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18화 (218/1,021)

#218.

“이런 개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가만 장 실장은 그러면 지금 TRS 사업을 접자는 거야?”

“그것도 하나의 대안입니다.”

“지금 뽑아놓은 직원은 어떻게 할 건데? 그냥 이대로 사업 청산하면 언론에서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온갖 개소리하면서 다 씹어댈 텐데?”

“감수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차라리 욕 듣는 것이 낫습니다. 오히려 다른 쪽으로 사업을 돌리면 됩니다.”

“아니, 무슨 사업을 할 건데? 사업이 그냥 하루 생각해서 막 찍어내면 된다고 생각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와, 진짜 돌겠네.”

최문경 부회장은 미칠 것 같아서 일어났다 앉기를 반복했다.

“이거 설마 장 실장 독단은 아니지?”

“회장님에게 이미 보고했습니다.”

그는 황당한 장승일 실장 대답에 고민하다가 문득 이일태 이사 사태를 떠올렸다.

“설마 이것도 민혁이 그놈 짓이냐? 이일태 이사 문제를 덮기 위해서 이 쇼를 벌이는 것 아냐?!”

“…….”

정답이라서 장승일 실장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걸 알아도 최민혁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은 최민혁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TRS지오텍KM 사업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더 큰 문제였다.

“와, 질린다. 최민혁, 이 새끼가 정말 소름이 다 끼치네.”

허탈한 얼굴을 한 최문경 부회장은 고민을 꽤 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장승일 실장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결국 회의실을 조용히 나가 버렸다.

그도 뒤늦게야 여기서 더 나가는 것 자체가 최민혁이 원하는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있던 구길모 차장이 그제야 장승일 실장에게 다가갔다.

“괜찮을까요?”

“최문경 부회장도 바보는 아니니까. 아마 최 실장님의 의도를 지금 알았을 거야.”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승일 실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최 실장님이 원하는 것은 이번 일을 이용해서 부회장님이 회장님과 대판 싸우는 거야. 그러면 결과는 뻔하거든. TRS 사업이 무너질 때 이번 일도 도매 급으로 취급을 받을 테니까. 뭐가 되었던 최문경 부회장에게 큰 타격을 줄 거야.”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했을까요? TRS 사업이 완전히 폭망하는 것은 보고서 속에서도 미래의 일 아닙니까.”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일단 이일태 이사 일은 그냥 손을 떼고 지켜보는 걸로 해. 회장님에게는 내가 그렇게 보고를 할 테니까.”

“부회장님은 가만히 있을까요?”

“아마 조용히 있을 거야. 이번에 분탕질을 쳤다가 또 박살 나면 김이경 여사님도 그냥 있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결과를 보고 싶은 거야. 정말 최민혁 실장님 의도대로 되는지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게 무슨 나비효과도 아니고, 도대체 뭐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일태 이사 안건이 어째서 이렇게 그룹 본사를 뒤흔드는 일이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 * *

최민혁도 KM 그룹 본사에 있었던 최문경 부회장의 활극(?)을 들었지만 아쉬워했다. 멋진 액션을 기대했는데, 단순한 말장난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더 실망한 것은 장승일 실장과 최용욱 회장의 행동이다.

그들은 갑자기 수면제라도 먹은 듯이 침묵했다.

그 흔한 경고도 없었다.

애초에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이 이번 일에 끼어드는 것을 원치 않아서 만족하기는 했지만 사이다가 아니라 고구마가 된 것이 영 찜찜했다.

‘하긴 그렇게 당하고도 똑같이 움직이면 그게 진짜 병신이지. 이젠 눈치를 챌 때가 되었지.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어.’

그는 대신 이번 사건에 대한 사내 반응을 살펴보았다.

주 대상은 역시 기획 팀이다.

월마트 관련 계약 조정 문제 때문에 미국 법인과도 이리저리 연락하면서 중재하던 정성근 대리는 갑작스러운 난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박광민 사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 대리님,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달걀로 눈에 난 멍 자국을 문지르는 정성근 대리는 별 표정이 없었다.

“내가 지금 월마트 계약서 보는 것을 보면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정성근 대리 컴퓨터 화면에 떠 있는 것은 월마트에서 제안한 각종 계약서다. 그 문건을 일일이 살피면서 위성 업무 일에까지 관심을 둘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위성 사업은 원래 정 대리님 담당 아니었습니까?”

맞다.

돈이 안 되는 위성 사업부는 정성근 대리가 이제까지 담당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허훈 과장과도 자주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위성 사업부 자체는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사업이다.

정성근 대리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없는 사업 가지고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소모성 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 대리는 이일태 이사가 얼마나 무능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위성 사업부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최 실장님도 따로 알아봤을 수도 있어.”

“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위성 사업부 직원이 와서 난동을 부린 것 때문에 흥분해 있던 이정원 과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 대리, 그게 무슨 말이야?”

월마트 계약 문제 때문에 잔뜩 긴장한 조성근 대리는 푸념을 털어놓았다.

“위성 사업부가 무능한 것은 다 알지 않습니까. 뭘 또 모른 척합니까. 저라도 만약 위성 사업 아이템이 생긴다면 위성 사업부와 일하기에 앞서서 따로 다른 채널을 알아봤을 겁니다.”

박상기 차장과 음모론을 속삭이던 배종대 과장이 후다닥 옆으로 다가와서 탄식했다.

“카, 맞네, 그게 정답인 것 같아.”

“그냥 추측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보기는 힘들어.”

“다른 일이라도 있습니까?”

조성돈 팀장도 팀원들 이야기에 무시할까 하다가 마냥 입을 다물 수만은 없었다.

“정보통신부에서 원래 위성 채널 12개 중의 4개 채널 배정은 내년 시험 방송을 통해서 진행하는 것으로 했는데, 그 일정이 당겨졌어. 그러니 상황이 좀 다를 수밖에 없어.”

박상기 차장이 흥미를 드러냈다.

“설마 ETRI에서 일정을 당겼다는 말입니까?”

“네. 메이저 방송사에서 각각 채널을 할당한 것으로 압니다. 다만 대기업과 신문사 위성방송 사업은 배제한 것으로 압니다.”

“가만 그걸 대기업이 보고 있었습니까?”

“안 보고 있겠죠.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벌써 차세대 교환기 TDI-ATM 교환기 개발에 착수했으니까. 즉 이미 위성 사업 시스템에 대한 신뢰성 검증은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대기업에서도 이것 때문에 뭔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랬다.

ETRI 능력 자체가 워낙에 상업적으로 믿을 수가 없어서 이제까지는 정보통신부가 정한 일에도 별다른 관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새로운 위성방송 시스템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것도 사정이 달라졌다.

정보통신부에서도 ETRI를 찾아가서 이 문제를 심각한 안건으로 다루었다.

문제는 여기에 한국 10대 대기업이 알게 모르게 관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즉 권태성 실장이나 이창명 이사와 같은 실무진이 하는 것과는 별개로 윗선에서도 따로 로비가 오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따가운 기획 팀 직원들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자면 상황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하고, 우리가 끼어서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그런데 이일태 이사는 왜 우리 팀에 쳐들어와서 그 난리를 피웁니까?”

“답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정확한 것은 ETRI 측에서 답을 내놓겠죠.”

“…뒤에서 일은 다 해놓고, ETRI를 앞세워서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습니다만.”

“…저도 그건 잘 모릅니다.”

조성돈 팀장도 다 말할 수 있다면 말하고 싶었다. 불행히도 그럴 수가 없었다. 위성방송 시스템 작업을 기획한 사람은 오직 최민혁뿐이기 때문이다.

기획 팀도 뒤늦게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닫고는 혀를 찼다.

‘이것도 모두 최 실장님이 꾸민 일이구나.’

* * *

ETRI는 국가 보안 시설로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서 허락된 곳에서만 촬영할 수 있었다.

10개가 넘는 동으로 이루어진 ETRI는 동마다 개별 연구가 진행된다.

건물 내에는 식당을 비롯한 편의시설이 다 같이 있다.

사무실 내부는 일반 공공기관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회의실이나 대강당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실험실을 빼놓기 어렵다는 것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ETRI 위성 연구소 건물에는 뜻밖에 사람이 많이 오갔다.

위성 사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오현종 팀장이 갑자기 실무진을 모두 호출했다.

이 일 때문에 이쪽하고 관련이 없는 연구원도 하나둘씩 위성 연구소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 중에는 위성방송 사업에도 관심을 둔 이들이 많았다.

이 연구 자체가 다른 연구에도 얼마든지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번 일과 관련이 있는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 역시 시간에 맞추어서 나타났다. 두 사람은 이미 오현종 박사와 입을 맞추었기에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특히 송한성 교수는 우산을 쓴 채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정말 별일은 없겠습니까?”

오현종 박사는 당당했다.

“이제 와서는 뾰쪽한 수가 없습니다. 아니면 송 박사님이 우리 ETRI 입장을 고려해서 다시 로열티 협상을 해줄 겁니까?”

늘 연구와 강의에만 찌들어 사는 송한성 교수는 힐끗 이동호 교수를 쳐다보았다.

사실 이번 일에서 그저 제삼자 입장인 이동호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위성방송 사업과 관련된 특허 소유권자는 KM 전자입니다. 저도 그쪽에서 용역을 받아서 일을 진행할 뿐이에요.”

“그렇습니까?”

비록 박재호 실장에게 책임을 다 떠넘겨서 일단 급한 불을 껐지만,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오현종 박사는 두 사람을 째려봤다.

이번 연구에 감투만 뒤집어쓴 송한성 교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ETRI 내부 연구원 중에는 선후배가 많기에 무슨 말을 하기 부담스러웠다.

사실 박재호 실장의 아는 지인 중에는 송한성 교수 자신에게 따로 전화하거나 연구소를 찾아와서 압박한 이도 있었다.

이동호 교수 핑계를 대도 사람들이 믿지는 않았다.

오현종 팀장은 고민에 빠진 두 사람을 구박하면서 기다렸는데, 마침 최민혁이 탄 차량이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현종 팀장은 다른 연구원에게 신호를 줬다.

“…….”

물론 오현종 박사 지시를 받아서 이번 수정 작업을 주도한 김문호 박사는 아직 자세한 내막을 몰라서 눈치만 봤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걸까?’

* * *

최민혁은 차량에서 내려서 고적한 ETRI 건물을 둘러봤다. 그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위성 연구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을 봤다.

그는 원래 이 자리에 참석만 하려고 했는데, 이창명 이사도 온다는 소리에 어떻게 엿을 먹일까 고민 중이었다.

오성 전자가 이번 일로 얼마나 큰 손해를 봤는지는 사실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사실을 다 말할 수도 없고, 뭐 굳이 그러지 않아도 앉아서 구경만 해도 재미가 있을 거야.’

재미있는 사실은 최민혁이 탄 차량의 뒤를 이어서 도착한 다른 검은색 벤츠 차량에서 이창명 이사가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최민혁을 발견하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일태 이사를 시작으로 해서 이번 위성방송 시스템 문제까지 떠올렸다.

‘설마 위성방송 시스템도 최민혁 저놈의 짓은 아니겠지?’

곧이어 떠오른 것은 박재호 실장이다. 오현종 팀장에게 갑자기 뒤통수를 맞고는 자신에게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사실 박재호 실장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는 어이가 없었다.

아마 평소였다면 이창명 이사는 그 자리에서 욕설로 시작해서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을 보자 지난번처럼 쉽게 날뛰지 못했다.

오히려 최민혁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여, 이사님을 여기서 뵙습니다.”

“말조심해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법입니다. 제 비서에게 질척거리는 인간을 앞에 두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난 그런 적 없다.”

“TV에서도 난리던데, 오리발을 내밀겠다는 말입니까? 제가 증거를 보여드릴까요?”

최민혁은 곧바로 김명준 과장에게 손짓해서 오혜정 비서 관련 사진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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