호 부장을 교대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얼굴을 푹 숙인 채 차마 이창명 이사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했다.

이창명 이사는 따가운 주변 시선에 이를 악물었다. 괜한 소리를 해서 본전은 고사하고, 완전히 동물원 구경거리가 된 것에 대해 화가 났다.

이미 이번 일은 끝났다는 것을 깨닫자 뒤늦게 딱 자기 자리 건너편에 앉아 있는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서 총알을 쐈다.

탕.

그리고 총알 연기를 불면서 히죽 웃었다.

마치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느긋한 태도.

이창명 이사도 이번 일의 원흉이 누구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저 개새끼 짓이구나.’

이창명 이사도 이일태 이사를 통해서 KM 전자에 어떻게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설마 ETRI에서 제대로 뒤통수를 맞을지는 상상도 못 했다.

회의실에 가득한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분통을 터뜨리지 못한 채 꾹 참았다.

“안 팀장, 우리 손해가 얼마야?”

“그게…….”

식은땀마저 흘리면서 안절부절못하는 안국호 부장은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공동 표준이 다 날아가면 오성 전자에서 했던 모든 연구는 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

이제까지 최민혁을 압박하기 위해서 쓴 비용은 여기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했다.

“빌어먹을.”

이창명 이사는 결국 주변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발표회장을 나가고 말았다.

* * *

발표회가 끝난 후에 최민혁은 마치 자신이 정보통신부 장관인 것처럼 이번 연구를 주도한 실무진과 관련자들과 같이 악수를 하였다.

그들은 마치 대통령을 앞에 둔 것처럼 정중하기만 했다.

내막을 잘 모르는 이들도 이번 발표회 주도권을 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들 알아서 최민혁 실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골 때리네.’

이미 최민혁 실장이 뭔가 꾸민다는 것을 알았지만 드러난 결과는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뒤늦게 발표회장을 참석해서 발표장 분위기를 살피던 김현탁 본부장은 이창명 이사가 개쪽을 당한 채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상상을 초월한 오큘러스 발표회장을 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미 DL 정보통신은 DL 그룹 기획조정실의 도움을 얻어서 이번 위성방송 시스템의 문제점을 다시 파악했다.

대체로 봐서 ETRI 방송 시스템의 수준 문제 때문에 비관적으로 봤다. 거기에 정보통신부의 소극적인 대응도 문제다.

통합 방송법 문제 하나도 쉽게 해결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뀐 것이다.

김현탁 본부장은 순간 최민혁 실장과 눈빛을 부딪치고 난 후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차장에 세워 둔 차량에 올라탔고, 조금 전의 발표회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디지털 위성방송과 관련된 모든 일이 원점에서 다시 재검토되고 있었다.

거기다 발표회엔 정보통신부 실무진이 직접 찾아와서 진지한 얼굴로 경청했다.

그 이야기는 저게 단순히 와서 구경하는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설마 정보통신부가 진짜 디지털 위성 사업을 제대로 밀지는 않겠지?”

조사 파일을 빠르게 살피던 박태정 부장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DL 정보통신 기획실에서 검토했던 모든 가정이 다 조사한 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이봐, 박 부장, 내가 지금 자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잖아. 이창명 이사도 몽둥이찜질을 당한 개처럼 쫓겨났잖아. 그러니 그냥 사실대로만 말해.”

“…저희가 조사한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직 오큘러스 프로젝트 성과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다만 오현종 팀장이 주장한 것과 같다면 앞으로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겁니다.”

“디코더, 아니 위성 수신기도 더 효율적으로 바뀌면 상업적인 가치가 있다는 소리야?”

“네. 그렇게 된다면 방송국의 대응도 달라질 겁니다. 그들 역시 디지털 방송에 대한 투자를 계속해왔으니까요. 현재 국내 위성방송 가입자 수요도 나쁘지 않은 상황이니, 위성방송이 생각보다는 더 빨리 유료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대략 위성방송 매출이 얼마 정도 될까?”

“대략 1조 가까운 시장이 열릴 겁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큘러스를 솔루션으로 팔 수도 있습니다. 중동이나 동아시아 쪽만 서비스해도 의미가 있습니다.”

위성 솔루션은 다른 전자 제품과는 여러 가지 부분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 기업의 혁신을 내포하는 의미도 있다. 아무래도 냉장고 만들어서 파는 것보다는 위성방송 시스템을 파는 것이 더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곧 기업 상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이것은 DL 그룹 김상구 회장이 사장단 회의뿐만 아니라 집에서 가족끼리 식사할 때도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하던 것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김현탁 본부장은 속이 타들어가자 냉수 한 병을 다 그 자리에서 마셨다.

지금은 이번 일을 꾸민 것이 최민혁 실장이든, 아니든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그 자체가 중요했다.

‘이거 내가 먹어야 한다!’

일단 냉정하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체크했다.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이 당장 걸림돌로 떠올랐다.

“최민혁 그 새끼가 깽판 치지 않을까?”

하지만 이미 충분한 선행 조사를 한 박태정 부장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관련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부, 방송사, 컨소시엄, 대기업이 다 엮여 있어서 혼자 다 먹지 못합니다.”

“그렇지. 맞아. 이번 위성 사업 자체가 정보통신부에서 3,000억 넘게 투자한 대형 프로젝트잖아. 그 투자도 끝이 아니고. 대신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오현종 팀장도 저자세인 것 같아.”

하지만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창명 이사다.

오늘 발표회장에서는 개박살이 났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설마 이창명 이사가 ETRI 상대로 소송을 걸지는 않겠지?”

“아마 그럴 수도 있지만, 어차피 협상만 잘되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오현종 팀장도 바보가 아닌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나오지 않을 겁니다. 더욱이 정보통신부가 끼어 있어 알아서 중재가 될 겁니다.”

“그렇지. 그러면 결국 이런저런 문제가 터져도 이 사업은 제대로 굴러간다는 이야기네. 하지만 통합 방송법은 어떻게 될까?”

“그거 역시 지분을 나눠먹는 이들이 각자 로비를 할 겁니다. 그러면 통합 방송법 제정은 올해 안으로도 가능합니다.”

술술 풀리는 상황.

김현탁 본부장도 어이가 없었다.

“하, 이거 장난 아니잖아.”

하지만 그도 이 사업이 진짜 돈이 된다는 것을 알자 오성 전자의 대응을 예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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