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하나의 주파수만 사용하는 이동통신과는 달리 TRS는 많은 주파수를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무전기와 비슷합니다. 일정 주파수만을 별도로 사용해서 외부와는 통화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경찰, 소방, 철도 분야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그 정도 시장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동통신이 활성화되는 미래가 오면 이쪽 TRS 시장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휴대폰으로는 TRS 시장에 큰 영향을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뇨. 모바일 시장의 폭발력은 조 팀장님이 상상하는 그 이상입니다. 결국, 기존 업체끼리 박 터지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결국 경쟁력이 없는 업체는 죽게 됩니다. 즉 TRS지오텔KM 같은 회사는 무조건 망합니다.”
정확히는 몇 년 후에 청산된다. 문제는 개발 단계에서도 돈만 까먹고, 출시된 이후에도 경쟁사와 출혈 경쟁을 하면서 이익도 나지 않았다.
KM 그룹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사업은 수천억을 날려먹는 것으로 끝이 나버린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이 사업 청산하면 손실을 많이 줄일 수가 있어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룹 기획조정실에서도 철저히 검토를 한 일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습니까?”
“장승일 실장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모바일 시장의 변화가 장승일 실장의 인지를 벗어날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설마 모바일 시장이 그렇게 커지겠습니까?”
“MP3를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모바일 분야 시장이 확대되면 생존을 위한 싸움이 시작될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음원 서비스가 한 축을 차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MP3 관련 원천 특허는 이미 실장님이 전부 다……. 아, 설마?”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하지만 최민혁 생각은 좀 달랐다.
“뭐 앞으로 그렇게 되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네?”
MP3 관련 특허는 지금도 MP3 팀에서 사들이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도 혀를 찼다.
“전 MP3 시장만 먹는 선에서 끝낼 겁니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최민혁도 이 질문에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야 지금으로선 MP3 먹는 것으로 끝낼 예정이지만 최문경 부회장이 하는 행동에 따라서 대응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하죠.”
“아, 네.”
조성돈 팀장은 대화를 마친 후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모바일 시장 성장이 최민혁 실장 말처럼 폭발한다면 TRS 시장도 영향을 받는다.
결국 출혈 경쟁을 일삼는 전쟁터 속에서 KM 그룹도 마냥 버틸 수는 없었다.
뒤늦게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맙소사, 가만 그러면 왜 장승일 실장님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겁니까?”
최민혁도 TRS와 관련된 인생 1회차 기억을 떠올리면서 툴툴거렸다. 전생안이 마냥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 그거요. 흠, 그때는 콜린스와 MP3 개발 때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남의 밥그릇을 봐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계열사 설립도 다 끝났고, 인원 채용까지 끝났습니다. 과연 지금 와서 장승일 실장님이 최 실장님 이야기를 들을까요?”
“안 들으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습니다. 제 말 안 들으면 피똥을 싼다는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회장님 때문입니까?”
“뭐 그것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할아버지도 뜨거운 맛을 보고 나면, 제 말이 그냥 내뱉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테니까. 덤으로 이번 사업을 주도한 우리 첫째 큰아버지랑 대판 싸울 테니, 그걸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할 겁니다.”
그제야 최민혁 의도를 파악한 조성돈 팀장은 혀를 내둘렀다.
‘이일태 이사에 대한 보복으로 공격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최문경 부회장을 찍어 누를 명분일 뿐이구나.’
“…직접 경험해야 앞으로 편해진다는 말이군요.”
“네. 그리고 이 기회에 할아버지에게 점수라도 좀 따죠. 지금까지 너무 막 나간 것도 있으니까. 물론 제 말을 따를 때 이야기입니다만.”
정확히는 최용욱 회장 눈치를 봐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공격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 알리시려고요?”
“그게 조 팀장님이 할 일입니다. 새로운 위성 방송 사업 관련해서 정보를 흘리면서 TRS에 대한 제 검토 내역도 적당히 뿌리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아, 제가 오 사장님 통해서 연막을 뿌릴 테니, 적당히 작품 하나 만들어보세요.”
“…네.”
이런 일이 아직도 익숙지 않은 조성돈 팀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 * *
“우리 이일태 이사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전 기획실에서 와서 저렇게 난동 부리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습니다.”
가벼운 최민혁 이야기에 CCTV 카메라를 보는 오영근 사장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그는 별 표정 없는 최민혁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단단히 열 받았군.’
하지만 오영근 사장조차 이번 일에 쉴드를 쳐줄 수가 없었다.
다른 것을 떠나서 주먹을 휘두른 이일태 이사의 행동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뒷부분은 그나마 나았는데, 앞부분에서 이석태 부장과 허훈 과장이 기획 팀과 멱살 잡고 싸우는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힐끗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어쩔 생각인가?”
“생각 중입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저런 행동 자체를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오해도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저렇게 강압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말이 이상합니까?”
“아니야. 확실히 이일태 이사가 잘못한 것이 맞아.”
“회장님도 그렇게 생각하겠죠?”
그 역시 최근 최용욱 회장의 행보가 석연치 않다는 것은 장승일 실장에게 들었다. 장승일 실장이 불안한 마음에 문형섭 부사장에게 딱 찍어서 최민혁 실장 행동을 말려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겠지.”
옆에서 지켜보던 오영근 사장이 툴툴거렸다.
“이미 최 실장, 자네 때문에 회장님이 지금 단단히 예민해져 있는데, 굳이 일을 키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가 이일태 이사를 불러 따끔하게 경고해 주는 것으로 끝내세.”
최민혁은 발끈했다.
“이런 문제라뇨? 저기 이일태 이사 말대로라면 제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서 이일태 이사에게 다 보고하란 말이지 않습니까. 아니,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렇지만…….”
최민혁은 그냥 화만 내는 것이 아니라 명분까지 내세웠다.
“솔직히 이일태 이사가 문형섭 부사장님처럼 실적이 있다면 두고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저 사람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일 열심히 하는 기획 팀에 가서 단순한 추측만으로 행패를 부린 것 아닙니까!”
“…….”
“…….”
두 사람 다 단단히 열 받은 최민혁이 굳이 사장실까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요식행위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이일태 이사 주장이 석연치 않아서 그 부분에 대해서 질문했다.
“그래도 이일태 이사 나름 억울한 심정이 있기 때문 아닐까?”
“그게 중요합니까? 아니 회사에서 주먹을 휘두른 놈들을 검찰에 고소도 안 한 것이 더 이상합니다.”
그놈의 폭력 행위.
오영근 사장도 질문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는 답답했다. 도대체 한마디 말도 못 꺼내게 하는 최민혁 실장이 이상했다.
최민혁은 마치 그런 오영근 사장 마음을 안 것처럼 일축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송한성 교수를 압박하고, ETRI를 괴롭히겠습니까. ETRI같이 꼰대가 많은 연구소 애들이 제 말을 듣기라도 하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도 이 말에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두 사람조차 ETRI 측에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자신들보다 더 영향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두 손을 든 오영근 사장이 나섰다.
“…이일태 이사는 정말 그렇게 처리할 건가?”
“여기 결재판처럼 징계를 내려야죠.”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아뇨.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다른 임직원도 저런 식으로 행패를 안 부립니다. 여긴 조폭 집단이 아니라 회사입니다. 설사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의견을 교환해야 합니다.”
“하지만 회장님 지시 사안도 있어. 그런 점을 자네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나?”
“그 부분도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알겠네.”
두 사람은 뭔가 찜찜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최민혁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서명을 받은 결재판을 들고 일어나면서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는 바로 사내 공지로 위성 사업부 직원에 대한 징계를 내리겠습니다.”
“…그러게.”
* * *
이일태 이사의 6개월 감봉을 비롯한 위성 사업부에 대한 징계 조치는 불과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전광석화처럼 처리되었다.
KM 전자 전 직원이 이 사태와 관련된 동영상을 접하고 나서는 혀를 내둘렀다.
이일태 이사는 분노해서 길길이 날뛰었다. 자신이 그렇게 찾아가서 질문한 주장에 대한 답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렇다고 최민혁 실장을 찾아가기는 또 무서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너무 억울해서 이 사실을 장승일 실장에게 알렸다.
자연히 이전과는 달리 최용욱 회장의 지시를 받아서 KM 전자를 열심히 지켜보고 있는 KM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도 그날 오후에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긴급회의를 가졌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위성 사업부가 기획 팀에서 ETRI의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 설계에 관여했다고 오해를 하는 바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장승일 실장은 당장 몇 가지 화두에 눈살부터 잔뜩 찌푸렸다. 그는 또 갑툭튀로 튀어나온 이야기에 한숨부터 내쉬었다.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은 또 뭔가?”
“이번에 미국에 이어서 세계 두 번째로 진행하는 디지털 위성 방송 사업과 관련된 일입니다. ETRI에서 정부 통신부의 후원을 받아서 진행하는 국책과제로 내년 하반기에 시험 서비스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디지털 위성 방송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이번 정부에서도 꾸준하게 나왔던 이야기였다. 핵심 정책 과제 중의 하나로 투자가 진행된 사업이었다.
그리고 이 사업은 정부에서도 중견 기업에게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KM 그룹의 기획 조정실에서도 이 사업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만 KM 전자 내의 위성 사업부가 있기에 그쪽에 도움을 청했다.
이일태 이사는 별것 없다는 식으로 대충 정리해서 보고했다.
장승일 실장도 뒤늦게야 그 내막을 듣고 나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근데 그 부분은 TRS지오텍KM 합작사를 검토할 때 확인한 것 같은데?”
구길모 차장도 살짝 당황했다. 그 역시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했다. 기조실에서도 이일태 이사가 올린 보고안을 대충 살피다가 그냥 넘기고 말았다.
위성 방송 채널이 돈이 되는 것은 맞지만 거기 몰려 있는 기업이 너무 많았다.
그들과 경쟁해서 채널을 따낼 수 있냐는 점에서 비관적이었다.
그렇다고 이 안건은 장승일 실장에게 대충 넘길 수가 없어서 대략 보고했다.
“…그랬나?”
장승일 실장조차 뒤늦게 그 사업의 위험성과 가치를 알아보고 나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에는 별일이 아니었다.
실상 지금도 별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만약 최민혁 실장이 그 사업을 따내거나 뭔가 관여를 했다면 큰일이 되어버린다.
결국 이제 와서 그 일을 검토하기보다는 당면한 문제에 더 집중했다.
“…다른 일이라도 있나?”
구길모 차장도 장승일 실장이 더 파지 않는 것에 안도했다.
그래서 적당히 요식적인 보고를 계속해 나갔다.
“그게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은 사업이었습니다. 이번 정부가 위성 채널에 대해서 대기업 참여를 완전히 배제하고, 중소기업 컨소시엄을 인정한 상황이라서 잘만하면 저희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괜찮은 사업이란 소리인가?”
“그게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미국에 이어서 두 번째로 서비스하는 사업이라서 불안전한 면이 많습니다. 거기에 디지털 인프라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라서 사업 초기 단계에서는 꽤 적자를 봐야 합니다.”
다양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만을 기억한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이 문제를 다시 확인했다. 자세히는 그도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알 수가 없지만 대충 돌아가는 그림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