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02화 (202/1,021)

#202.

박정혜 과장은 불만이 많은 얼굴이었다. 다만 대회의실 안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더 내색할 수는 없었다.

강선주 부장은 뜻밖에 적지 않은 이들이 빠져 있는 것을 확인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 생각보다 많이 빠졌네.’

* * *

오늘 대회의실에 온 디자인 팀 인원은 다른 영업 팀이나 홍보 팀의 인원보다는 많았다. 대다수 팀은 차장급 이상의 임직원만 참석했다.

그것도 신상품 런칭을 위해서 꼭 필수적인 인물만 나왔다.

물론 회의에 참여한 부장급 실무진들에게도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는데, 바로 MP3 프로젝트를 책임진 이들이다.

다만 최병연 팀장만큼은 아는 사람이 꽤 있었다.

강선주 부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최 팀장님, 안녕하세요.”

“그러게요.”

최병연 팀장도 과거 디자인 협의 때문에 알고 지난 강선주 부장을 따스하게 맞이했다. KM 전자의 디자인을 책임졌던 사람이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업무 능력도 무난하고, 다른 팀과의 조율도 괜찮은 이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업무 역량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렇게 다시 일하게 되어서 정말 좋습니다.”

“저도 공감입니다.”

탁월한 지도력으로 프로젝트를 인상적으로 잘 풀어간 최병연 팀장을 강선주 부장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특히 최훈열 전무와의 대립 때문에 최병연 팀장이 그만둔 것을 안타까워했었다.

그렇게 그만둔 최병연 팀장이 다시 이렇게 KM 전자로 귀환한 것을 환영했다.

‘확실히 최 실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야.’

그녀는 이번 MP3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람이 최병연 팀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MP3 디자인 문제 때문에 몇 번 이야기를 나누었으니까.

“참, 처음 보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분은 로직 설계를 맡은 조창호 차장님이…….”

최병연 팀장은 조창호 차장을 비롯한 이번에 새로 입사한 이들을 일일이 다 소개해 주었다. 정신없이 바빴기에 그들을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다.

대회의실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훈훈한 와중에도 콜린스 덕분에 일거리가 산처럼 쌓여서 오히려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조정욱 인사 팀장을 붙잡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도대체 신규 인력을 언제 뽑습니까. 올해 우리 회사 매출은 사상 최대라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제는 추가로 인원을 뽑아도 되지 않습니까?!”

당황한 조정욱 인사 팀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 역시 다른 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미 실장님이 인원 동결을 시킨 상황이라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아니 실장님이 안 된다고 해도 조 팀장님이 나서서 실장님을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실장님이 너무 바빠서 인사 문제를 간과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저도 몇 번 이야기해 봤는데, 실장님이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서서히 모이기 시작한 실무진은 의아한 눈으로 조정욱 인사 팀장을 씹었다. 다들 콜린스 때문에 지쳐서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뒤늦게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기획 팀 인원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조정욱 인사 팀장이 조성돈 팀장을 보자마자 애원조로 말했다.

“아, 조 팀장님, 인원 충원 때문에 말이 많은데, 대답 좀 해주십시오!”

조성돈 팀장은 슬쩍 조정욱 인사 팀 시선을 피해서 회의 준비나 했다.

그 옆자리에 앉은 마케팅 팀장 최주호 부장이 투덜거렸다.

“조 팀장님, 도대체 기획 팀은 요즘 왜 그렇게 숨기는 것이 많습니까. 아니 인사 충원 문제는 벌써 몇 달 전부터 계속 나온 이야기 아닙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최소한 안 되면 안 된다, 되면 된다고 말해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냥 너희는 떠들어라, 우리는 씹는다는 그 태도는 또 뭡니까?”

조성돈 팀장은 그나마 조정욱 인사 팀장과 달라서 왜 인력 충원을 하지 않는지 잘 알았다.

바로 TV 사업부 매각.

최민혁은 아직도 이 일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당연히 할 수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그 충격적인 이야기를 실장님이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멋대로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최민혁 실장이 때마침 들어왔다.

앉아 있던 실무진은 우르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다들 긴장했다.

회사의 주인으로서 이미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최민혁.

특히 최근 이일태 이사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런저런 통로로 들은 바가 있는 실무진은 마른침마저 삼켰다.

이일태 이사가 반쯤 폐인이 되어서 빌빌거린다는 소리는 KM 전자 임직원이라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모든 일의 배후에 최민혁이 있다는 것은 굳이 증거가 없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최민혁이 지금 KM 전자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이다.

최민혁의 한마디 말이면 얼마든지 잘나가는 부장급 직원도 가볍게 잘라 버릴 수가 있다.

그것도 별다른 부정적인 이미지 없이 말이다.

당연히 최민혁이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만 밑에 직원 처지에서는 숨조차 쉬기 쉽지 않았다.

최민혁도 몇 달 전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진 실무진의 모습에 양손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자, 자리에 앉으세요.”

“아,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오늘 자리를 마련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앞으로 MP3 프로젝트를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 할지 말이다.

다만 그는 그 전에 임직원의 분위기를 먼저 세세히 살폈다.

‘나쁘지 않아.’

사실 이일태 이사를 공격한 것은 어떻게 보면 일벌백계였다.

이일태 이사가 무참하게 무너지는 것을 본 임직원은 아무래도 최민혁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테니까.

최민혁은 그저 사람 좋은 호구 같은 리더보다는 어느 정도 아래 임직원들이 두려워하는 리더가 편하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장승일 실장이 끼어들면서 이일태 이사가 가까스로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굳이 최민혁은 실망하지는 않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니까. 굳이 내 손으로 피를 묻히지 않고도 이일태 이사를 제거할 방법은 많아. 설사 할아버지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대안이.’

따지고 보면 이일태 이사는 분란의 코어나 마찬가지다.

이일태 이사가 활활 타오를수록 최문경 부회장이나 오성 전자는 시선을 떼기 힘들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장승일 실장과 할아버지 역시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만큼 내가 컸다는 거지.’

변수는 다시 경영권을 나선 최용욱 회장이 어느 정도 욕심을 비친다는 점이다.

최민혁은 이런 최용욱 회장이나 장승일 실장의 모습에 대해서 딱히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만큼 또 다른 우산이 되어주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살이는 알아서 정리해 주니까.’

이제 남은 것은 바뀐 자신의 입지를 그룹의 임직원에게 알리는 것이다.

지금 KM 전자의 임직원의 모습은 자신이 원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잠깐 묘한 시선으로 실무진을 한 사람씩 쳐다보았다.

감히 시선을 마주하는 이는 없었다.

이제까지 쌓은 최민혁 실적 때문이다.

자기 인사권을 쥐고 있는 주인이기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최민혁도 회의실 들어오기 전에 어수선한 분위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는 이제 임직원에게 다시 한번 지침을 내릴 생각이었다.

“아마 콜린스 관련해서 의문이 많을 겁니다. 신규 인원 채용이나 조직 개편과 같은 문제죠.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제대로 답을 해줄 수 없는 점을 이해해 주세요.”

아무래도 관료적인 성향이 강한 조정욱 인사 팀장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기탄없이 말해보세요.”

“…물론 회사 내부적인 사정이 있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지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들 일에 너무 치여서 조직이 돌아가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셔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절대로 임직원을 버리지 않습니다. 본인이 원한다면 평생직장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

뜻밖의 이야기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인사에 문제가 생깁니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철저히 관리하다 보니, 아무래도 선별할 때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 보수적인 성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신에 여러분은 앞으로 회사에 반하는 일만 하지 않는다면, 잘릴 일은 없습니다.”

조용했다.

각자 최민혁이 한 말의 의미를 떠올리다가 힐끗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는 최병연 팀장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회사를 나갔던 사람이 다시 복귀했다.

그것도 최고의 책임자로 말이다.

이유야 어쨌든 퇴직한 것은 최병연 팀장 본인의 문제인데, 최민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한 번 KM 전자맨이면 영원한 KM 전자맨이라는 주장이니까.

그건 다르게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회사에서 잘릴 일은 없다는 점이다.

한국 대기업이라면 직원을 소모품 취급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 상황에서 최민혁이 한 말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회의에 참석한 임직원은 다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전율마저 느꼈다.

다만 콜린스를 비롯한 제반 환경을 고려했을 때, 사람이 부족한 지금, 직원을 함부로 뽑지 않는다는 것은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뭔가 있구나. 구조조정은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이들은 그제야 다들 손을 들어서 질문하려는 행위를 멈췄다.

솔직히 KM 전자 주가가 폭등하면서도 요즘 KM 전자에 서로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다.

심지어 청탁까지 한다.

최민혁은 소란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방긋 웃으면서 힌트만 줬다.

“지금 여러분이 오늘 회의실에 모인 것도 정체된 다른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습니다.”

“……?”

고개를 갸웃한 실무진은 다들 의아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물론 그들에게 더 답을 해주지 않은 채, 최병연 팀장을 쳐다보았다.

“최 팀장님, 시작하시죠.”

“알겠습니다.”

* * *

최병연 팀장이 일어나자 MP3 팀 몇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회의실 한쪽에 놓인 노트북 세팅을 확인하면서 팀원에게 지시했다.

조성돈 팀장도 회의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나서서 도와주었다.

MP3 프로젝트 관련된 일은 보안 때문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

다들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 MP3 PT 디자인을 혼자 처리한 강선주 부장은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눈치 빠른 박정혜 과장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부장님, 혹시 아는 것 있으세요?”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

“에이, 또 그러신다. 주말에 나와서 매일 야근한 거 저 다 알아요.”

흠칫 놀란 강선주 부장은 불만이 가득한 박정혜 과장을 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실장님 지시라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혼자 몰래 일을 하면 어떻게 해요? 최소한 저에게는 말씀해 주셔야죠.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일도 있었을 것 아니에요?”

하지만 MP3 초기 디자인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디자인보다는 결과 자체에 충실한 보편적인 모델이기 때문이다.

“회사 내에 소문을 다 내려고?”

“에이, 우리 부장님 너무 하신다. 제 입이 얼마나 무겁다고요.”

두 사람은 10년 넘게 같이 일해온 터라 구김살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직원끼리 허물없는 관계가 어색한 박지현 과장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계속 쳐다보았다.

“너무 그렇게 묻지 마.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게 될 테니까.”

“힌트라도 좀 주세요.”

“글쎄, 으음, 카세트 플레이어 대용품?”

“그게 뭔데요?”

“곧 알게 될 거야.”

사실 강선주 부장도 지시를 받아서 일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내막은 잘 몰랐다. MP3 내부가 어떤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박정혜 과장만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홍보 팀장 이용식 부장을 비롯한 회계 팀장 김창훈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김창훈 부장은 그나마 사내 아는 지인이 많아서 왼쪽, 오른쪽에 앉은 이들에게 질문했다.

“도대체 저게 뭡니까?”

“저도 잘 모릅니다.”

물론 그들 역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최병연 팀장이 때마침 마이크를 잡았다.

[원래는 제품 브랜드와 포지션을 시작으로 복잡한 이야기가 우선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해봐야 이해를 못 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새로운 제품은 기존 제품과는 모든 면에서 차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담담한 이야기였지만 시선을 끌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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