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딱 봐도 자신이 당했던 수법과 다른 듯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료를 살피다가 뒤늦게 자료 속에서 이동호 교수의 이름을 확인했다.
“이동호 교수가 KM 전자와 공동 연구도 합니까?”
“글쎄. 이일태 이사 이야기로는 안면이 있는 정도라고 들었어.”
‘이거구나.’
김현우 수석 부장은 드디어 최민혁 실장의 연결 고리를 찾았다고 확신했다. 공동연구가 꼭 드러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얼마든지 비밀리에 연구할 수 있다.
아니, 실상 이동호 교수가 갑자기 주목을 받은 것도 그렇다.
STB 사업부 매각의 원인이 되었던 비디오 특허 이야기가 나올 무렵에 이동호 교수는 서서히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새삼 지난 일을 떠올리자 속이 다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최민혁에 대한 원한은 그 어느 때보다 깊었다.
하지만 굳이 안국호 부장에게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잘만 이 정보를 활용한다면 이창명 이사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다만 그도 자신의 추론이 맞다면 최민혁 실장이 또 다른 뭔가를 꾸미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정말 대단한 새끼다. 내가 당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거야.’
불행히도 김현우 수석 부장은 본인이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지금 그가 생각하는 방향 자체가 최민혁이 원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위성 시스템 서비스에 대해서 안 것 자체가 함정이었다.
그것을 모르니 그는 안국호 부장에게 당당했다.
“일단 이번 일은 제가 이창명 이사에게 책임지고 보고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그래? 저, 정말 고마워.”
안국호 부장은 지금 생명의 위기까지 느끼는 마당이라 김현우 수석 부장 손을 잡고 그저 고맙다는 이야기만 했다.
“천만에요. 같은 회사 직원끼리 서로 도와야죠.”
‘안 부장, 너도 반드시 없애 버릴 거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안국호 부장에게 당했던 일을 절대로 잊지 않고 있었다. 자리만 잡는다면 반드시 안국호 부장에게 복수할 생각이었다.
* * *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일단 급한 대로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에 대해 따로 조사했다.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이 흘린 정보가 많은 터라 정보를 얻기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군. 이전에도 안국호 부장이나 기획 팀에서 조사한 것 같았는데, 왜 이제야 이 정보를 알게 된 것일까?’
의문점은 제법 있었다.
그렇다고 이 정보만으로 최민혁이 뭔가 또 다른 꼼수를 부렸다는 점을 찾기는 힘들었다.
다만 그도 더 자세한 내막까지는 파헤칠 수가 없었고, 일단 자신이 파악한 정보만 간추려서 이창명 이사에게 새로운 위성 시스템에 대해 보고했다.
자신의 추론은 빼고 말이다.
이창명 이사는 당연히 미친놈처럼 발광했다.
“으악!”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비명.
통로를 오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던 임직원이 다 들을 만한 큰 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창명 이사라는 것을 알자 다들 쓸쓸 피했다.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이창명 이사의 악명은 사내에 자자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성 전자 내에서도 이창명 이사는 내버려 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마치 조폭의 행동 대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이창명 이사였기 때문이다.
이창명 이사는 실제로 단순히 함성만 내지른 것이 아니라 골프채를 들고 안국호 부장의 전신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으악!”
‘왜 나만?!’
폭력을 피하려고 김현우 수석 부장을 이용했는데, 정작 맞는 것은 자신만 맞으니 억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새끼야, 김현우 수석은 이 일을 시작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중요한 정보를 얻었는데, 넌 도대체 이제까지 뭐한 거야?!”
“…….”
그랬다.
김현우 수석 부장이 굳이 내막을 말하지 않아도 안국호 부장의 무능함만 드러났다.
만약 좀 더 빨리 알았다면 다양한 대안이 나왔을 텐데, 지금은 또 상황이 달랐다.
박재호 실장이 아직 힘이 있을 때와는 달리 이창명 이사도 새로운 위성 시스템에 대해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팔이 부러진 듯한 통증에도 안국호 부장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반항하면 폭력은 더 가혹해진다. 그냥 참는 게 최선이었다.
자신이 정보를 얻어서 김현우 수석 부장에게 넘겼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또 그 빌미로 두들겨 맞을 테니까.
이런 일은 처음 경험한 김현우 수석 부장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도 KM 전자에 있을 때 제법 행패를 부렸지만, 이창명 이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완전히 미친놈이잖아.’
불행히도 김현우 수석 부장은 KM 전자에 있을 때 본인이 행패를 부렸던 사람인 터라 왜 오성 전자 윗선에서 저걸 내버려 두는지 잘 알았다.
언제 자신도 피해자가 될지 몰라서 숨도 제대로 쉬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맞는 것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더 소름 끼쳤다.
아예 시간이 잘 흐르지 않았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안국호 부장의 고통을 옆에서 간접 체험하며 어쩌다가 자신이 이 모양이 된 것인지 후회했다.
참담했다.
새삼 아버지 최두진의 경고가 떠올랐다.
‘빌어먹을.’
다행히 2시간이 지나자 이창명 이사도 곧 정신을 차렸다.
정확히는 체력이 달려서 골프채를 휘두를 힘이 없었다.
결국 옆에 있다 골프채에 몇 대 맞은 김현우 수석 부장조차 마른침을 삼켰고, 얼굴이 퉁퉁 부은 안국호 부장은 차마 그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창명 이사는 한동안 침묵했고, 다행히 화를 가라앉혔다. 뭐, 사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최근 돌아가는 상황 때문이었다.
특히 뜬금없는 월마트와 콜린스 사태를 알고 나서는 이창명 이사도 냉정해졌다.
“…우리 손해는 얼마 정도야?”
“그게…….”
김현우 수석 부장은 힐끗 안국호 부장을 쳐다보았다.
안국호 부장은 식은땀으로 목욕을 한 채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상 위성 사업과 관련해서 진행한 오성 전자 프로젝트가 모두 안국호 부장과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공동 표준만 해도 오성 중앙 연구소에서 별개로 진행한 일이었다.
아마 오성 계열사가 이번 위성 사업과 관련해서 투자한 비용을 다 합치면 그 규모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걸 새로운 시스템에 맞추어서 다 수정하라고 한다면 관련된 부서가 전부 난리가 난다.
설사 이창명 이사라도 이번 일에 대해서 큰 징계를 받을 수가 있다.
물론 일이 여기서 끝난다면 말이다.
위성 방송 사업 관련 연구원을 수긍시킬 결과가 필요했다.
“…일단 하아, 미치겠네. 아, 정말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창명 이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기 사무실을 왔다 갔다 했다. 이일태 이사가 순간 떠올랐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가 ETRI에 만에 하나라도 영향을 줄 방법은 없었다.
그 역시 이번 일로 안국호 부장 책임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잘 알았다.
이것은 누구 책임으로 돌리는 것보다 대안이 더 중요했다.
이 사태를 덮기 위해서 말이다.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 발표회가 언제라고 했지?”
“일주일 후입니다.”
“그래. 일단 ETRI부터 시작해서 샅샅이 모든 것을 다 뒤져봐.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의 사돈의 팔촌을 다 파헤쳐서라도 대안을 찾아. 할 수 있다면 협박도 해. 설마 우리 오성 그룹과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거야.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안 부장, 너 이 새끼야, 이번에도 제대로 못 하면 넌 끝장이란 거 알아야 할 거다.”
“무, 물론입니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의외로 눈빛을 반짝였다. 그는 잘만 하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최민혁 실장이 이번 사건에도 엮여 있을 테니, 그 점만 발견해도 난 살아날 수 있을거야. 이창명 이사 같은 새끼 성격이라면 뻔하니까.’
* * *
김현우 수석 부장도 이번 일의 심각성을 깨닫자 KM 전자 내부에 있는 이일태 이사를 따로 만났다. 그의 얼굴은 확실히 좋았다.
“김 상무님을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좋습니다.”
이일태 이사는 아부도 늘어놓았다. 그는 지난 좌청룡 우백호 시절의 KM 전자를 떠올리면서 김현우 수석 부장을 계속 찬양했다.
평소라면 김현우 수석 부장도 미소를 짓을 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새로운 위성 시스템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어?”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 위성 사업부에서는 위성 시스템 자체 투자는 하지 않았습니다. ETRI 측에서 투자 제안을 거절했지 않습니까?”
그랬다.
KM 전자도 나름 ETRI 내부에 로비하면서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도 KM 전자 시절에 이 일을 같이 도왔기에 잘 안다. 당시 STB 사업부 역시 ETRI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하지만 ETRI는 오성 전자를 비롯한 10대 대기업의 러브콜에 정신이 없는 상황이다. 고작 중견 기업인 KM 전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되지 않았다.
김현우 수석 부장도 이 점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제 내가 조사한 바로는 상황이 달라. 최 실장이 이번 일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확신해.”
“자, 잠깐만요.”
이창명 이사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숨을 돌린 이일태 이사는 다급하게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최민혁이 뿌린 정보가 ETRI 내부에서도 돌고 돌아서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았다.
거기다 허훈 과장은 뒤늦게야 이 정보를 알아서 이미 위성 사업부 내부는 발칵 뒤집혔다. 이석우 부장은 심지어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한 조성돈 팀장을 찾아가서 대판 싸우는 중에 전화를 받았다.
[그, 그걸 오늘 오전에 알았다고?]
[죄송합니다. 조성돈 팀장이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지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니, 뻔히 위성 사업을 담당하는 게 우리 사업부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정보를 ETRI 협력사 통해서 알아야 했겠습니까?]
이석우 부장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는 솔직히 사내 정치와는 관계가 없었다. 오직 이 위성 사업을 위해서만 일했다.
그런데 정작 아군인 조성돈 팀장에게서 뒤통수를 거하고 맞았으니,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아, 알았어. 내가 회사 들어가면 다시 이야기해.]
“…….”
김현우 수석 부장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ETRI 내부를 아무리 뒤집고, 오성 전자 상황을 아무리 파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 말이다.
‘결국 최 실장 짓이 확실하네.’
새파랗게 질려 있는 이일태 이사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무래도 제가 다시 알아보고, 연락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김현우 수석 부장은 한숨을 내쉰 채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떠나는 이일태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미 자신도 당할 만큼 당한 일이라서 이일태 이사의 미래가 어쩔지는 예측이 가능했다.
이창명 이사가 이 사실까지 안다면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자신이 오성 전자로 이직한 것부터 시작해서 이일태 이사까지 패키지로 자신 역시 엮여 있었던 것이다.
‘이걸 이창명 이사에게 알려야 하나? 아니다, 이건 그냥 입을 다물자.’
* * *
[기획 팀이 정말 우리 회사를 위한 기획 팀 맞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우리 위성 사업부를 배제한 채 위성 사업 일을 진행합니까?!]
쩌렁쩌렁한 이석우 부장의 외침 소리가 KM 전자 기획 팀을 뒤흔들었다.
허훈 과장이 이석우 부장을 어떻게 해서라도 말리려는 시늉을 했다.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 역시 황당하기만 했다.
입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최민수는 그저 망부석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그도 뒤늦게야 이 일이 기획 팀에서 뭔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그 상세한 내막까지는 잘 몰랐다.
마침 이 자리에 나타난 이일태 이사도 이석우 부장을 말릴까 하다가 지켜만 봤다.
“조 팀장님, 말 좀 해보세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여기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니, 회의실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시죠.”
덤덤한 조성돈 팀장의 안색은 부장의 큰소리에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 일과는 무관한 듯 당당하기만 했다. 내막을 잘 모르는 임직원조차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