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황당한 것은 김명준 과장이 진짜 차량 안에서 오혜정 비서 관련 서류를 찾아서 내밀었다는 것이다.
“…….”
이창명 이사는 반사적으로 최민혁이 내민 다양한 성추행 증거들을 확인했다. 실로 어이가 없었다. 아주 작정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설마 사진을 들고 다닐 줄이야. 와, 뭐 이런 새끼가 다 있냐?’
질린 눈으로 최민혁을 다시 쳐다보았다.
딱 봐도 방금 일은 따로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평상시에도 차에 들고 다닐 만큼 아주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다는 셈이다.
그도 이번 일을 통해서 이미 뜨거운 맛(?)을 봤기에 이전처럼 대놓고 흥분하지 않았다. 최민혁의 꼼수에 휘둘리지도 않았다.
“그래, 이번 일은 내가 졌다. 네놈이 이겼어. 하지만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반드시 네놈에게 복수하고 말 테니까.”
최민혁도 딱히 오혜정 비서 일 때문으로만 이창명 이사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최민혁은 KM 그룹의 몰락에 오성 전자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대놓고 압박한 것은 아니지만 교묘한 수법을 사용했다.
그 일을 주도한 사람 중의 한 명이 바로 이창명 이사였다.
‘받은 만큼에 플러스알파 정도까지는 해줘야지.’
그러니 최민혁 말투가 좋은 리가 없었다.
“그 대사가 뭡니까. 꼭 삼류 악당이 하는 말 같지 않습니까?”
“씨발…….”
이창명 이사도 비아냥대는 최민혁의 말에 욕설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난리를 쳤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하진 않을까 두려웠다.
그는 안국호 부장이 슬그머니 손을 잡아당기자 최민혁 실장에게서 물러났다.
‘개새끼, 반드시 매장해 버리겠어.’
* * *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에게 속으로 복수를 다짐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위성 사업부가 위치한 ETRI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입구에서 쭉 늘어서 있는 이들을 보고선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아암, 그래야지. 오성 전자의 실세가 될 나에게 함부로 행동해서는 곤란해.’
박재호 실장 일도 뭔가 큰 오해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저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가 오는 이 시간에 자신을 마중 나왔으니까.
이 정도라면 타협하는 것이 낫다.
그렇게 생각했다.
눈치가 빠른 안국호 부장도 최민혁 때문에 바짝 긴장해 있다가 조심스럽게 아부를 떨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사님에 대해서 ETRI도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저놈들도 내가 부담스러울 테니까.”
“하긴 이사님 눈 밖에 나면 앞으로 ETRI에 대한 우리 오성 전자의 투자는 대폭 줄어들 테니, 저게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이번 일에 관여한 놈에 대해서는 단단히 보복을 해줘야지. 김문호 박사인가? 아주 우리 오성 직원에게 작정했다면서? 그 새끼는 반드시 내쫓아.”
“바로 확인해서 조치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단호하게 처리하겠습니다.”
겉으로는 큰소리 뻥뻥 치는 이창명 이사의 내심은 좀 달랐다.
‘다행이다. 아버지도 이번 일만 잘 끝내면 날 인정해 줄 거야.’
“그래. 우리 오성 전자가 ETRI에 한 해에 투자한 돈이 얼마인데, 저게 자연스러워. 아암 그래야지. 박 실장 문제도 쉽게 해결될 것 같아.”
이창명 이사는 마치 승전 장군처럼 어깨에 힘을 넣은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오현종 박사에게 악수하려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오현종 박사님께서 굳이 이렇게 나와서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오해가 있을 수 있죠. 박재호 실장과 일은 제가 중간에…….”
하지만 오현종 박사는 이창명 이사에게 가볍게 눈짓만 한 채 이창명 이사를 스쳐 지나쳤다.
아니, 갑자기 뛰어서 천천히 다가오는 최민혁에게 다가가서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최 실장님, 이번 발표회에 직접 자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창명 이사는 내민 손을 슬그머니 거둔 채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또 최민혁 실장이었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은 히죽 웃은 채 작정하고 자신을 비웃었다.
‘저 새끼가.’
* * *
위성 사업부 건물 앞에는 이동호 교수, 송한성 교수를 비롯한 모두 20명의 연구원이 쭉 늘어서서 최민혁 이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서는 지인과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만 나눌 뿐. 오늘 있을 발표회에 대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물론 내막을 잘 모르는 김문호 박사는 남아 있는 김승구 팀장에게 소리쳤다.
“저도 최민혁 실장 소문은 들었습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번 발표회 이후를 생각하는 김승구 팀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애초에 이런 접대가 익숙하지 않아서 더 당황스러웠다.
그 역시 소심한 성격에 남 앞에 가서 재롱부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불편한 마음이 더 편치가 않았다.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새 위성 방송 시스템의 연구 성과 가치를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하지만 그래도 이게 뭡니까. 다들 비웃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발표회장 건물 안에 들어가지 않고 로비에 있던 이들은 김문호 박사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수군거렸다.
김문호 박사가 평소에도 로비를 받는 연구원을 병신 취급했기 때문이다.
김문호 박사 자신이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냐고 비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신경이 곤두선 김문호 박사 모습에 김승구 팀장도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굳이 나나 오현종 팀장이 이렇게 나와서 최민혁 실장에게 저자세를 취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이런다고 생각하나?”
“저도 압니다. 우리가 진행하는 위성 사업 시스템 수준이 상업적으로 팔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완성도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김 박사 자네도 이전처럼 동작하는 것만 보여준 후에 정보통신부 공무원의 눈도장만 찍으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아니, 지금은 현실만 봐도 이전과는 문제가 달라. 정부도 지금까지는 종합유선방송과 무궁화 위성을 통한 위성방송 정책을 둘러싼 내부 불협화음 때문에 지금까지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어.”
“그거야…….”
김문호 박사도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정부 태도 변화가 빠르게 일어난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것보다 정보통신부 내부의 변화는 더 심했다.
오현종 박사가 흘린 새로운 위성방송 이야기가 정보통신부에도 흘러 들어가면서 정부 내부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정보통신부에서도 뒤늦게야 이게 진짜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어이가 없는 일은 이것 때문에 정보통신부 조직 개편이 더 빨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체신부, 공보처, 정보통신부로 분리된 위성 사업이 하나로 통폐합되었다.
결국 체신부와 공보처에서 가지고 있던 정보통신 업무와 다른 부처에서 따로 관리했던 위성 업무가 정보통신부의 정보통신정책실로 다 이관된 것이었다.
“아니, 자넨 아직도 몰라. 새롭게 개편된 정보통신정책실 수장이 된 이원한 실장도 상황 파악을 위해서 오늘 박성환 팀장을 이번 발표회에 보냈으니까.”
“설마 정보통신부 개편이 이번 일 때문에 생겼다는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우리도 아직 잘 모르는 일을 걔들이 어떻게 압니까?”
“당연히 걔네들도 정신이 없겠지. 정작 정보통신부에서도 이걸로 어떤 식으로 정책을 펼쳐야 할지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까.”
“그러면 평소처럼 다른 국가의 위성 정책을 연구해서 짜깁기 중이겠군요.”
“그래. 뭐 공무원 애들이 그러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툴툴거리던 김승구 팀장도 자신 역시 송한성 교수 연구 성과물을 도둑질했다는 것을 떠올리자 민망해서 입을 다물었다.
김문호 박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위성 시스템에 대한 검증이 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어.”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위성방송이나 유선종합방송에 대한 통합 방송법 제정에 일이 빠르게 검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이 또 그렇게 긍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이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최민혁 실장이 많이 양보를 해야 한다는 점이야.’
만약 최민혁 실장이 양보하지 않는다면 일이 굉장히 어렵게 된다.
자칫하다가 타이밍을 놓치면 법안이 질질 늘어져서 1년이 걸릴지, 아니면 2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김승구 박사는 넌지시 통합 방송법과 관련된 정보통신부 생각을 말해주었다.
“통합 방송법이라…….”
김문호 박사도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 역시 법안 제정 문제도 관련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니, 황당하기만 했다.
“아니,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겁니까?”
“몰랐지. 설마 일이 이렇게 빨리 완성될지는 다들 몰랐어.”
“허.”
“그런데 자네는 이런 사정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자네가 좋아하는 연구만 집중해. 나머지 시다바리는 오 팀장이나 내가 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나 보네. 어차피 이번 연구 성과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자네는 ETRI의 다크호스가 될 거야. 그것만 생각해.”
“저도 복잡한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오성 전자 같은 기업이 끼어들어서 횡포를 놓을까 그게 걱정입니다.”
“그런데 오성 전자 도움을 무시하기 어려워. 차세대 교환기 문제는 LC 전자나 대운 전자에만 맡길 수가 없네.”
“…LC 정보통신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LC 정보통신도 오성 전자과 비교하면 별반 차이가 없어. 차라리 둘을 경쟁시키는 것이 훨씬 나아. 정보통신부에서도 구두로 이미 이야기가 끝났네.”
“그렇습니까?”
“남아 있는 것은 최민혁 실장의 양보야. 이것저것 타협 과정에서 손해를 볼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니까.”
“그렇군요.”
김문호 박사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만약 ETRI 순수 기술로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끝냈다면 자신이 대우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현종 박사의 안내를 받은 최민혁이 다가오자 김승구 팀장도 후다닥 최민혁을 향해서 부리나케 뛰어가는 중에 이창명 이사가 손을 내미는 것을 봤지만 무시했다.
그는 최민혁 앞에 가서는 머리가 아니라 허리를 숙인 채 최민혁의 손을 잡았다.
김승구 팀장도 아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20살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이질적이었다.
김승구 팀장과 오현종 팀장의 성향을 잘 아는 ETRI 연구원들조차 턱이 빠지도록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
김문호 박사는 두 사람 뒤를 따랐다가 그 광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박재호 실장이 물러나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위성 사업부 실장을 맡을 텐데, 젊은 친구에게 너무 저자세였다.
‘…기가 막히네. 정통통신부 장관에게도 저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미 오큘러스 프로젝트 가치가 서서히 빛을 발하면서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최민혁 실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앞으로 부탁할 일이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아니, 박재호 실장의 징계가 쉽게 가능한 것도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이번 발표회 취재 때문에 이 자리에 참석한 한영 일보의 범용구 기자는 최광수 기자와 동행했는데, 그도 콧대가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은 연구원이 최민혁에게 아주 작정하고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제가 잘못 본 것 아니죠?”
“저도 봤습니다.”
“하,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저도 최 실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겠죠. 그게 바로 특종이고요. 아마 그것 때문에 우리를 이 자리에 불렀을 겁니다.”
“당장 가서 이야기나 해보죠.”
“아, 이런.”
범용구 기자는 최민혁에게 잽싸게 쪼르르 달려가서 인사했다.
“실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최민혁은 범용구 기자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 우연인 것처럼 입을 열었다.
“오, 범 기자님이군요. 여긴 웬일입니까?”
“ETRI 취재차 겸사겸사 나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우리 범 기자님은 많이 변한 것 같네요.”
“하하하, 다 실장님 덕분이죠.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