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에 대한 원한을 곱씹다가 안면이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바로 이번에 정보통신정책실 위성 담당 팀장을 맡은 박성환 팀장이다.
“아, 박 팀장님,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저 기억하시죠? 오성 전자의 이창명 이사입니다.”
“아, 네.”
박성환 팀장도 몇 번 위성 사업 정책 문제로 이창명 이사를 만난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돈을 제법 받았다.
그래서 이 자리가 부담스러웠다.
‘하필이면 이 새끼야.’
오히려 식은땀을 흘렸다.
그도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오현종 팀장에게 들을 때만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팀 내부에서 추가 조사를 하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급하게 오현종 팀장을 만나서 몇 차례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오 팀장과 이야기를 나눈 후, 이야기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까지는 그저 무궁화 위성 이벤트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황금알을 낳는 또 다른 신사업이었다.
이제까지 박성환 팀장도 백여 개가 넘는 정부 정책과제를 해왔지만 이렇게 탁월한 성과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그 대단하다는 오성 전자도 이 정도까지는 못했다.
K22
그러니 이번 일의 가치를 뒤늦게 발견한 정보통신정책실은 난리가 났다.
결국 그저 요식적인 프로젝트에 불과했던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가치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이제는 정보통신부 장관조차 이 안건은 0순위로 지켜봤다.
정보통신정책실 내부에서 한 때는 KM 전자, 이동호 교수, 송한성 교수를 토사구팽 할 것까지 생각했는데, 뒤늦게 시즈벨이 라이센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확히는 시즈벨 측에서 미국 소송 전에 사전 협박으로 정보통신부를 상대로 넌지시 압박했다.
헛짓하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입을 연 것이다.
이후로 KM 전자에 손대는 것은 깔끔하게 접고 말았다.
결국 이 문제는 정보통신정책실의 새로운 실장인 된 이원한 실장이 직접 챙겼다.
오늘 이 자리에 자신이 나온 것도 이원한 실장의 지시를 받아 오현종 팀장과 면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다.
오현종 팀장이 통합 방송법과 같은 문제에 손을 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성 전자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차세대 교환기와 같은 여러 가지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에는 오성 전자와 같은 자본력이 있는 기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성환 팀장은 이창명 이사에게 간단한 인사치레 후 발을 옮겼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오 팀장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또 찬밥 대우를 받은 이창명 이사는 이제 다 포기해 버렸다.
그가 정말 화가 나는 것은 로비를 받은 놈조차 자신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생각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한바탕하고 싶었지만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 범벅인 박성환 팀장을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다.
‘설마 최 실장, 그 새끼가 정보통신부도 협박한 건가?’
찰칵.
그렇다고 카메라 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 자리에서 박성환 팀장을 압박할 수가 없었다.
‘하,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창명 이사는 왜 최민혁 실장이 우연을 가장해서 기자를 끌어들였는지 뒤늦게 알았다.
범용구 기자도 이창명 이사의 인식 거리 밖에서 계속 카메라를 눌렀다.
찰칵.
“…….”
…찰칵.
범용구 기자도 무시무시한 이창명 이사 시선을 받자 슬쩍 카메라 방향을 단상 쪽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창명 이사는 박성환 팀장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허겁지겁 오현종 팀장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오현종 팀장은 역시나 최민혁 실장을 박성환 팀장에게 소개해 주었다.
처음에는 최민혁에 대해 고작 재벌 3세라고 생각한 박성환 팀장이 최민혁 실장을 무시하나 싶었지만 몇 마디 이야기만 듣고 나더니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해서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이미 오현종 팀장 통해서 사전에 들은 것이 있는지 눈치가 제법 빨랐다.
그 고압적인 정보통신부 팀장급 인사의 인사에 최민혁은 그저 손만 내밀었다.
최민혁은 만족스러웠다.
정보가 약간 샌 것 같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시즈벨이 얼마 전에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미국 법원 소송도 준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정보통신부를 상대로 뭔가 했다는 것까지 알았지만, 굳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시즈벨이 자신보다 훨씬 더 악독하다는 것은 잘 아니까.
그보다는 귀찮게 미주알고주알 떠들지 않아서 더 좋았다.
‘좋네. 아, 진짜 편하다. 시즈벨을 끌어들인 것은 신의 한 수였어.’
“오 팀장님 고생이 많습니다.”
“다 프로젝트를 최대한 좋게 끝내기 위함이라는 점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박성환 팀장은 자신이 잘 나가는 팀장급 공무원이라는 신분도 잊은 최민혁 실장에게 그저 허리를 굽혔다.
[최 실장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작은 소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무궁화 위성 발사를 시작으로 한 디지털 위성방송 서비스는 포장하기에 따라서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일만 잘 끝내면 박성환 팀장도 차관 자리가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지켜보는 이창명 이사는 그 작은 말이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진짜 엿같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 질린 안국호 부장은 눈치껏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몰래 사진을 찍는 범용구 기자를 보자 솔직히 소름이 돋았다.
“야, 안 부장, 너도 내 말 씹냐?”
“아, 아닙니다. 그, 그게 아마도 위성방송 사업 때문일 겁니다. 이전과는 달리 위성 사업이 꽤 돈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저러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왜 정보통신부 실무진이 저따위로 저자세야? 저 새끼 얼마나 고압적인 인물인 줄은 안 부장이 잘 알면서 그래?”
꽤 많은 로비를 한 안국호 부장이 모를 수가 없었다. 단란 주점에 가서 자신을 몸종 취급한 것이 바로 박성환 팀장이기 때문이다.
“그게 좀…….”
다행히 안국호 부장을 살려준 것은 김문호 팀장이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단상에 올라서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대한 발표를 시작했다.
‘살았다.’
* * *
[이번 위성방송 사업과 관련해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많은 업체가 곤란을 경험했고, 지금도 불만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책임진 사람 중의 한 명으로서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발표가 진행될수록 나오는 이야기는 사과와는 많이 달랐다.
김문호 박사 역시 ETRI 내부 알력 문제를 모른다고 해도 얼마나 복잡한지는 잘 알았다.
이제 그 문제는 이미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 성과 발표가 끝나면 자신의 입지는 달라진다.
그의 어깨는 한없이 당당하기만 했다.
실제로 자신의 강점을 내세울 수 있는 새로운 혁신에 대한 말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특히 초기 주파수 추정기와 관련된 새로운 K&M 알고리즘은 기존 알고리즘과는 전혀 다른 성능을 보여주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가장 놀라운 것은 딱 한 가지.
[이 새로운 알고리즘을 이용하면 초기 주파수 추정기를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더 간결하게 꾸밀 수가 있습니다. 저희 연구진이 지금 테스트한 결과로는 대략 67.3% 가까이 줄어듭니다.]
웅성웅성.
생뚱맞은 알고리즘에 이번 연구에 참여한 연구원은 당황했다.
간략하게 진행된 테스트였으니, 추가 테스트를 진행하면 70% 이상 줄어든다는 의미다.
그것은 곧 디코드(위성 STB)를 비롯한 관련 위성 장비 구조가 간단해진다는 의미다.
[맞습니다. 단순히 하드웨어 구조가 간단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차가 줄어들면서 성능 자체가 좋아집니다. 그리고 이런 기술은 이 부분만 적용된 것이 아닙니다.]
프레젠테이션에 나온 위성방송 구조도에서 새로운 기술이 하나둘씩 추가로 들어갔다. 그 덕분에 기존 시스템과 외형적으로 비슷하기는 해도 성능 자체는 그 전과 비교되지 않았다.
[오큘러스 시스템은 세계 최초의 위성방송인 미국 다이렉TV보다 more advanced and stable method(더 발전되고, 안정된 방식)입니다. 특히 노이즈 변화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화면 일그러짐이나 떨림 현상은 200% 이상 보완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시뮬레이션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기간이 너무 짧아서 아직 제대로 테스트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대회의실을 가득 채운 ETRI 연구원 대다수가 흥분했다.
심지어 참다못한 한 연구원이 직접 손을 들어서 질문했다.
[자, 잠깐만, 김 박사님, 지금 발표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설계하는 위성방송 시스템 맞습니까?]
[뼈대는 기존 방식이 맞는데, 내용은 좀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언제 저 많은 작업을 했다는 말입니까?]
김문호 박사 연구 팀은 오직 오큘러스 프로젝트만 충실해서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아니, 오늘 알았지만 말할 정도는 아녔다.
단상 앞에 앉아 있던 오현종 팀장이 대신 마이크를 잡고 일어나서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한 라이센스 문제를 하나씩 말했다.
그는 송한성 교수의 법적 대리인 시즈벨의 소송과 관련된 부분을 언급했다.
[만약 시즈벨이 소송을 걸면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진행됩니다. 따라서 기존에 하던 모든 연구는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오현종 박사를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즈벨은 이미 정보통신부뿐만 아니라 각종 연구소 조사를 마치면서 이곳저곳에 시끄럽게 만들었다.
[맙소사!]
[그래서 시즈벨과 사전 협의를 했습니다.]
물론 오현종 팀장은 베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눈치껏 라이센스 권리자가 누구인지 안 연구원 대다수는 암묵적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다들 비슷한 일을 해왔기에 그런가 싶었다.
이 일에 시즈벨이 끼어든 것을 이제야 안 것이었다.
프로젝트 자체에 대해서도 프로젝트 일정이나 비용 때문에 반박하고 싶은 연구원이 있었지만, 오큘러스의 결과를 보자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래의 시스템과 새롭게 수정된 시스템, 두 시스템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완성도가 높은 오큘러스 시스템으로 갈아타는 것이 최선이었다.
비록 기간이 좀 늘어나겠지만, 어차피 이 프로젝트가 정확히 언제 끝날지 예상하는 연구원은 아무도 없었다.
연구 성격상 적어도 2~3년은 더 걸린다고 봤을 때, 오히려 지금 수정 작업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
결국 남은 문제는 이 새로운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맞추어서 기존에 했던 작업을 다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
[맙소사 그러면 다시 재수정을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까?]
오현종 팀장이 넌지시 말해주었다.
[수정이 좀 많기는 하지만 아예 새로 작업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줄기는 같으니까. 위성 디코더(위성 STB) 역시 인터페이스만 손을 보면 됩니다. 그것 역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이번 일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연구원은 다들 폭탄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발이 심하지 않자 오현종 팀장이 넌지시 말했다.
[다만 이번 일에 관한 책임은 박재호 실장님이 질 겁니다. 이미 ETRI 내부에서도 결정 났고, 정보통신부에서도 암묵적으로 승인한 일입니다. 그리고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오큘러스의 결과 덕분에 정보통신부에서도 이전과는 달리 직접 나설 겁니다. 특히 향후 문제의 소지가 다분한 통합 방송법 제정 역시 가속화될 겁니다.]
실제로 이 자리에 참석한 박성환 팀장은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제야 박성환 팀장을 알아본 ETRI 연구원은 투덜거리면서 더 반발하지 않았다.
이미 여기서 발표하는 내용은 요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통합 방송법 제정이 적극 진행된다는 말은 지금 자신이 하는 프로젝트가 단순히 연구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임을 알아챈 것이기도 했다.
이번 연구에 소극적으로 참여한 연구 팀조차 눈빛이 달라졌다.
‘…야, 이거 장난 아니잖아. 통합 방송법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 * *
최민혁 인생 1회차의 이야기로 무궁화 위성 발사 후에도 디지털 위성방송 서비스는 6년이 지난 후에 가능해진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통합 방송법이 그 한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