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대충 돈이 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이일태 이사는 디코더 개발 쪽이잖아. 그것도 외부 용역을 줘서 진행하는 일이고, 그런데 왜 새로운 위성 서비스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건가?”
“그 일에 최민혁 실장이 손을 썼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이동호 교수 후배인 송한성 교수가 한 일인데, 아무래도 그 일에도 최민혁 실장이 끼어 있다고 본 것 같습니다.”
그도 이동호 교수, 송한성 교수, 최민혁, 세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알았다. 다만 그렇다고 이걸 이일태 이사처럼 확대하여 해석하지는 않았다.
“…뭔가 좀 이상하잖아. 최 실장님이 위성방송 시스템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
“그게 아무래도 이일태 이사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저희 기조실에서 알아본 바로는 이 문제 때문에 ETRI 내부도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평소라면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이었겠지만 지금 ETRI는 진흙탕 싸움 중이었다. 내부 정보가 온 사방에 다 퍼졌다.
“거기까지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 다만 이 일을 주도한 박재호 실장에게 문제가 좀 있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
장승일 실장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했고, 이일태 이사의 잘못도 알았다. 비록 오해였다고 해도 위성 사업부 임직원이 기획 팀에 가서 난동을 부린 것은 용납하기 힘들었다.
문제는 최민혁 실장이 이번 일 가지고 이일태 이사를 노골적으로 징계했다는 점이다. 불과 반나절 만에 마치 이런 일을 예상한 것처럼 처리해 버렸다. 6개월 감봉하고 심지어 이 사실을 전사 공지로 알려서 창피를 좀 준 것은 좀 심했다.
사내 공지를 명분으로 이일태 이사보고 회사를 나가란 뜻인데,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그만뒀을 테지만 이일태 이사는 그러지 않았다.
쪼르르 자신에게 와서 밀고까지 했으니 말이다.
장승일 실장이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 사실만 가지고 최용욱 회장을 자극했을 테지만 그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이보다는 오히려 최민혁 의도가 더 궁금했다.
‘얼마 전에 회장님이 간섭한 것에 대한 경고일까?’
문제는 이 경고를 무시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 실장이 실장으로 입사한 이래 그가 보인 무시무시한 능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죽하면 자신이 사내 기밀을 들고 가서 최민혁 실장에게 자문하겠는가.
장승일 실장은 골치가 아파서 이 문제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일단 다른 것을 떠나서 이일태 이사 행동 자체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이일태 이사 사건을 검토하는 중에 올라온 몇 가지 정보였다.
특히 최민혁 실장이 조성돈 팀장 통해서 위성방송 시스템 관련해서 지시를 내린 보고서가 있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이 정보는 어떻게 얻은 건가?”
구길모 차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조성돈 팀장이 내부 일이지만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 관련 문건을 저희에게 보냈습니다. 그중에 일부분입니다.”
“그래?”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문건을 하나하나 보면서 힐끗 구길모 차장을 쳐다보았다. 구길모 차장 역시 이 보고서를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게는 이일태 이사가 문제가 아니라 이 보고서 안건이 더 심각했다.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과 디지털 TRS 사업에 대한 미래라…….’
* * *
장승일 실장도 이 문제가 이일태 이사와 관련이 있어서 최용욱 회장을 찾아가서 보고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은 이일태 이사가 아니라 장승일 실장이 추가한 TRS 사업과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 분석안에 더 관심을 뒀다.
이 보고서를 검토한 사람이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었다.
“가만 TRS 법인까지 만들었는데, 왜 민혁 이 녀석이 이 사업을 검토한 거지?”
“지금 검토한 것이 아닙니다. 몇 달 전에 통신 사업과 관련해서 따로 검토한 것 같습니다. 최근에 추가된 것 같지만 큰 줄기를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최용욱 회장도 요즘 심취해 있는 KM 전자 보고서를 떠올렸다.
“…설마 KM 전자 보고서는 아니겠지?”
“그 보고서 일부분이 맞을 겁니다. 특히 이동 통신 사업을 언급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룬 것입니다.”
한동안 한국 언론을 뒤흔든 KM 전자 보고서는 이미 최민혁 실장이 만들었다는 것이 기획조정실의 암묵적인 의견이었다.
이동통신 사업 분야가 뜨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분야가 무선데이터통신, 주파수공용통신(TRS), 발신전용 휴대전화(CT-2) 같은 분야다.
이처럼 인공위성을 통한 사업은 자연스럽게 검토가 되던 분야다.
디지털 위성방송 서비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채널과 관련해서 정부가 대기업 제한을 걸면서 중견 기업은 다들 눈독을 들였다.
KM 전자에 STB 사업부와 위성 사업부가 있는 이유다.
최용욱 회장도 왜 이 문건이 이제야 문제가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조실에서 검토한 것이 아니었나?”
“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문건에 나와 있다시피 함축적인 내용이 많았습니다. 다만 저도 최 실장님을 만나서 우리가 진행하는 사업에 대해서 몇 가지 자문한 적은 있습니다.”
“그러면 민혁이 그 녀석은 뻔히 우리가 TRS 쪽에 투자하는 것을 알면서도 사전 조율도 없이 위성방송 시스템에 관심을 보인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정확히는 송한성 교수가 이 일을 주도했습니다.”
“글쎄. 그걸 송한성 교수 혼자 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거야.”
“…그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피식 웃었다.
“장 실장, 이 일을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소리는 마. 지금 중요한 것은 이일태 이사 문제가 아니잖아. 왜 민혁이 그 녀석이 이번 일에 과하게 손을 쓴 건가?”
이일태 징계 건은 이미 최용욱 회장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TRS지오텍KM 합작사 지분 49%에 벌써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고, 추가 투자 비용은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연구소 설립과 신규 인력 채용도 이미 끝나 있었다.
만약 회사가 조성돈 팀장이 들고온 보고서대로 된다면 그렇게 투자한 돈을 전부 다 날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새로운 위성방송 시스템에 최민혁이 관여하고 있다니.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경영자였다.
“그러면 이일태 이사 문제는…….”
“일단 징계일 뿐이잖아. 이일태 이사 그놈도 잘한 것이 없고, 그리고 회사 잘 나가고 있다며? 그러면 그냥 둬.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
“후유, 알겠습니다.”
“이봐, 내가 장 실장 자네에게 TRS지오텍KM 투자에 투자했다고 질책하는 것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사업 성과니까. 그 길이 아니면 얼마든지 바꾸면 되는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인제 와서 이 사업을 재검토한다면 최문경 부회장님이 그냥 있지 않을 텐데, 그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자네가 알아듣게 설명해. 새로운 위성방송 시스템 문제도 있으니, 가능하면 빨리 결정하는 것이 좋아.”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예상을 벗어난 최용욱 회장 행동에 다소 안도했다. 괜히 최민혁에 대한 감정 때문에 일방적으로 몰아가지 않을까 싶었는데, 사업에 관해서 만큼은 최용욱 회장은 냉정했다.
‘하긴 저게 회장님의 뛰어난 점이니까.’
* * *
KM 그룹은 뜬금없이 TRS 사업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시끄러웠다.
평소라면 장승일 실장도 비밀리에 처리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의도적으로 최문경 부회장 라인에 이 정보가 흘러가도록 손을 썼다.
지금까지 김이경 때문에 숨죽이고 있던 최문경 부회장은 이 소식을 듣자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기획조정실이 회의하는 데 들어가서 장승일 실장에게 고함을 내질렀다.
“야, 장 실장, 너 도대체 날 어떻게 보기에 이러는 거야?!”
기획조정실 직원은 다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마 부회장이란 작자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깽판을 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들도 지금 자신이 검토하는 일을 생각하면 최문경 부회장을 미친놈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이 새로운 계열사 설립과 그 자금 운용을 모두 전담한 것이 바로 최문경 부회장이다.
더욱이 그 일도 자기 독단으로 한 것이 아니라 최용욱 회장의 지시를 받아 처리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검토를 최종적으로 한 것이 바로 기획조정실이었다.
장승일 실장이 손짓하자 다들 우르르 회의실을 나가 버렸다.
“야, 이 개새끼야, 너 정말 너무 한 거 아냐? 아무리 아버지 백을 믿고 설친다고 해도 그렇잖아. 아니, 네가 이미 다 검토해서 진행하게 한 일이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재검토를 한다고?!”
온갖 쌍욕이 폭주했다.
뒤에 따라 들어온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조차 최문경 부회장을 말리지 않았다.
“…압니다.”
“알기는 뭘 알아. 도대체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죄송합니다.”
장승일 실장은 순순히 사과했다. 그 역시 이 일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정답입니다.”
“하, 와아, 뭐 이런 엿같은 경우가 다 있냐.”
최문경 부회장은 정말 자기감정이 격해져서 이러나 싶어서 권재홍 비서실장을 비롯한 민상수 비서실 2팀 부장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다 최문경 부회장 의견에 공감했다. 단순히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정말 이건 아니라는 태도였다.
장승일 실장은 그들이 화를 가라앉힐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시발 새끼야, 이건 아니잖아.”
“나도 잘했다는 것이 아냐. 하지만 이 사업을 건드리는 건 진짜 말도 안 되잖아.”
“아니,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다시 검토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설마 지금 뽑은 직원들은, 다른 계열사로 돌릴 생각을 하는 거야?”
끝도 없이 이어진 최문경 부회장의 분노.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불상 같은 그 모습에 최문경 부회장도 혀를 내두른 채 실장의 맞은편에 풀썩 앉았다.
“좋다.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자.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나에게 억하심정이 있으면 나에게 화풀이해야 할 것 아냐? 왜 멀쩡한 사업을 건드려?”
“멀쩡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 아, 아니다. 말해봐. 일단 내가 들어는 줄 테니까. 하지만 근거가 없다면 이번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알겠습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여전히 침착했다. 그는 회의실 전화로 구길모 차장을 호출했다.
구길모 차장은 눈치 빠르게 회의실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TRS지오텍KM의 미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희 보고서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모바일 사업에 대한 평가입니다.”
모바일 사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 시장에 대한 평가는 기업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모바일 시장과 관련된 파급 효과는 국내 기업 중에 제대로 평가하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조성돈 보고서는 달랐다. 보고서에 나와 있는 모바일 시장은 그보다는 몇 배, 아니 몇십 배로 평가되었다.
문제는 보고서가 단순히 그냥 문건에만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파급 효과와 이후의 동향에 대해서 기술되어 있었는데 새로운 통신 서비스와 기술이 바로 그것을 대체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에 따라 GSM과 CDMA에 대한 평가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최문경 부회장도 침묵했다. 단순한 예측 보고서였지만 무시하기 힘든 요소가 많았다. 모바일 시장이 커진다면 기업의 투자는 늘어난다.
지금이야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할 수 없는 많은 일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
TRS 사업에 대한 기획조정실 평가도 이런 부분을 과소평가했다.
조성돈 팀장의 보고서를 토대로 그것을 검토했을 때, TRS 시장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입니다. 위성방송 시스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채널에 대해서 대기업을 완전히 배제했습니다. TRS 사업도 비슷하게 흘러갈 텐데, 중견 기업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회사의 로비도 쉽지 않아집니다.”
TRS 시장은 쪼그라들고, 공급이 많아진다면 시간이 갈수록 수익성이 줄어든다.
그 덕분에 틈새시장이 생기기는 하지만 KM 그룹이 먹기에는 파이가 작았다.
“…….”
분노한 황소처럼 날뛰던 최문경 부회장도 어느 사이엔가 입을 다물었다. 그도 보고서 안건에 반박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애초에 TRS 사업은 안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