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20화 (220/1,021)

#220.

최민혁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범용구 기자에게 말을 높여주었다.

“오늘 발표회를 자세히 살펴보세요. 아마 괜찮은 기사거리가 될 겁니다. 새로운 위성방송 서비스에 관한 이야기니까.”

“위성 서비스라면, 혹시 무궁화 위성하고도 관련된 겁니까?”

“역시 아시는군요.”

“아니, 한국 사람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번 무궁화 위성 발사는 기념비적인 일이라서 광화문에서 대규모 축제까지 열릴 예정인데요.”

실제로 지금 정부에서는 한창 무궁화 위성 발사와 관련해서 여러 채널로 광고 몰이 중이었다. 광화문 축제는 오프라인 행사 중의 하나였다.

그만큼 위성방송 사업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딱 좋았다.

‘정작 위성 궤도 진입 문제 때문에 난리가 나지. 위성 수명이 대폭 줄어들었으니까. 그거 덮는다고 별 쇼를 다 했고.’

최민혁은 위성 사업과 관련된 인생 1회차 기억을 하나둘씩 떠올리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생각보다는 이 일의 파급 효과가 컸다.

그리고 잘만 하면 이번 일을 계기로 ETRI와 정보통신부에도 빚을 지울 수가 있었다.

‘…CDMA는 아직 생각 안 하고 있지만 뭐 또 상황은 모르니까.’

인생 1회차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최민혁 머리를 가득 채웠다.

물론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간과한 일도 하나씩 떠올랐다.

최민혁조차 관심이 없어서 떠올리지 못한 이슈였다.

‘아, 무궁화 위성 궤도 진입에서 문제가 생겨 수명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통합 방송법 때문에 6년이 늦어진 것도 문제구나.’

최민혁은 그제야 왜 오현종 팀장이나 김승구 팀장이 평소에 하지 않는 짓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가 파악한 두 사람은 저런 행동을 보일 사람이 아니다.

공학자 자존심 그 자체인 이들이니까.

‘방송 콘텐츠도 문제가 되겠지. 그 부분은 각 방송사에 지분을 나눠줘야 할 거고, 컨소시엄에 참여한 업체 관리도 문제야. 대기업 자본을 마냥 무시하기 힘든 정부는 위성방송 사업자 컨소시엄에 대해서도 손을 써야 하니까.’

최민혁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위성 사업 지분과 이해관계 당사자를 떠올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돈도 안 되는 일이 생각보다는 복마전이었다.

굳이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만든 인공 태풍 한가운데 있었다.

‘후일 이야기지만 위성 사업 시장은 대략 6천억 정도지만 순이익은 600억이 넘어. 중견 기업, 아니, 대기업에게도 꽤 괜찮은 장사지. 여기까지는 인생 1회차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위성 사업 솔루션까지 판다면 적어도 2~3조 매출은 될 거야. 스카이라이프 업그레이드인가? 상황이 더 복잡해지겠네.’

그는 뒤늦게 진지한 표정으로 오현종 팀장이 소개해 준 다른 연구원과 악수를 하면서 힐끗 이창명 이사를 쳐다보았다.

광견병 걸린 개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창명 이사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마 발표회장이 아니었다면 당장 자신에게 달려들어서 주먹을 휘두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이번에는 많은 사람이 보는 앞이라 이창명 이사가 함부로 몸을 쓰거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ETRI 내에서 소위 실력 있다는 연구원 앞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색은 하지 못하고, 참고만 있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나.

범용구 기자도 뒤늦게 분노한 이창명 이사 모습에 눈빛을 반짝였다.

솔직히 전문용어로 범벅될 ETRI 연구 결과물에 대한 기사보다 더 일반인의 시선을 끄는 주제가 바로 오혜정 비서 일로 일약 성추행범 스타가 된 이창명 이사였다.

그는 눈치 빠르게 다시 최민혁 실장과 이창명 이사를 교대로 쳐다보았다.

‘뭔가 있구나.’

같이 간 최광수 기자 역시 최민혁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살폈다.

지난 마약 폭로 사건과 더불어서 일약 주목을 받은 최민혁. 비록 시간이 지나서 그 일이 묻혔다고 해도 무시할 일은 아니다.

‘이거 대박이다.’

* * *

이창명 이사도 어지간해서는 최민혁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눈을 반짝이는 기자 두 사람을 보자 이를 악문 채 오현종 팀장에게 다가갔다.

범용구 기자는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들어서 그 장면을 찍었다.

오현종 팀장은 이창명 이사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최민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위성 방송 시스템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록 위성 방송 시스템 수정이 끝난 것이 얼마 전이지만 앞으로 남은 일에 비하면 시작도 안 한 셈이다.

심지어 아직 몇 가지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창명 이사가 결국 오현종 팀장 손을 잡았다.

“잠깐만. 제가 이창명 이사입니다.”

오현종 팀장도 그제야 이창명 이사가 다가온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오현종 팀장은 이창명 이사를 무시해 버렸다. 그는 애초에 오성 전자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최 실장님과 이야기가 급합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노골적인 무시에 이창명 이사는 순간 다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경기 들린 개 같았지만 카메라를 들이미는 범용구 기자 외에는 다들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찰칵.

“…….”

이창명 이사는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범용구 기자를 쳐다보았다.

범용구 기자도 찔끔해서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이창명 이사는 오현종 팀장을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박 실장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잠깐 그것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박재호 실장 이야기가 나오자 오현종 팀장 표정이 달라졌다.

“아, 그걸로 당신과 이야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미 ETRI 내부에서도 다 조율이 끝났습니다. 노파심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이미 정보통신부에서도 결론이 난 겁니다.”

“저, 정말입니까?”

이번에는 이창명 이사도 깜짝 놀랐다. 여기서 정보통신부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부분은 그쪽에서 신경 끄세요. 이번 발표회 때문에 왔다면, 발표회장으로 그냥 들어가세요. 그것까지 말리지 않을 테니까.”

냉랭하다 못해서 차가운 오현종 팀장.

이런 냉대를 받아본 적이 없는 이창명 이사는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찰칵. 찰칵.

“…….”

하지만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 두 대를 보자 그럴 수가 없었다.

범용구 기자는 아주 작정한 채 카메라 촬영 버튼을 눌렀다.

찰칵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 기자 쓰레기가.)”

이창명 이사는 이를 악문 채 참았다. 바로 코앞에서 최민혁이 쳐다보았다. 이죽거리는 얼굴을 봐서는 아주 웃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니, 근사한 이벤트를 기대한 눈치다.

이미 뜨거운 맛을 봐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이창명 이사는 참고 또 참았다.

가까스로 화를 참은 이창명 이사는 힐끗 안국호 부장을 쳐다보았다.

안국호 부장이 잽싸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다른 것보다 최민혁 실장이 딱 이 시간에 공교롭게 나온 것을 의심했다.

그것도 우연을 가장한 기자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이창명 이사는 주먹을 콱 쥔 채 최민혁 실장을 죽을 듯이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서 발표회장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내심 이창명 주연의 블록버스터 액션 장면을 기대한 최민혁은 혀를 찼다.

‘아쉽네.’

* * *

김승구 팀장은 이창명 이사를 비롯한 불필요한 인원이 다 사라지자 아직도 착잡한 표정을 한 김문호 박사와 의문에 가득한 연구원들의 모습을 보자 슬그머니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었다.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실질적으로 도와준 분이 최민혁 실장님입니다.”

“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김문호 박사만큼은 눈을 크게 뜬 채 김승구 팀장과 오현종 팀장을 교대로 쳐다보았다.

오현종 팀장도 고개를 끄덕이자.

‘맙소사.’

김문호 박사도 뒤늦게야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비밀을 깨닫고는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른 연구원 역시 이제까지 가져온 의문이 풀리자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들도 조금 전의 이창명 이사 모습을 떠올리고는 혀를 내둘렀다. 우르르 몰려가서 모두 최민혁 실장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하하하, 저도 반갑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현종 팀장이 슬쩍 끼어들었다.

“천만에요. 앞으로 많은 부탁을 해야 하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습니까?”

김승구 팀장이 최민혁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번 발표회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방송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해 단체와 협상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 부분에서 최 실장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최민혁도 이미 밝힌 것처럼 이번 일에 더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점을 넌지시 말했다.

특히 인생 1회차에서 위성방송 사업이 겉돌았다는 점을 잘 아는 그로서는 굳이 쓸데없는 진흙탕 싸움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호구처럼 전부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보상은 두둑이 챙겨야지. ETRI에서 뜯어먹을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더 있을 테니까.’

“다만 우리 회사도 이제까지 투자한 바가 적지 않습니다. 일정 부분 이익은 챙겨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다만 이번 오큘러스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정부 지분도 상당해서 자칫하다가 내부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 압니다. 전 일방적으로 요구할 생각 없어요. 그저 저기 이동호 교수님, 송한성 교수님과 같이 서로 좋게 마무리만 하세요. 전 적당히 먹고 떨어질 테니까.”

“…감사합니다.”

오현종 팀장이나 김승구 팀장은 또다시 최민혁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풍스러운 이미지를 통해서 한결 분위기를 살린 정장을 입은 최민혁은 느긋한 얼굴을 한 채 아직도 발표회장 입구에서 안색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창명 이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윙크로 이창명 이사 속을 뒤집어놓은 다음에 천천히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오현종 팀장은 특히 자세를 낮추어 최민혁 옆에서 온갖 아부를 늘어놓았다. 물론 그는 말만 늘어놓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실력 또한 어느 정도 갖춘 오현종 팀장은 성격상 그럴 뿐이다.

최민혁도 딱히 오현종 팀장의 행동을 싫어하지 않았다.

오현종 팀장의 행동 덕분에 따라오는 주변의 시선 때문이다.

오현종 팀장의 환대를 받는 최민혁의 모습.

ETRI 내부에서도 독불장군으로 유명한 김문호 박사 연구 팀이 최민혁을 따르는 모습.

최민혁은 ETRI에서 현직 정보통신부 장관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오늘 발표회에 들어가는 연구원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었다.

[도대체 저 친구는 누구야? 설마 대통령의 아들이라도 되는 거야?]

[최민혁 실장이잖아. 몰라? 항공 마약 사건으로 유명했지. 아, IFA 기조연설로도 유명하잖아. 콜린스를 고안한 KM 전자 오너란 소리도 있으니까.]

[설마 요즘 증권 뉴스 털었다 하면 나오는 그 KM 전자 말하는 거야?]

[그래. 이 친구도 정보가 늦네. 자네가 푹 빠진 오혜정의 보스가 바로 저 최민혁 실장이잖아.]

[뭐야? 오혜정 비서가 모시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고?!]

[쯧, 연구소에 처박혀서 일만 하지 말고, 신문 좀 보고 살아라. 어제 KM 전자 주가가 또 10만 원을 돌파했잖아. 저 친구 증여받은 주식의 가치가 벌써 1조가 넘었다는 소리가 파다해.]

[아, 최민혁 실장, 이제 생각난다. 망해가는 KM 전자를 살려서 대박 터뜨렸다는 그 친구였구나. 아니 그러면 지금 일은 또 뭐야?]

[오현종 팀장의 프로젝트와 무슨 관련이 있나 보지. 또 한 건 터뜨렸을 수도 있고.]

그제야 최민혁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로비에 남아서 아직도 질척이고 있는 이창명 이사만이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악문 채 발표회 회의실로 따라갔다.

‘침착하자. 최 실장 저 새끼가 지금 의도적으로 날 부추기는 거야.’

* * *

이창명 이사는 돌아가는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박재호 실장에게서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단순하게 생각했다.

횡령 정도의 범죄 행위는 전관 변호사만 잘 골라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오히려 박재호 실장에게 목줄을 걸어두면, 앞으로 두고두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재호 실장도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뒤늦게 회의실에 나타났다. 그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해서인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