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50만 대라, 많네.”
최용욱 회장도 이 물량이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미국 시장이 뚫리면, 동남아, 중동을 비롯한 전 세계 시장으로 수출 물량이 확대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낙관적인 추론이 아니었다. 이미 국내와 유럽 시장을 토대로 콜린스의 퀄리티는 이미 검증이 끝나서 몇 달 전과는 상황이 또 달랐다.
‘월마트 그놈들이 그래서 민혁에게 행패를 부렸겠지.’
장승일 실장도 툴툴거렸다.
“대신 투자를 받고 나면 월마트 쪽에 이익을 나눠줘야 하는데, 최 실장님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민혁이 그놈 성격에 남 좋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겠군.”
“그럴 겁니다.”
이일태 이사 때문에 고민했던 최용욱 회장도 선뜻 콜린스와 관련된 월마트 문제를 가지고 최민혁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오영근 사장의 행동 변화 때문이다. 그가 아는 오영근 사장은 결코 무모한 행동을 하거나 극단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는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영근 사장이 최민혁을 감싸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어야 했다.
‘내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 사장이 그런 식으로 나온 적은 없어.’
“오 사장이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는 파악했나?”
“…그게 아직 조사 중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기획 조정실에서 계열사의 내부 사정도 몰라?!”
“그게 최훈열 전무와 김현우 상무가 나간 후에 KM 전자의 내부가 완전히 물갈이되면서 내부 사정을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최문경 부회장과 갈등이 심화하면서 다들 몸을 사리는 중이라서 더 힘듭니다. 그나마 남은 이라면 이일태 이사인데…….”
“민혁이 그놈이 이일태 이사에게 제대로 정보를 줄 리가 없겠군.”
“네.”
“쯧.”
최용욱 회장은 혀를 차면서도 장승일 기획실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월마트 문제는 일단 지켜봐. 민혁이 그놈이 어떤 녀석인데, 생각 없이 월마트를 건드리겠어?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지금까지 사정을 봐도 당당히 자기주장을 한 것뿐이잖아. 그런 일까지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어.”
“알겠습니다.”
* * *
권태성 실장은 월마트 사건을 장승일 실장이 안다면 뭔가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KM 그룹 쪽에서는 전혀 반응이 없다는 보고를 받자 혀를 찼다.
“생각보다는 최 회장이 최민혁 실장을 높이 평가하는군.”
이번 월마트 사태에 최문경 부회장도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을 파악한 황광수 차장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 어쩔 수 없잖아. 최 회장도 바보가 아니니까.”
그가 최근 KM 그룹에 대해서 진행한 일이 다 흐지부지되었다. 이제는 KM 그룹을 쉽게 보지 않았다. 다소 초조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ETRI 일은 어떻게 돌아가?”
“일단 이일태 이사는 잘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창명 이사는 김현우 상무를 데리고 뭔가 계획하는 것 같은데, 아직 특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ETRI 쪽 주요 인물을 만나서 라인 관리만 하는데,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습니다.”
“…이일태 이사를 통해서 최민혁 실장을 관리할 수 있을까?”
임권수 부장은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일태 이사만으로는 힘들 겁니다. 다만 그 배후가 누구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인데, 이번 일에 KM 그룹의 장승일 실장이 직접 움직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KM 그룹 비서실 내에서는 다른 때와는 좀 다르다는 이야기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최용욱 회장이 최민혁 실장에게 증여한 지분이 대략 30%가 넘는데, 지금 KM 전자의 주가인 9만 원으로 치면 무려 9천억이 넘습니다. 아무리 최용욱 회장이라고 해도 무려 9천억이 넘는 돈을 손자에게 증여할 리가 없습니다.”
9천억이란 말에 권태성 기획실장도 잠깐 충격에 빠졌다.
너무 큰돈에 괴리감마저 느꼈다.
“…그때는 1,500원 가격이었지 않아? 아, 하긴 속이 쓰리겠네. 배가 아프긴 하겠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증여했다고 해도 그 금액이 9천억이 넘어가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미국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한국 10대 대기업 회장이라도 이렇게 엄청난 돈을 증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최용욱 회장도 지금은 심사가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으음, 확실히 최용욱 회장이 이일태 이사를 밀어준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어. 가만 이창명 이사가 그 일까지 아는 거야?”
“김현우 상무의 아버지인 최두진 사장이 최용욱 회장과 친합니다. KM 그룹 대주주이기도 하고, 그가 가진 지분을 최민혁 실장이 실소유주인 벨만 투자 회사에서 매각했습니다.”
“…그렇군.”
솔직히 배가 아픈 권태성 실장은 KM 전자 주식 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상상조차 하기도 싫었다. 한국 재벌 2세나 3세 중에 과연 저만한 자산을 가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떠올려 봐도 선뜻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월마트가 아니라 우주마트라고 해도 신경 안 쓰겠어.”
“아마 그래서 장승일 실장도 최민혁 실장을 그냥 지켜만 보는 걸 겁니다. 안 그래도 경영 승계 문제가 걸려서 최문경 부회장과 갈등 중인데, 월마트 사태까지 간섭하기에는 부담스러울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지켜만 봐야 할까?”
임권수 부장도 이전에는 최민혁 실장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도 최민혁 실장에게 당하고, 황광수 차장에게 조언을 들은 후라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자칫하면 이 일로 권태성 기획실장까지 물러나면 자신은 회사를 그만둬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물러나서 일의 추이만 지켜봤는데, 장승일 실장의 행보를 보자 섬뜩한 생각이 들어서 결국 평소와는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현재로서는 그게 좋지 않겠습니까? 월마트 일만 해도 석연치 않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어떤 사람인데, 이 정도에서 일을 끝내겠습니까. 만약 우리를 끌어들일 목적으로 덫을 놓았을 수도 있습니다.”
“월마트를 이용해서 말인가? 아니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고?”
“…그건 현재로서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차라리 지켜보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월마트가 딱히 신뢰할 만한 기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분을 요구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건 그래. 그러면 이번 일은 그냥 지켜보는 것으로 하지. 월마트에서 뭐라고 하면 그냥 검토 중이라는 말만 해.”
“알겠습니다.”
권태성 실장도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월마트를 마냥 믿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다른 유통업체도 많으니까.’
* * *
마크로 밀러 이사는 권태성 실장을 몇 차례나 만나서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그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사소한 갈등이지만 이 일이 오성 물산과 월마트의 협상에도 악영향을 줬다.
정확히는 명분이 되었다.
월마트와 오성 물산의 합작사에 대한 지분 문제로 결국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마크로 밀러 이사도 더는 무리하게 오성 그룹과 갈등하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다른 대안이 없자 KM 전자와의 소송도 적당히 물러나는 척하면서 KM 전자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다.
월마트가 놀랍게도 KM 전자와의 1차 협상에서 패배를 시인한 것이었다.
마크로 밀러 이사로서는 뼈아픈 실수였다. 이 일 때문에 롭스 월마트 사장에게 불려 가서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마크로 밀러 이사가 KM 전자와 분쟁해서가 아니라 그 갈등에서 일방적으로 꼬리를 말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마크로 밀러 이사도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은 그만큼 미국 소비자의 콜린스에 대한 욕구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예상을 벗어난 이 결과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쉽네, 잘만 하면 이 일을 오성 전자와 엮은 후에 이일태 이사까지 같이 묶어서 일을 좀 더 키울 수가 있었는데…….’
권태성 실장도, 장승일 실장도, 할아버지도, 마크로 밀러 이사같이 자존심이 강한 이들이 다들 KM 전자 앞에서 꼬리를 만 것이 신기했다.
조성돈 팀장은 물론 생각이 좀 달랐다.
“후유, 겨우 한숨 돌렸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뇨. 이번 일은 월마트와 당당하게 싸우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래야 다른 유통업체가 우리를 얕잡아 보지 않아요.”
“꼭 그렇지 않아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저희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 다 압니다.”
“아뇨. 그 정도로 부족해요. 뭐, 제가 투견도 아니라서 더 이상 진흙탕 싸움을 못 한다는 것이 더 아쉽습니다.”
“일단 후속 조치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협상은 다시 시작하는 겁니까?”
“네. 영업 팀의 장창식 차장이 직접 미국 월마트 본사를 갈 겁니다.”
“그쪽에서는 우리가 제안한 계약서대로 하겠답니까?”
“아직 주문 물량을 토대로 몇 가지 조율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그쪽 입장입니다. 워낙에 거래 규모가 커서 말입니다.”
“알았습니다. 하지만 영업 팀에 굽힐 생각은 말라고 전해주세요. 월마트 아니면 다른 유통업체와 거래하면 되니까.”
“네.”
조성돈 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최민혁 실장의 쇠고집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이쪽의 일방적인 요구를 월마트가 들어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잘되기는 했는데, 정말 벼랑 끝 전술만 구사하는 것 같아.’
* * *
이번 월마트 사태에 가장 좋아하는 이들은 역시 영업 팀이었다.
김부영 영업 팀장도 내심 쫄기는 했지만 일이 잘 풀린 것에 만족했다. 다만 오히려 장창식 차장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야, 장 차장, 미국 출장 계획 보고서는 언제 올릴 거야?”
“…알겠습니다.”
이번 일을 걱정하던 장창식 차장은 일이 그나마 정상적으로 풀린 것에 안도했다.
영업 팀의 다른 이들은 영문을 몰라서 눈동자만 굴렸다.
일이 다 끝나고 나서야 월마트 협상의 전말을 파악한 이들은 그제야 혀를 내둘렀다.
그들 역시 KM 전자가 월마트와의 협상에서 이렇게 단호할 줄은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최민혁 실장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는 말에 더 놀랐다.
최민혁은 물론 다시 안정을 찾은 영업부의 모습에 만족했다.
월마트 사태를 통해서 회사 핵심 구성원도 이제 안정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그 이상 정보를 알리지 않은 것은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TV 사업부 매각 역시 단기로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다.
매각 대금부터 시작해서 조율할 것이 상당히 많았다.
최하가 1년, 적어도 2년은 잡아야 할 일이다.
다만 위성 방송 사업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봤다. 의외로 이 사업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위성 방송 사업 서비스까지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민혁은 때마침 오현종 팀장에게서 시스템 수정 작업이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 협상한 대로 일을 진행하세요. 아, 이번 일은 저도 모르는 겁니다.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가 주도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합시다.]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오현종 팀장 역시 최민혁 실장이 굳이 나서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창명 이사가 이번 일의 배후에 최민혁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곤란했기 때문이다.
오현종 팀장은 김승구 팀장과 같이 박재호 실장을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다.
“뭐?!”
일단 경악한 박재호 실장.
박재호 실장은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화를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해?!”
“시즈벨이 이동호 교수와 송한성 교수의 법적 대리인이라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쪽의 제안을 거절하면 미국 법원에 먼저 소송을 걸 겁니다. 그러면 위성과 관련된 모든 일은 당장 중지입니다.”
협박은 꽤 힘이 있었다.
분노한 박재호 실장은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대안을 내놓은 오현종 팀장의 또 다른 협상.
문제는 이 제안을 받으면 기존에 했던 프로젝트를 다 엎어야 했다.
“너희 미친 것 아냐. 그러면 손실을 누가 다 책임질 건데?!”
“…….”
두 사람은 따가운 시선으로 박재호 실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야, 설마 날 보고 책임지라는 거야?!”
“어차피 송한성 교수의 연구물을 도둑질한 것은 박재호 실장님 지시였습니다. 여기 증거로 녹음테이프까지 있습니다.”
만약을 위해서 준비해둔 녹음테이프.
박재호 실장은 길길이 날뛰면서 녹음테이프를 부숴 버렸다.
“카피 본은 수십 개가 있으니, 그래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번 일은 실장님이 책임지고 물러나는 것으로 하시죠. 오성 전자 측에는 개인적인 일로 그만둔다고 하면 깔끔합니다. 안 그러면 검찰에 고소까지 진행될 겁니다. 업체에서 돈 받은 것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