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03화 (203/1,021)

#203.

[아마 카세트 플레이어에 대해서는 많은 분이 아실 겁니다만, 워크맨이 더 익숙할 겁니다. 초기에는 AA 사이즈 건전지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배터리로 대체되었습니다. 두께도 얇아지고, 음질 기능이 대폭 좋아졌습니다.]

최병연 팀장은 일본 대기업의 카세트 플레이어 몇 개를 보여주었다.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카세트 플레이어는 디지털 기기는 아닙니다. 비록 액정에 사용 시간과 같은 LCD가 들어가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

대회의실에 참석한 이들은 다들 머리에 물음표 마크를 떠올린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일반적인 신제품에 대한 것이라면 저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었다.

거기다 일반적인 신제품이라면 차라리 조성돈 팀장이 나서서 회의를 주도하는 것이 더 정상이다.

그럼에도 개발 팀장인 최병연 팀장이 나선 것은 그럴 이유가 따로 있다는 의미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그제야 바뀌었다.

그리고 화면을 장식한 것은 MP3 PT 타입이었다.

기존 카세트 플레이어와 비교해서 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최병연 팀장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짓하자 MP3 팀이 일어나서 MP3 PT 샘플과 그에 대응되는 소니, 파나소닉과 같은 일본 대기업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 하나씩 내놓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KM 전자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디지털 카세트 플레이어, 바로 MP3입니다. 이 모델을 구성하는 부품은 고작 디코더, 전원칩, 낸드 플래시, 이 3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즉, 부품 단가가 고작 4만 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MP3 팀원이 나서서 직접 MP3를 들어서 시범을 보였다.

굳이 별달리 뭔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전원 버튼을 누르고, 플레이 버튼만 간단히 누르면 되기 때문이다.

“……!”

앉아 있던 실무진은 다들 깜짝 놀라서 멍하니 MP3를 쳐다보기만 했다.

카세트 플레이어 비교해서 무게는 아예 비교도 되지 않는데, 음질은 오히려 더 나았다. 심지어 옆에 놓인 노트북과 연결해서 케이블 하나로 내려받기가 간단히 가능했다.

특히 박정혜 과장은 음악을 좋아해서 늘 카세트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기에 이 MP3의 가치를 바로 알아보고는 강선주 부장을 쳐다보았다.

“와!”

박정혜 과장은 감탄사를 터뜨리면서 MP3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 역시 MP3 샘플을 돌려 보면서 경탄을 터뜨렸다. 심지어 이 가치를 잘 모르는 이도 바로 비교 대상인 카세트 플레이어를 같이 돌려 보고는 금방 알아챘다.

크기, 디자인, 가격, 품질, 편의성 모든 면에서 도저히 경쟁 자체가 되지 않았다.

박정혜 과장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강선주 부장을 쳐다보았다.

“서, 설마 이거 부장님이 디자인하신 거예요?”

“어. 실장님이 워낙에 보안을 강조해서 두 사람에게 말 못 했어.”

“맙소사!”

뒤늦게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MP3 팀원이 가져온 노트북에 담겨 있는 MP3 파일을 내려받으면서 MP3 플레이어가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보여주었다.

비록 카세트 플레이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어학용으로 한 번씩은 다 사용해 봤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모습은 얼마 전 콜린스의 시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그때보다 열기가 더 뜨거웠다.

콜린스는 운이 좋아서 대박을 칠 수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MP3는 기존에는 아예 없던 새로운 제품이었다.

더욱이 카세트 플레이어를 압도하는 것이라서 판매 자체가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그 시장이 도대체 얼마나 될지가 궁금했다.

최병연 팀장은 뒤를 이어서 MP3와 관련된 기술적인 난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제품에 놀랐던 이들도 사용된 기술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자 점점 입을 더 크게 벌리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네요!”

설명을 듣는 이들은 다들 넋을 잃은 채 힐끗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회의실 한쪽에 앉아서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존재감.

딱 그거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저 앉아서 회의를 듣기만 하는 것만으로 회의실에 모인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최병연 팀장이 발표를 마치고 자기 자리에 가서 앉자 팔짱을 한 채 조용히 있던 최민혁 실장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최근 경영 후계 구도니, 오성 전자의 갈등이라든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회사 분위기도 좀 어수선합니다.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닙니다.”

딱 한마디 말이었지만 뜨끔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KM 전자는 최민혁이 그룹 후계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는 이야기에 사내 분위기가 더욱 어수선했던 것이다.

“뭐 제가 굳이 여러분은 질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은 KM 그룹에 관한 이야기는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설득은 필요가 없었다.

다들 멍하니 자기 손바닥 위에 놓은 작은 MP3 플레이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대체 언제 이걸 개발한 거야?’

최병연 팀장이 이 제품 개발에 사용된 기술이 뭔지 설명했기에 더 이상의 질문은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굳이 내부 칩 설계가 어떻고, 동작이 어떤지 구체적으로 알 필요가 없다.

다만 그래도 이 MP3 개발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잘 알았다.

최민혁은 굳이 쓸데없는 설득은 필요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제가 여기서 더하면 잔소리만 된다는 것은 압니다. 여러분은 회사 외부에 떠도는 이야기에 관심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눈앞에 놓인 물건이 그 증거니까. 그게 여러분에 대한 제 약속입니다.”

다들 그저 최민혁 눈치만 봤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한마디만 더한 후에 회의실에서 조용히 나가 버렸다.

“앞으로 이런저런 어수선한 일이 꽤 생길 겁니다. 내부 갈등도 있지만, 외압도 문제니까. 하지만 그들도 지금 눈앞에 있는 물건을 본다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겁니다. 잔소리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조성돈 팀장님이나 최병연 팀장님이 대답해 줄 겁니다.”

“…….”

‘미치겠네.’

남아 있는 임직원은 자신이 품은 의문 따위는 이제 깡그리 잊고 말았다. 많은 새로운 의문이 쏟아 오르자 머리가 복잡했다.

* * *

최민혁이 나가고 난 후에도 회의실에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입을 여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멍하니 자기 앞에 놓인 MP3를 쳐다보았다.

처음의 충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다.

MP3를 만지면 만질수록 카세트 플레이어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대체가!’

마른하늘에서 뚝 떨어진 새로운 신제품.

다들 황당한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최병연 팀장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Space Bar’ 키를 눌렀다. 프리젠테이션 화면에는 MP3와 관련된 원천 특허의 종류와 설명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굳이 자세한 설명은 필요가 없었다.

특허 자체가 그 증거니까.

“제가 이 자리에서 수십 가지, 아니 수백 가지 관련 특허를 자랑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자면 세계 그 어떤 회사도 우리 허락 없이는 이 제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MP3 가치를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화면이 바뀌면서 나온 것은 MP3와 관련된 새로운 디자인이었다.

돌돌 말린 것부터 시작해서 카세트 플레이어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이미 최민혁에게 설명을 들은 디자인이었지만 강선주 부장은 다시 화면의 디자인에 주목했는데, 따가운 박정혜 과장과 박지현 과장 시선에 툴툴거렸다.

“난 실장님이 준 스케치를 토대로 해서 그린 것뿐이야. 그러니 날 그렇게 봐도 어쩔 수가 없어. 너희 두 사람에게도 말 못 한 것은 실장님의 보안 요청 때문이었어.”

그래도 두 사람은 불만이 가득한 시선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MP3는 PT에 불과할 뿐입니다. 기능 검증을 비롯한 각 팀에서 따로 고려해야 할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든 샘플에 불과합니다. 새로운 디자인의 MP3 모델 개발이 다시 진행될 겁니다.”

나름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 조성돈 팀장.

하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은 다들 조성돈 팀장을 계속 괴롭혔다.

강선주 부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팀장 중에는 이미 MP3에 대해서 알고 있던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 역시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MP3를 접한 이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다만 그럴수록 그들은 MP3에 대한 가치에 대해서 점점 깨달았다.

지금 당장 눈으로 접한 것과 이 MP3 시장 가치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뒤늦게 콜린스 이슈를 떠올리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이렇게 되면 이일태 이사, 위성 사업, ETRI 관련 일들은 또 뭐야? 맙소사 그건 다 쇼였던 거야?’

다만 그들 중에 최구만 과장은 복잡한 눈으로 프레젠테이션 보고서를 살피고 또 살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야 할까.

다른 임직원은 MP3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최구만 과장만큼은 MP3 가치를 어느 정도 알기에 이 보고서가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다.

최민혁이 최근 자신에게 맡긴 일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

다만 그 본질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CRT TV 미래가 결코 밝지 않다는 것. 최구만 과장은 내색하지 않았을 뿐. 만약 CRT TV가 요즘 떠오르고 있는 플라즈마 TV에 밀리는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간간히 고민했다.

그런데 최민혁이 준 것은 또 다른 도전의 기회.

바로 2번째 인생이었다.

그는 최민혁의 진심을 느끼자 가슴 한 구석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마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런 뜻이었나?’

MP3는 단순한 신제품 따위가 아니었다.

최병연 팀장이 소란스러운 회의실 분위기에도 최구만 과장에게 입을 열었다.

“최 과장은 회의 끝나고 잠깐 보지.”

“…네.”

* * *

최구만 과장도 전원 칩 설계가 끝나고, MP3 PT에 그 결과물을 적용하는 것을 보며 자신이 토사구팽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다만 MP3 시장이 어느 정도이고, 이게 어떤 미래가 펼쳐져 있는지는 몰랐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자신을 챙겨준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계속 불안에 떨었다.

최근 이일태 사태를 지켜보면서 이런저런 갈등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MP3 관련 회의가 끝나고 나서 MP3 시장성을 보자 자신이 뭔가 큰 착각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병연 팀장이 마침 기다리고 있는 그의 앞에 조창호 차장을 비롯한 다른 직원을 데리고 나타났다.

“많이 기다렸지?”

“아닙니다.”

“가자, 오늘 내가 고기 살 테니까.”

* * *

KM 전자 앞의 한 고깃집은 금요일이라서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조창호 차장은 너무 자주 하는 회식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아, 고깃집 말고, 좀 다른 곳으로 가죠. 이거 매일 고기만 먹으니, 이제 질립니다.”

최근 MP3 프로젝트가 한 단계 넘어가면서 MP3 팀은 회식을 너무 자주 했다. 이제 술은 그만이라는 소리마저 나왔다.

최구만 과장은 최병연 팀장 성격을 잘 알기에 그저 웃기만 했다.

디자인 하우스에 수정 때문에 늦게 도착한 윤선기 대리, 아니 얼마 전에 진급한 윤선기 과장이 고기부터 주워 먹었다.

“회의는 잘 끝났습니까?”

“어.”

하지만 최구만 과장 태도는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아직도 흥분한 얼굴로 소주잔을 들이켰다. 아니 한 잔 더 마시고는 연이어서 계속 마셨다.

다섯 잔이 입에 들어가고서야 이제 좀 마음이 편했다.

“괜찮아?”

“솔직히 안 괜찮습니다.”

“최 실장님에게 불만이 있어?”

“절대 그건 아닙니다. 오늘 회의 통해서 느낀 것인데, MP3 시장이 그냥 가볍게 볼 시장이 아닌 것은 알겠습니다.”

“아니 자네는 아직도 잘 몰라.”

“네?”

이제 알았다고 생각한 최구만 과장은 영문을 잘 몰랐고, 뒤늦게 자리한 윤선기 과장은 그냥 술만 죽으라고 마셨다.

콜린스 때문에 미칠 것 같은데, 전원 칩 설계에 같이 끼어서 아주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최병연 팀장은 조성돈 팀장과 같이 작업했기에 MP3의 여러 가지 배경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이미 MP3 관련 파일에 대한 소비는 급격히 늘어나고 있어. 아마 웹서비스가 활성화될수록 사용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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