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패닉에 빠진 박재호 실장은 그제야 두 사람이 아주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 설사 그렇다고 해도 너희 두 사람 뜻대로 될 것 같아? 오성 전자가 이번 일을 용납할 것 같냐고. 절대로 안 그래!”
소심한 성격이기는 하지만 머리가 좋은 오현종 팀장은 지금까지 마음 깊숙이 꿍쳐놓은 자기 생각을 털어놓았다.
“오성 전자가 용납 안 하면 뾰쪽한 수가 있습니까. 상대는 시즈벨인데, 아마 오성 애들도 적절하게 타협을 하려 할 겁니다.”
“야, 오 박사,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지금까지는 저도 참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행동은 선을 넘은 겁니다.”
“…….”
‘이 새끼가.’
박재호 실장은 새파랗게 굳은 얼굴로 오현종 박사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단 한마디 큰소리도 하지 않던 이가 오현종 박사다.
그런데 막판에서 와서 절묘하게 자기 뒤통수를 치다니.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나 싶었다.
“오 박사는 내가 아는 사람과는 다른 것 같아.”
“사람마다 다 숨겨놓은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박 실장님이 선을 넘지 않았다면 이런 문제는 안 생겼을 겁니다.”
“하, 기가 막히네.”
설마 오현종 팀장에게 뒤통수를 맞을지는 상상도 못 한 박재호 실장은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손가락으로 삿대질까지 하면서 방방 뛰었다.
“야, 오 박사, 소송이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줄 알아?!”
하지만 오현종 팀장은 심드렁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그래서 더 문제죠. 만약 소송이 길어지면 위성 방송 사업은 다 중단되는데, 오성 전자도 손해가 엄청날 겁니다. 더욱이 이번 일에 이미 수천억을 퍼부은 정보통신부에서 가만히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어차피…….”
이미 단단히 마음먹은 오현종 박사는 박재호 실장 말을 중간에 끊어버렸다.
“설사 소송이 길어져도 특허권자는 별로 손해 보는 것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ETRI, 오성 전자, 정부만 치명타를 입을 거고, 각종 소송에 시달릴 겁니다. 그 책임을 박 실장님이 다 지실 겁니까?”
“…….”
박재호 실장도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 보니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기업이 뜻밖에도 이번 사업에 투자를 가장 많이 한 오성 전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정보통신부 측에 이번 위성 방송 사업과 관련해서 달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일단 결과만 나오면 적당히 넘어갈 것이라는 공무원들의 성향을 노렸다.
그런데 만약 결과는 고사하고 소송전으로 비화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언론 기사에 한국 정부, 시즈벨에게 대규모 소송을 당하다란 기사가 나온다면 자신은 절대로 살아남기 어려웠다.
아니 ETRI에서 그만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부에서 보복을 당할 수도 있었다.
‘이 죽일 놈의 새끼들이.’
하지만 여전히 자기 권력을 포기하지 못한 박재호 실장은 이를 악물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다른 연구원들이 너희 두 사람을 옹호할 것 같아?”
안현종 박사는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툴툴거렸다.
“그거야 그들에게 이번 연구와 관련된 결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면 됩니다. 어차피 이 바닥은 실력이 최고라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럽니까?”
그래도 박재호 실장은 똥고집을 부렸다.
“흥, 너희 두 사람 뜻대로 안 될 거다. 내가 정통부 담당자를 만나서 그렇게 흘러가도록 두지 않을 거다!”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사 오성 전자나 정부가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이 결과가 나온 이상 그들은 이 결과를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안 될 거다!”
결국 분노를 터뜨리면서 나가는 박재호 실장을 보자 오현종 팀장은 히죽 웃었다.
오히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면서 오현종 팀장의 다른 모습을 발견한 김승구 팀장이 혀를 내둘렀다.
“오 팀장님이 그런 말을 다 하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당하고만 살 수 없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오현종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 저라고 해서 자존심이 없겠습니까. 지금까지 참았지만,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박재호 실장이 엉뚱한 짓을 벌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오현종 팀장도 그 부분은 인정했다.
“아무래도 최 실장에게 사전에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최 실장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제가 최근 조사한 바로는 이창명 이사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위성 방송 시스템 지분의 소유자가 최민혁 실장이라는 겁니다. 우리로서는 최 실장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차명 이야기가 나오지만, KM 전자의 지분 대다수를 소유한 이가 최민혁 실장이니까.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런데 정말 최민혁 실장이 KM 전자의 실소유주일까요?”
“저도 최민혁 실장이 차명 지분 관리 때문에 오성 전자의 지분을 증여받은 안지연 같은 경우라고 생각했는데, 최 실장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최 실장에게도 지금 사정을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겠네요.”
“그래야죠.”
오현종 팀장은 겉으로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실제로 그는 이 문제에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괜히 폭탄 맞을 필요는 없으니까.’
* * *
최민혁도 오현종 팀장에게 박재호 실장과 관련된 연락을 받고 나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최근 월마트 사태를 떠올리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 아닐까요?”
“아뇨. 일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물론 최민혁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김부영 영업 팀장 외에도 지난 MP3 회의에 참석한 실무진들의 태도가 죄다 달라졌다. 그들은 이전과는 달리 당당한 자세로 업무에 임했다.
밑에 임직원이 불안해하면 찍어 눌렀다.
일방적인 행동 같아도 임직원이 바보가 아닌 이상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콜린스 사태 때에 이미 다들 한 번쯤은 경험해 봤기 때문이다.
다만 그 내막이 뭔지 몰라서 이런저런 이야기만 떠돌았다.
있다고 한다면 최근 본사 내부에 설립된 연구소 내에서 뭔가 일이 진행된다는 것만 알음알음 퍼졌다.
문제는 장승일 실장이 최근 들어서 부쩍 연락하거나 아니면 기획조정실에 있는 직원이 자기 회사 동기와 자주 술집에서 만난다는 점이다.
외부 시선과는 달리 KM 그룹 내부의 인물은 KM 전자의 임직원에게도 부담스러웠다.
조성돈 팀장으로서는 이런저런 소리를 계속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최근 들어서 회장님도 과거와는 달리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실장님의 경영 행보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습니다.”
“경영 승계 후보자이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평가를 하기 위해서는 알아야죠.”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보기는 힘듭니다.”
오영근 사장의 중재안을 떠올린 최민혁은 툴툴거렸다.
“뭐 얼마 전처럼 할아버지가 딴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래 봐야 큰 의미가 없어요. KM 계열사 중에 KM 산업, 건설 빼고 나면 뭐가 있다고 신경 씁니까? KM 전자의 시가총액을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조성돈 팀장도 찍소리 못 하고 말았다. 지금 현재 KM 전자의 주가에는 아직 MP3 가치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MP3가 출시되고, MP3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진다면 KM 전자 주가가 얼마까지 올라갈지는 그조차 몰랐다.
최민혁은 고루한 조성돈 팀장 행동에 피식 웃으면서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처음부터 TV 사업부 매각 이야기해 봐야 오성 전자도 고민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월마트 같은 세계적인 유통업체와의 관계를 슬쩍 알려주면 상황이 달라져요. 월마트에게 을이었던 오성 전자 처지에서 우리 TV 사업부가 얼마나 달달한 먹거리겠습니까?”
“설마 월마트 일도 그렇고, ETRI 일도 TV 사업부 매각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란 말씀입니까?”
“그렇죠. 지금은 월마트 계약에 관해서 조사만 하겠지만 돌아서면 또 이야기가 다르죠. 오성 전자 자신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다른 대기업도 이런 정보를 얻는다면 TV 사업부에 흥미를 보일 겁니다.”
“…….”
조성돈 팀장은 설마 TV 사업부 매각을 위한 작업을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몰랐다. 그도 과거와는 달리 TV 사업부 매각에 무조건 반대를 외치지 않았다.
“하긴 후지쓰만 해도 올해 들어와서 1,500억 가까이 투자해서 벽걸이형 PDP TV 양산 체제에 벌써 들어갔다고 하니.”
후지쓰는 앞으로 3년 동안 PDP TV 분야에만 집중해 천문학적인 투자로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히타치를 비롯한 경쟁 회사 행보를 보면서 그 뒤를 따른 것이다.
최민혁은 물론 이에 대해서 조성돈 팀장은 묘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툴툴거렸다.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만 PDP TV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사실입니다. 뭐 일본 업체는 대대적인 삽질일 겁니다.”
“…실패한다고 보는 겁니까?”
“소비자가 바보가 아닙니다. 수명 문제를 비롯한 근원적인 문제가 많은 PDP에 대해서 점점 실망할 겁니다. 그러니 시간이 갈수록 PDP 시장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히는 일본 업체의 PDP 투자는 세계 경제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대실패하게 되지만 굳이 최민혁은 그런 세세한 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눈치가 제법 빠른 조성돈 팀장은 대충 짐작만 한 채 최민혁이 늘 이야기하는 LCD 예찬론을 떠올렸다.
“결국 LCD가 답이라는 말씀이군요. 하지만 우리 기획 팀에서 검토한 바로는 액정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민혁은 순간 LCD 관련 기억을 쭉 떠올렸지만, 곧 털어버렸다.
“그건 나중에 보면 알 겁니다.”
조성돈 팀장도 LCD 쪽은 자기 사업과는 거리가 멀어서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이 새삼 MP3 사업에 공을 많이 들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병연 팀장을 만나서 MP3 사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뜻밖에도 MP3 사업이 콜린스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들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
아직도 콜린스를 만든 최병연 팀장이 지금 와서 MP3를 선택한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과거 최민혁이 했던 최병연 팀장이 스스로 MP3를 선택하게끔 한다는 그 말을 지킨 셈이다.
다만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MP3가 국내 시장은 그렇다고 해도 과연 외국 시장에서도 먹힐까요?”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게 문제죠. 아직은 MP3가 큰 트렌드를 이룰 정도까지는 아니니까. 시간이 해결할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다른 대안을 찾아봐야죠.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하는데, 정 안되면 우리가 그 시대를 만들면 그뿐이죠. 그러면 MP3란 영웅은 자연스럽게 탄생할 겁니다. 그래서 굳이 돈이 안 되는 다른 사업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성 사업부 말씀이군요.”
황당한 최민혁 포부에 조성돈 팀장은 차마 뭐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최민혁이 정말 MP3 시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네.”
“그랬군요.”
최근 ETRI와 월마트 사건을 다시 떠올린 조성돈 팀장은 새삼 놀란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얼핏 보면 MP3와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다 연결되어 있었다.
최민혁은 음모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짓은 채 툴툴거렸다.
“솔직히 이일태 이사 건은 그저 맛보기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위성 사업부를 헐값에 넘겨서는 곤란하죠. 다만 STB 매각 건도 있으니, 이번에 제대로 위성 사업부를 보기 좋도록 포장해서 넘겨야 할 겁니다. 그래야 오성 전자가 더 눈독을 들일 테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위성 방송 디코더야 고만고만한 사업이지만 위성 방송 시스템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마 꽤 돈이 될 겁니다.”
‘아니면 말고.’와 ‘그 매각 대금은 우리가 골치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란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조성돈 팀장도 이제는 대충 알아들었다.
“그렇군요.”
“다른 쪽은 몰라도 통신망에 집중하려는 우리 사돈 기업인 DL 그룹은 이야기가 다를 겁니다.”
장승일 실장과 만나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린 조성돈 팀장은 혀를 내둘렀다.
“하긴 회장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 사람이 DL 그룹 박상구 회장이란 소리가 있던데, 그게 또 그런 의미이겠군요.”
“이미 말했지만, 특히 DL 정보 통신의 김현탁 본부장은 위성 사업 시스템에 알면 설사 오성 전자가 상대라고 해도 달려들 겁니다.”
“…혹시 두 기업을 이간질하려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