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저희가 굳이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강하게 나가자?”
“일단 이 사태를 일으킨 데니스 킴이라는 그 인간에게 소송을 진행하면서 월마트와 협상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월마트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까.”
“압니다. 데니스 킴이라는 놈을 앞세워서 의도적으로 찍어 누르려고 한 것이겠죠. 아마 이번 일을 내세워서 일방적인 계약 조건을 들이밀며 별의별 요구를 다할 겁니다. 그건 제가 경험해 봐서 잘 압니다. 저희에게 힘이 없다면 그들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KM 전자가 굳이 월마트에 휘둘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최민혁은 공격적인 김부영 영업 팀장의 태도에 만족했다.
“……!”
하지만 뒤에 따라온 장창식 차장은 입을 딱 벌린 채 경악했다.
상대가 한국 대기업도 한 걸음 물러난다는 월마트를 상대로 싸우자는 김부영 영업 팀장 말에 경악한 것이었다.
물론 그 역시 월마트의 행동에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감정이다. 월마트와 싸우자는 것은 아니었다.
더 황당한 것은 이를 말려야 할 최민혁 실장의 반응이다. 그는 오히려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줄 테니, 월마트와 전면전이라도 하라는 얼굴이었다.
“좋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우리 KM 전자가 언제까지 소극적일 필요는 없는 겁니다. 당당하세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겁니다!”
“자, 잠깐만, 시, 실장님, 지,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장 차장도 김부영 영업 팀장님 보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밑에 부하 직원인 조 과장이 그 꼴을 당했는데, 최대한 한 방 먹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당황한 장창식 차장은 자신이 잘못 듣고, 잘못 생각했나 싶어서 실장실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봤다. 다행히 조성돈 팀장이 있었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아예 시선을 외면한 채 듣고 있지 않았다.
“…….”
분노한 김부영 영업 팀장은 열 받아서 자기 생각을 털어놓기는 했지만, 설마 최민혁 실장이 공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최민혁은 콜린스를 미국에 판매를 해도 좋고, 안 해도 나쁘지 않았다. 설사 미국에 콜린스를 안 판다고 해서 그 수요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월마트가 아니라면 다른 유통업체를 찾아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수요가 생산을 따라가지 못해서 미국에 수출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상상도 못한 전개에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장창식 차장을 쳐다보았다.
“월마트 쪽과는 일단 무조건 협상을 중단하세요. 다른 유통업체를 알아보고요. 그리고 조훈섭 과장에 대해서는 변호사를 선임해서 정식으로 싸우라고 하세요.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저,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까짓거 콜린스는 미국에 팔기 어려우면 안 팔면 그만입니다.”
“…네.”
“잠깐만.”
하지만 최민혁은 이야기하다가 문득 ‘월마트’ 단어에서 한국 유통업체가 전면 개방된다는 인생 1회차 기억을 떠올렸다.
실상 월마트뿐만 아니라 다른 유통업체도 다 한국에 들어온다.
그런데 월마트는 특이하게 오성 물산, 오성 전자를 비롯한 오성 그룹과 손을 잡는다. 오성 그룹이 가지는 영업망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안 그래도 할아버지가 요즘 민감한 시기인데, 방법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월마트까지 끼어 있는데, 내가 따로 꼼수를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역시 나쁘지 않네.’
“이렇게 하죠. 변호사 이용해서 협상할 때 오성 전자 이야기도 넌지시 해보세요. 한국에서 오성 전자를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KM 전자 압박은 식은 죽 먹기다 라고 말이죠. 아마 월마트도 그런 얘기를 들으면 꽤 많은 양보를 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장창식 차장은 최민혁 의도가 뭔지 잘 몰라서 더 머리를 굴려 봐도 최민혁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오성 전자를 끼워 넣으면 문제가 더 복잡해질 텐데…….
김부영 영업 팀장도 대화를 마치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오버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MP3를 떠올리고 나서야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굳이 오성 전자를 이 일에 같이 엮으려고 하는 것일까?’
* * *
실장실을 나서는 장창식 차장은 처음 들어갈 때의 분노는 다 사라지고 오히려 걱정스러운 눈으로 힐끗 실장실을 뒤돌아보다가 김부영 영업 팀장 옆에 붙었다.
“김 부장님, 정말 괜찮을까요?”
“아니, 월마트에 보복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 왜 그래?”
“아니, 저야 조 과장이 일방적인 모욕을 당한 모습을 봐서 화가 난 겁니다. 하지만 공과 사는 엄연히 구분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실장님은 사적인 면을 좋아해. 그러니 마음 쓰지 마.”
“…진심입니까?”
MP3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김부영 영업 팀장은 그제야 최민혁이 원한 바를 또 깨달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을 거라는 말. 그게 그냥 한 말은 아니었다.
‘하긴 최문경 부회장이 호시탐탐 노리고, 오성 전자는 옆에서 탐욕의 눈을 번뜩이잖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있을 수가 없어. MP3는 그 돌파구겠지. 그러니 이제부터 어지간한 회사 따위는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지.’
물론 그도 월마트란 회사가 살짝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MP3를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MP3 속에 담겨 있는 것은 심모원려.
월마트조차 앞으로 MP3 물량을 받으려면 을의 처지가 되어야 할 테니까.
“장 차장, 우리 좀 당당하게 살자. 최민혁 실장님이 원하는 게 그거야. 우리 KM 전자 직원은 세상 누구에게도 굽히지 말고 살기를 원해.”
장창식 차장은 어느새 목소리를 낮추어서 김부영 영업 팀장을 설득했다.
“하, 세상 일이 그렇게 뜻대로 됩니까. 아, 진짜, 영업 사원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김 부장님이 자꾸 그런 말을 하니, 걱정 많이 됩니다.”
“쯧,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법무 팀에 가서 이번 일이나 빨리 마무리 지어. 그리고 혹시나 월마트에서 다른 소리 해도 아예 받아들이지 마. 당분간 그쪽과는 이야기도 안 할 테니까. 대신 실장님이 지시한 것을 잘 이용해서 적절한 시기에 타협을 잘해!”
“…솔직히 통쾌한 지시라서 좋습니다. 하지만 정말 걱정이…….”
“닥쳐!”
“…알겠습니다.”
장창식 차장도 몇 번이나 김부영 영업 팀장 눈치를 보다가 결국 법무 팀 쪽으로 뛰어갔다.
김부영 영업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떠올리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까지 영업을 하면서 쌓인 감정이 통쾌하게 다 날아간 것 같았다.
‘하긴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어야지. 솔직히 정말 후련하다.’
* * *
올해 미국 경제지가 선정한 매출 5위 기업인 월마트는 올 한 해 천억 달러 매출을 기록했다. 독보적인 세계 유통업체인 셈이다.
이런 월마트 관점에서 KM 전자는 그야말로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그런데 최근 KM 전자 영업 팀이 서로 협력하는 기업끼리는 동등하다는 점을 내세워서 계약도 KM 전자에게 일방적으로 적용했다.
월마트는 어이가 없었다.
마크로 밀러 이사는 KM 전자 행동에 단단히 열 받아서 데니스 킴을 부추겨서 의도적으로 KM 전자 영업 팀을 자극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면 알아듣겠지 생각했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데니스 킴이 당황한 얼굴로 마크로 밀러 이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고집이 보통이 아니군.”
“어떻게 할까요? 지금 콜린스 제품을 요청하는 고객 요청이 끊이지 않습니다. 특히 유럽에 지인이 있는 사람이 특히 더 심합니다.”
“어쩔 수 없지. 일단 뉴욕을 비롯한 5개 주를 선정해서 물건을 받아.”
하지만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데니스 킴이 다시 KM 전자에 요청했을 때 반응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쪽하고는 거래 안 합니다.”
“……?”
당황한 데니스 킴도 여러 통로를 통해서 다시 연락을 취해봤다.
불행히도 KM 전자는 월마트를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마크로 밀러 이사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자 직접 나섰다. 하지만 그가 나섰음에도 그다지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하, 뭐 이런 미친놈들이 다 있냐.’
KM 전자 측에서 원한 계약서대로 해준다고 해도 아예 먹히지 않았다.
데니스 킴은 KM 전자와의 협상 중에 오성 전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때마침 회사가 한국 유통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점을 이용하면 어떨까 싶었다.
“차라리 오성 물산 통해서 오성 그룹에 도움을 청하면 어떻겠습니까?”
“오성 물산? 오성 그룹? 그게 무슨 소리야?”
데니스 킴은 한국 재벌의 힘을 잘 알기에 적절하게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크로 밀러도 혀를 내둘렀다.
“오성 그룹 파워가 그렇게 대단해?”
“우리 미국과는 다릅니다. 오성 그룹은 한국 정관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일종의 로비군.”
그는 결국 고민을 거듭하다가 데니스 킴 의견을 받아들었다.
“오성 물산 쪽에 연락해서 약속을 잡아봐.”
“아, 알겠습니다.”
* * *
권태성 기획실장은 실상 KM 전자에서 무슨 일을 진행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다만 이창명 이사와 ETRI 사이에 돌아가는 일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그 일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시즈벨이 관련이 있어서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했지만, 그 이상 더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아니 그는 새로운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한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문제는 박재호 실장조차 잘 모르는 일이었다.
오현종 팀장이나 김승구 팀장은 최대한 보안을 유지했고, 지시를 받은 김문호 박사 연구팀은 오성 전자를 너무도 싫어해서 단 하나의 정보도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권태성 기획실장이 KM 전자나 ETRI 일만 처리한다면 계속 팔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정신없이 바쁜 사람이다.
최근 미국 유통업체의 국내 진출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내년 유통 시장 개방을 둘러싸고 동아시아를 담당한 월마트의 마크로 밀러 이사가 프라이스 클럽을 방문하면서 오성 물산 임원과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태성 기획실장 역시 오성 물산 이상명 전무 통해서 소개를 받았다.
“권태성 기획실장입니다.”
“마크로 밀러 이사입니다.”
월마트 역시 국내 유통 시장 실사와 더불어서 오성 전자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을 계획이었다.
다만 마크로 이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 굳이 권태성 기획실장을 만난 것은 오성 물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 최근 미국 환경청에서 배터리 유통업체를 상대로 배터리 수거에도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갈 겁니다.”
환경보호론자 덕분에 미국 환경청이 한국의 폐기물예치금과 비슷한 형태로 수거 비용을 따로 부담시킬 예정이었다.
에어컨, 세탁기, 냉장기의 등의 가전제품은 절전 기준이 대폭 강화되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 조치는 오성 전자에게도 부담스러운 조치였다. 절전 기준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다.
마크로 밀러 이사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우리 쪽에서 미는 상원의원을 통하면 한국 기업의 유예기간을 좀 더 연장해 줄 수 있습니다. 당장에 기준을 강화시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뜻밖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들이 공짜로 저런 제안을 할 리가 없었다.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대신에 한국에서 한 가지 일을 좀 도와주십시오.”
“네?”
권태성 기획실장은 실로 뜬금없는 제안에 크게 당황했다.
월마트가 가지는 막강한 영향력을 고려하면 자신에게 부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확실히 이유가 있었다.
“바로 KM 전자에서 만든 콜린스의 유통에 대한 계약입니다.”
너무 침착해서 안드로이드란 별명을 가진 권태성 기획실장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코, 콜린스요?”
조금 뜬금없는 말에 어이가 없는 권태성 기획실장.
안 그래도 KM 전자와 최민혁 실장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다른 사업 관련해서는 제발 그쪽과 연관되고 싶지 않았다.
설마 월마트의 마크로 밀러 이사에게서 그 민감한 이야기를 들은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국 재벌 속성에 대해서 최근 알게 된 마크로 밀러 이사 생각은 달랐다. 그는 오성 전자가 가지고 있는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