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KM 전자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오성 전자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니 콜린스 모델 계약을 좀 도와주십시오.”
어이가 없는 권태성 기획실장은 혀를 내둘렀다.
“월마트 같은 업체가 KM 전자와의 협상에서 밀린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미친놈 컨셉으로 나오는 KM 전자의 행동을 떠올린 마크로 밀러 이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처음에는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협상을 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쪽은 설사 계약이 안 되어도 좋다는 심보입니다. 무조건 노라고 하는데, 아주 진절머리가 납니다!”
“…….”
권태성 기획실장이 만약 최민혁 실장에게 뜨거운 맛을 몇 번이나 보지 않았다면 도저히 믿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는 월마트 계약의 배후에도 최민혁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도대체 최 실장은 뭘 하고 다니는 거야?!’
그런데 이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유럽에서 콜린스의 인기가 폭발하면서 그 입소문이 미국 소비자에도 퍼졌다.
열광적인 미국인은 월마트를 상대로 계속 콜린스 판매를 요청을 했다.
그러니 월마트 입장에서도 고객 클레임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KM 전자 해외 영업 팀과 협상을 진행했는데, 도대체 그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협상이 잘되지 않고, 오해가 깊어진 것은 자존심 대립 문제 같아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월마트가 콜린스의 미국 내의 소비자 수요를 파악한 바로는 그 수량이 무려 50만 대가 훌쩍 넘어갔다. 한화로만 무려 2조가 넘는 물량이다.
아무리 월마트 매출이 큰 기업이라고 해도 2조가 넘는 매출액을 무시하기 힘들다.
그러니 전초전에서 KM 전자를 압박해서 협상에서 최대한 우위를 차지하려 한 것이다.
최민혁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기에 좀 무리하면서까지 KM 전자에 유리한 계약을 요구한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번 사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고, KM 전자의 초기 계약서대로 따르지 않으면 콜린스를 팔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내막까지는 잘 모르는 마크로 밀러 이사는 푸념을 털어놓았다.
“KM 전자의 조건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AS 관련 비용 문제인데, 그걸 우리 월마트가 다 전담해야 한다는 겁니다.”
권태성 실장조차 혀를 내둘렀다.
“제품 관련 비용의 전부를 말입니까?”
“네. 반품 처리와 관련된 비용을 포함해서 자잘한 모든 비용은 월마트가 선처리 하고, 만약 KM 전자 제품 자체의 결함이 확실하였을 때만 따로 보상한다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미국법 기준이 아니라 한국법 기준이라는 점에서 문제이다.
실상 데니스 킴을 이용한 갑질도 다 이 일이 빌미가 된 것이다.
그 일이 제법 커져서 후에는 소송전으로 진행되었다.
일단 급한 불을 끄기는 했지만, 배상까지 일단 KM 전자에 해주었다.
그리고 나면 다시 계약 협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KM 전자에서 소송을 계속 밀어붙이겠다고 하는군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KM 전자 측에서 계약은 앞으로 없던 거로 하겠다고 일방적인 통보를 해온 것이었다.
마크로 밀러 이사도 대화하다 보니, 화가 단단히 났다.
“하, 저도 많은 해외 업체를 상대해 봤지만, KM 전자 같은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아, 맞다. 오성 전자에서 콜린스 대응 제품 개발을 하지 않습니까? 그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계약하겠습니다.”
“…그건 좀 어렵습니다.”
아니, 권태성 기획실장도 바보가 아닌데, 콜린스를 대응할 제품 개발을 검토했다.
불행히도 오성 전자 중앙 연구소 소장이 안 된다고 명확하게 답변했다.
그는 콜린스의 분해물을 직접 보여주면서 조목조목 어려운 점을 지적했다.
다양한 기술적인 장벽이 존재했다.
그걸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대로 베끼는 것이다.
문제는 KM 코일이나 KM 고압 변성기는 전부 다 특허로 걸려 있었다는 점이다. 특허를 피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을 변경해야 한다.
그렇게 한 경우에는 조금만 틀어져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 드러났다.
따라서 아예 다 새로 디자인을 해야 하는데, 그 기간이 최하가 2년, 길면 3년이 걸린다. 그렇게 해도 콜린스만큼의 퀄리티가 나온다고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개발 진행은 들어갔는데, 힘들다는 이야기는 이미 분명히 했어.’란 내부 사정까지 마크로 밀러 이사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더 심각한 점은 3년이면 차세대 디스플레이가 상업화될 시점이다.
오성 전자가 설사 콜린스 대응 제품을 개발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때쯤이면 차세대 디스플레이에 밀리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미 소니를 비롯한 많은 업체를 상대로 콜린스 스타일의 제품을 요청한 마크로 밀러 이사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일만 그쪽에서 도와준다면, 앞으로 오성 전자 제품의 월마트 납품에 다양한 혜택과 특혜를 드리겠습니다.”
“…내부적으로 검토를 해보겠습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콜린스 문제를 넘기고 나자 마크로 밀러 이사 태도가 냉랭해진 것을 깨달았다.
마크로 밀러 이사는 이번 일을 도와주지 않으면 이번 제휴도 HY 그룹이나 대운 그룹 쪽과 손을 잡을 수 있다고 넌지시 밝혔다.
“…….”
‘뭐 이런 개같은 경우가 다 있냐.’
권태성 기획실장은 내심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겉으로는 계속 웃었다.
이 자리에서 화내봐야 그다지 좋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 * *
마크로 밀러의 부탁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권태성 기획실장도 막상 KM 전자 계약서 원본을 보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막 나가네. 미국 수출할 생각은 있는 걸까? 아니면 월마트 아니라도 다른 유통 업체를 통해서 미국에 콜린스 판매를 하겠다는 건가?’
황광수 차장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계약 당사자가 고압적으로 나왔다면 충분히 그러고 남지 않을까요?”
“월마트 측에서 갑질을 일삼았다고?”
“그 작자들 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 KM 전자는 월마트 입장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이니, 여러 가지 제반 비용을 덤터기 씌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 까칠한 최민혁 실장이 과연 그런 월마트 행패를 보고 참았을까요?”
“하긴.”
권태성 실장도 마크로 밀러 이사와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그가 경험한 최민혁 실장은 절대로 그런 행동을 두고 볼 사람이 아니다.
‘아마 보복을 하겠지.’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최민혁 실장이 권태성 실장 자신에게만 그렇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월마트 상대로도 행패를 부린다니.
황광수 차장이 최근 이일태 이사를 죽이기 위한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걸고 넘어갔다.
“같은 회사에서 자기에게 반기를 든다고 이일태 이사를 매장해서 죽이려 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입니다. 그런 사람이 윌마트라고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이번 월마트 미국 소송도 갈 데까지 갈지 모릅니다.”
이제까지 최민혁 실장에게 쌓인 것이 많은 권태성 실장은 푸념을 털어놓았다.
“난 솔직히 속이 다 시원해. 월마트나 최민혁 실장이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고 싶어. 생각만 해도 다 통쾌하다니까.”
“권 실장님…….”
“아,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야.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이봐, 임 부장 자네는 어때?”
다른 일이라면 황광수 차장에게 반대 의견을 내고도 남은 사람이 임권수 부장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상대가 미국 월마트이기에 황광수 차장 의견에 손을 들었다.
“인종차별까지는 아니어도 그 못지않게 괴롭혔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그들에게 이익이 되니까. 특히 콜린스의 유럽 반응을 본다면 콜린스를 통해서 미국 시장에서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걸 이용해서 압박했을 겁니다.”
실제로도 그랬다.
월마트와 KM 전자 영업 팀이 만나서 계약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앙심을 품은 월마트 실무진 측에서 여러 가지 압박성이 짙은 말을 꺼냈다.
KM 전자 해외 영업 팀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너무 많은 수요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아무리 월마트라고 해도 대응할 필요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민혁의 대응이다. 그는 애초에 상황을 키울 목적이었다. ETRI에 이어서 월마트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최민혁의 생각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돌아가는 영문을 알 수가 없다.
결국 머리가 너무 아파서 두통약을 챙겨 먹은 권태성 실장은 일단 심호흡부터 했다. 그는 가능하면 KM 전자 일에 연관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그럴 수가 없었다.
ETRI 일보다 우선 이 월마트 사태를 해결해야 했다.
“방법이 없을까?”
임권수 부장은 지난 일 때문에 몸을 사렸다.
결국 나선 것은 황광수 차장이었다.
“차라리 장승일 실장을 이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무리 KM 전자에 영향력이 줄었다고 해도 그룹 내에서도 월마트와 부딪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장승일 실장은 아직 이 일을 모른다는 말인가?”
“거긴 지금 그룹 승계 문제 때문에 정신이 있습니까. 월마트 일은 생뚱맞을 겁니다. 아마 장승일 실장이 이 일을 알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괜찮네. 일단 한번 진행해 봐.”
“알겠습니다.”
* * *
황광수 차장은 임권수 팀장과는 달리 KM 전자에 있으면서 꽤 많은 사람과 잘 지냈다. 그는 그들 중에 얼마 전에 차장으로 진급한 구길모 차장을 만나서 월마트 사정을 말해주었다.
물론 빙빙 돌려서 이야기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룹 승계에 대한 갈등 문제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 최민혁 기획실장을 들여다보고 있는 구길모 차장은 즉시 추가 조사를 진행한 후에 장승일 실장에게 보고했다.
장승일 실장은 한숨부터 내쉬었고, 이번 일은 예민한 안건이기 때문에 최용욱 회장을 직접 찾아가서 알렸다.
최용욱 회장은 최근 오성 그룹의 행보나 DL 그룹 동태를 유심히 살피는 중이라서 이번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윌마트가 아니라 대운 전자나 오성 전자를 최민혁이 들이박았다면 그냥 지켜봤을 것이다.
그런데 월마트는 경우가 좀 달랐다.
월마트가 유통 진출과 관련해서 오성, 대운, 롯대 같은 한국 대기업과 만나고는 있지만, 중견 그룹도 이에 해당한다.
다만 KM 그룹은 그 대상에서 빠져 있다. 그렇다고 기획 조정실에서 이 일을 그냥 내버려 두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동 투자를 통해서 얼마든지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최용욱 회장은 자기 아는 지인 통해서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지분 배분 문제나 국내 대기업의 견제 때문에 쉽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맞나?”
“현재까지는 기획 조정실에서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비록 지난주에 마크로 밀러 이사가 방한해서 오성 물산 쪽 임원과 만나기는 했지만 큰 의미는 없을 겁니다.”
“하긴 오성 전자가 병신이 아닌 이상 월마트와 손을 잡으려고 하지는 않겠지.”
정확히는 월마트가 국내 유통에 들어와서 영향력을 키울 때에 과연 그 일이 거기서 끝날 것이냐 하는 문제다.
월마트가 어느 정도 한국 유통 시장에 대한 경험을 쌓은 후에 손잡은 기업의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있다.
“지분 배분 문제만 봐도 월마트 쪽에서는 쉽게 칼자루를 한국 대기업에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국내 대기업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가 아닐까?”
“꼭 그렇게 보기도 힘듭니다. 월마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한국적인 특성입니다. 초기 진출에서는 공동 투자 기업을 앞에 내세우겠지만, 어느 정도 신뢰도를 얻고 난 다음에는 얼마든지 뒤통수치고도 남습니다.”
“쯧.”
최용욱 회장도 월마트라는 독이 든 사과를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선뜻 월마트와 손을 잡기에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월마트를 상대로 갑질이라니.
최용욱 회장도 손자 최민혁이 하는 행동을 보면서 머뭇거렸다.
아마 최문경 부회장이 그랬다면 당장 호출해서 박살을 내놓았겠지만, 최민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민혁이, 이 녀석은 자신이 돈키호테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도대체 왜 이렇게 평지풍파를 계속 일으키는 거야?”
“…아무래도 돈 때문일 겁니다. 미국으로의 콜린스 수출이 본격화된다면 그 규모가 엄청날 겁니다.”
“하지만 생산이 그만큼 안 될 텐데?”
“월마트라면 KM 전자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자금이라면 기존 TV 공장을 인수해서 변경만 하면 됩니다.”
“규모가 꽤 될까?”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 내의 콜린스 수요만 대략 50만 대가 넘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유럽 수출 규모를 고려하면 추측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