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김여정도 김상구 회장에게서 재산을 상당히 물려받기는 했지만, 장남 김희찬 부사장이나 김현탁 본부장보다는 물려받은 게 적었다.
그녀는 최훈열 전무와 정략결혼을 하는 대신에 김상구 회장에게서 KM 그룹을 먹는 데 도움을 받기로 했다.
KM 그룹 지분만 먹을 수 있다면 현금이 넘쳐나는 김상구 회장에게서 단단히 돈을 챙길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KM 그룹 지분은 생각보다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최용욱 회장도 문제지만 최두진 사장도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사채업자 출신인 최두진 사장은 뜻밖에 의리가 있어서 돈에 미쳐서 배신하는 타입은 또 아니다.
거기에 최문경 부회장의 아내 김이경은 자신을 감춘 강자였다.
그녀가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최훈열 전무를 부추겨서 일단 KM 전자를 먹는 거였다.
사실 최민혁이 입사하기 전만 해도 계획대로 잘 흘러갔다.
최훈열 전무는 자신에게 반하는 애들을 하나씩 다 정리했다.
그런데 최민혁이 실장에 취임한 이후로 이상한 일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그녀가 계획한 모든 일이 와르르 무너졌다.
남편 최훈열 전무가 감옥에 가버린 것은 그녀조차 상상을 못한 일이다.
졸지에 독수공방하게 된 김여정 속은 타들어가다 못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오, 오랜만입니다.”
김현탁 본부장도 김여정 눈치를 봤다. 아무리 김여정이 몰락했다고 해도 여전히 김상구 회장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그녀이기 때문이다.
김여정 역시 자기 위치를 잘 알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할 것 없고, 위성 방송 시스템은 또 뭐야?”
“아, ETRI에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그게…….”
그녀는 이미 최민수에게 충분한 이야기를 들었고, 따로 조사한 터라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네. 그걸로 왜 KM 전자 기획실에서 왈가왈부해?”
“뭔가 오해가 있겠죠. 위성 사업부 관련된 문제에 기획 팀이 끼어들어서 계약을 조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녀는 옆에 자리한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민수야, 정말 그래?”
따가운 김여정과 호기심이 가득한 김현탁 본부장 시선에 최민수도 머뭇거렸다. 그도 혹시 자신이 실수했나 싶었다.
“…자세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성돈 팀장이 이번 위성 방송 시스템과 관련해서 새로이 계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
김현탁 본부장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사전조사에서 이상했던 점을 떠올렸다. 그는 머리에 번개 맞은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급하게 박태정 부장을 불러 확인해 보도록 시켰다.
이미 최민혁이 작정하고 정보를 흘린 덕분에 그들이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을 아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기존 위성 방송 시스템을 다 뜯어고쳐서 새롭게 만들었다니. 기존 방송의 고질적인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물론 자세한 정보는 더 없었다.
사실 이제까지 조사를 해도 나오지 않던 정보.
전화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튀어나온 점은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현탁 본부장은 제반 상황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 박태정 부장을 불러 다급하게 이 일에 인력을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김여정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니 딱 봐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정작 이 일에 관련도 없는 자신이 이렇게 말을 해야 알아듣다니.
도대체 밑에 그 많은 직원을 두고 뭘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하는 짓이다. 구멍가게도 이런 식으로 안 해. 명색이 DL 계열사가 이게 다 뭐니?!”
“…죄, 죄송합니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급한 지시를 내린 김현탁 본부장은 그제야 식은땀을 닦았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라.’
그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는 애초에 ETRI가 한 프로젝트의 퀄리티 자체를 믿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연구 결과물은 고작 연구 성과에 불과했다.
ETRI 결과물로는 상업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차라리 아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이 훨씬 났다.
그런데 이게 또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DL 정보 통신은 미국이나 유럽 쪽의 시스템을 많이 사와봤기에 그 수준을 잘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쪽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 파악한 바로는 ETRI의 새로운 방송 시스템이 이전 결과물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것이다.
‘어째 쥐새끼처럼 움직이더라. 가만 그러면 설마 이 일이 최민혁 그놈이 관련이 있는 거야?’
김현탁 본부장의 머릿속은 너무 복잡해서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당장 이와 관련된 직원을 불러 모아서 회의를 하고 싶었다.
그 모습에 무시당했다고 느낀 김여정이 버럭 소리 질렀다.
“뭐야?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아, 죄송합니다. 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제가 정신이 없습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네. 이거 큰일입니다. 아마 오성 전자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 난리가 났을 겁니다.”
물론 오성 전자는 아직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난리가 난 건 DL 정보통신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걸 모르는 김여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자세한 것은 다시 검토해 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 기획 팀에서 고려한 스펙 안에 든다면, ETRI 측과 합작회사를 만들어서라도 진행을 해야 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어?”
“당연히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이 시장은 막 시작하는 단계라서 동아시아만 해도 주도권을 잡은 세력이 아무도 없습니다.”
정확히는 이 사업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위성 방송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는 기반만 있다면 지금 시작하는 회사는 얼마든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동아시아 국가와 정부에 대한 주도권을 잡고, 주도권을 잡는다면 다양한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다른 기업과는 달리 인지도가 떨어지는 DL 정보 통신 입장에서 이 사업 주도권을 잡는 것은 최고의 비즈니스였다.
“특히 위성 방송 사업자 선정부터 시작해서 전문 편성 채널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이건 KM 전자 일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래?”
김여정은 위성 방송 서비스 분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터라 그냥 듣기만 했다.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민혁이가 무슨 수로 그 일에 끼어들 수가 있어?”
“그러니 반드시 알아봐야 합니다!”
“그래. 나도 그 정보를 받고 싶으니까. 민수 통해서 자세한 것을 보고해 줘.”
“아, 알겠습니다.”
김현탁 본부장은 잠깐 최민수를 보나 싶었지만, 곧 오성 전자의 이창명 이사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뭔가 조처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빨리 한번 알아봐야겠어.’
* * *
오현종 팀장에게 뒤통수를 맞은 박재호 실장은 나름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이리저리 알아봤다. 그가 특히 걱정한 것은 바로 횡령 문제다. 자칫하면 본인이 감옥에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솔직히 이 일을 이창명 이사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불행히도 상황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 새끼들이 아주 작정을 했구나.’
박재호 실장은 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이창명 이사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는데, 문제는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니란 점이다.
이창명 이사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화를 내기도 뭐했다.
위성 방송 시스템에 뭔가 변화가 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그는 안국호 부장과 김현우 수석 부장을 불러 조사를 시켰다.
안국호 부장은 김현우 수석 부장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지시를 최대한 따랐다.
최민혁이 이미 정보를 흘리라고 한 덕분에 송한성 교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조재현 박사 통해서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곧 얻을 수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이 정보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ETRI에서 지금까지 진행한 위성 방송 시스템은 생각보다는 문제가 많았다.
과연 이대로 상업화가 성공할지도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위성 방송 사업과 같은 제대로 성공만 하면 돌아올 파이가 클 일을 또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송한성 교수 연구 팀에서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 이야기가 나와 ETRI 연구팀은 그 제안을 받아서 수정까지 진행했다고 한다.
그건 정말 개연성이 없는 막장 소설보다 더 황당한 전개였다.
안국호 부장은 결국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과 관련이 있는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 연구실을 차례로 찾아갔다가 분노한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에게 물벼락을 얻어맞고 말았다.
“안 부장, 당신은 양심도 없는 개새끼야? 지난 일을 벌써 잊은 거야?!”
잊을 리가.
자신도 자기가 한 짓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헐값에 연구 성과를 가로챈 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
연구 용역을 맡긴 업체를 압박해서 연구도 중간에 중지시켰다.
한국대 총장에게 압력을 넣어서 별의별 쇼를 다 벌였다.
특히 이동호 교수는 이제 오성 전자라면 학을 떼는 사람이었다.
안국호 팀장은 송한성 연구 팀과 동시에 ETRI 쪽을 파고 또 파헤쳤다. 다행히 발표회 때문에 보안이 약화됐고, 드디어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특허권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새로 작업한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해서 알고 나서는 큰 충격에 빠졌다.
디코더 쪽에 수정 작업이 너무 많아서 오성 전자 측에서 제안한 규격은 다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크, 큰일 났다.’
* * *
안국호 팀장은 이창명 이사가 이 사태를 알면 어떻게 행동할 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는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가 그러다가 생각난 사람은 이번 일에 합류한 김현우 수석 부장이다.
자신이 아니라 김현우 수석 부장이 이 일을 안 것으로 처리한다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의외로 안국호 부장 대신에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그게 특허 문제 때문에 ETRI에서 그 부분을 배제하기 위해서 내부적으로 시스템을 수정했나 봐.”
묵묵히 듣기만 하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이번 일도 최민혁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가 특히 주목한 점이 있었다.
“수신기 비용이 너무 비싸서 오성 전자 자체 스펙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그러면 아예 새로 다 만들어야 하는 겁니까?”
욕심 많은 안국호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 특허 비용이 만만치 않으니까.”
“그걸 자세하게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시즈벨이란 특허 대리인이 그 일을 담당한다고 하는데, 우리로서도 쉽지 않은 상대야.”
새로 듣는 이야기에 김현우 수석 부장은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특허 저작권자가 누구기에 그렇습니까?”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야. 참고로 둘 다 우리랑 사이가 좋지 않아. 거의 원수지간이지.”
전형적인 오성 전자의 수법에 그들이 당한 것을 눈치챈 김현우 수석 부장은 혀를 찼다. 그들 처지를 충분히 이해했다.
그 자신만 해도 안국호 부장에게 엄청나게 당했다. 솔직히 그와 같이 일하고, 대화하는 지금 상황조차 신기했다. 아니, 그는 자신의 생존 때문에 원한을 가슴 깊숙이 숨겨두었다.
자신이야 갈 곳이 없어서 개같이 버티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다르다.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처럼 스스로 살 길이 있다면 굳이 오성 전자와 타협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오성 전자에 대한 원한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협상은 어렵겠군.’
김현우 수석 부장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악문 채 최두진 사장과 만났던 일을 떠올리면서 표정 관리를 했다.
‘지금 있는 오성 전자에서 인정을 받아야 아버지께 재산을 증여받아도 받아. 그렇지 못하면 난 정말 끝장이야.’
절망적인 상황에 안국호 부장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정된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이 기존 시스템의 많은 문제점을 극복했다는 거야. 미국에서 만든 시스템보다 더 압도적이라고 하니까. 물론 사실을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그 말의 반만 맞아도 괜찮은 사업이야.”
특히 오성 전자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이번 디지털 위성 서비스 사업을 주도해서 사업자 선정을 포함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성과를 토대로 향후 CDMA와 같은 무선 통신망 사업에 대한 우선권도 확보할 수 있었다.
오성 전자에게는 이 위성 방송 서비스가 단순히 서비스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오성 전자 이사회에서 몰랐다면 상관이 없어도 만약 자기 입안에 들어온 먹이를 도둑맞았다는 소리를 듣게되면 이건 안국호 부장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창명 이사도 큰 타격을 받는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김현우 수석 부장은 오로지 ‘최민혁’만 고민했다. 그는 최민혁이 분명히 이 일에도 영향력을 미쳤다고 봤다.
‘…최 실장 수법과 비슷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