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김현탁 본인도 아마 최민혁을 몰랐다면 호되게 당한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동영 상무를 비웃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 역시 최민혁에게 크게 당해서인지 오히려 최민혁의 행보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최용욱 회장의 아바타라는 최근 도는 이야기가 헛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놈 정말 보통이 아니구나.’
때마침 걸려온 최민수의 전화.
“어, 민수구나. 오랜만이다. 그래, 기범이 통해서 소식 들었다. 한번 놀러 와라.”
* * *
DL 정보통신이 입주한 건물은 DL 그룹이 소유한 건물이다.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이 건물은 지상 20층, 지하 6층이다. 주로 대기업 계열사나 외국계 기업이 입주해 있었다.
이 건물만 시가로 2,000억이 넘는다.
최민수는 새삼 DL 그룹의 자본력을 확인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대단하구나.’
KM 그룹은 말만 중견 기업일 뿐이다. 현금 동원력만 놓고 봐도 도저히 DL 그룹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최민수는 이를 악문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입구에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민수는 환대를 받으며 김현탁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올해로 36살인 김현탁은 괄괄한 성격으로 전형적인 재벌가 사람이다. 그는 화가 나면 앞뒤를 가리지 않는 성격으로 악명이 있지만, 돈을 쓸 때는 가리지 않았다.
최민수는 김기범 덕분에 몇 번 김현탁과 안면을 익힌 적이 있어서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그때는 클럽에서 만나서 술과 여자를 즐겼을 때다.
지금처럼 정식으로 만난 적은 없었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는 김현탁 본부장은 확실히 김기범과는 많이 달랐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이런 사람도 민혁이에게 당했다니.’
최민수는 뒤늦게야 최민혁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김현탁 본부장도 그런 최민수 시선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자리를 권했다.
“앉지. 뭐 마실래?”
“커피면 됩니다.”
“그래.”
김현탁 본부장은 커피를 비서에게 시킨 후에 김기범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딱히 최민혁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도 한 가지만큼은 주의를 시켰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김용만 전무와는 사이가 안 좋아. 우리 사이의 일은 굳이 그쪽에 알릴 필요가 없어. 그래, 네 엄마, 나에게는 작은 엄마인 김여정에게도 알리지는 마.”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최민수는 처음부터 주의를 주는 김현탁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김기범을 만나서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만 DL 그룹 역시 KM 그룹만큼이나 내부가 복잡했다.
김현탁 본부장은 솔직히 최민수가 미덥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KM 전자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유용한 인물이다.
ETRI 내부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교차검증하려면 최민수가 꼭 필요했다.
‘위성 사업부에 속해 있으니, 뭔가 알아도 알겠지. 더욱이 최민혁 그놈에 대한 복수심으로 미쳐 있으니, 배신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비서가 내온 녹차를 홀짝이던 김현탁 본부장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다 두들기고 나서 입을 열었다.
“너도 익히 알고는 있지만, 너희 아버지는 우리 DL 그룹과 사이가 좋았다. KM 전자의 기술과 우리 DL 그룹의 자본이면 뭐든지 할 수가 있으니까.”
공감대를 위한 이야기.
최민수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어머니 김여정에게서도 이런 이야기는 듣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실상 최훈열 전무 처지에서 그 일은 KM 그룹을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가 DL 그룹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김여정은 KM 그룹 안주인이 될 수 있다는 욕망에 빠져서 김용만과 손을 잡았다.
김현탁 본부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들이 하려고 했던 일이다.
“우리 DL 그룹은 애초에 KM 전자 지분만 확보해서 대주주가 되려고 했어. 경영권 따위는 애초에 관심이 없어. 지금도 돈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데, 굳이 골치 아픈 KM 전자 경영에 간섭할 이유가 없었다.”
“아, 그렇겠군요.”
최민수는 김현탁 본부장 말을 겉으로는 믿는 척했지만 내심은 조금 달랐다. 최민혁에게 된통 당하고 난 후라 의심부터 했다.
하지만 그도 최민혁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서 본부장의 말에 수긍하는 척했다.
김현탁 본부장도 굳이 그런 점을 들추지 않았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 김상구 회장님은 이미 전자와 정보통신 쪽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계획하고 있어. 현재 DL 정보통신의 부가가치 통신망이나 무선망에 하는 투자가 그 증거다.”
실제로 DL 정보통신은 3년 동안 1조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계획 중이었다.
투자 규모를 들은 최민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김현탁 본부장 말에 경청했다. 그는 잘만 이를 이용하면 최민혁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김현탁 본부장은 그제야 방긋 웃었다.
“다만 우리 회사는 이쪽 분야를 잘 몰라. 정보통신도 그렇지만 전자 쪽도 마찬가지야. 그쪽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해.”
“최,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일단 너희 회사에서 진행하는 위성 방송 쪽에 관해서 조사를 해봐.”
“네? 디코더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위성 방송 시스템 말이다.”
“……?”
최민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역시 저번에 최민혁 덕분에 교육을 단단히 받았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 * *
최민수는 김현탁 본부장을 만나서 제안을 받고 나서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를 해봤다. 그런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허훈 과장조차 고개를 갸웃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김명준 과장 통해서 최민수 동선을 들은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뜻밖이네요.”
김명준 과장조차 최민수에게 굳이 사람을 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예상을 벗어난 최민수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설마 DL 정보통신 본사를 찾아가서 김현탁 본부장을 만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리 김현탁 본부장도 독이 잔뜩 올라 있어서 그렇겠죠. 그렇지 않고야 민수 녀석을 만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지난 마약 항공 사건을 떠올린 최민혁은 입맛을 다셨다. 그도 나름 심혈을 기울인 한 수였지만 꼬리 자르기로 빠져나간 김현탁의 행동에 감탄했다.
‘조금만 더 나댔으면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귀신같이 잠수를 탔단 말이야.’
“그 위성 방송 시스템이 김현탁 본부장이 욕심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까?”
“글쎄요.”
최민혁도 선뜻 장담하지는 못했다. 송한성 교수가 진행하는 연구는 MPEG 원천 기술의 응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MPEG 원천 기술이 적용되는 분야는 너무 광범위해서 딱히 어느 한 분야라고 정하기 어려웠다.
위성 방송 시스템만 해도 그렇다.
이것 역시 스승인 이지수 통해서 배운 것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당시 이지수는 위성 방송 시스템에서 핵심이 되는 기술을 콕콕 찍어서 최민혁을 들들 갈았다.
이지수에 푹 빠진 최민혁은 암기식 교육으로만 들었다.
이지수도 단순한 응용에 불과한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해서 최민혁이 다 알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가 그때 암기식 교육으로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빠진 부분을 채워줬다.
최민혁도 ETRI 위성 방송의 삽질에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도 위성 방송 시스템이 어떻게 되든지 알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었다.
‘위성 방송이 그렇게 중요한가? 뭐 상관은 없잖아. 어차피 원천 기술은 내가 다 가지고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최민혁은 김현탁 본부장을 조사하면서 DL 정보통신과 DL 그룹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일단 우리 약쟁이 김현탁 본부장도 끼워서 판을 키웠어. 여기까지는 좋아. 장승일 실장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보고할 테니, 할아버지도 문제 삼지 못할 거야. 민수 형 동기도 확실하고. 가만 확실히 DL 그룹이 돈이 많아.’
“그렇죠. DL 그룹이 돈이 많네요. 아니, 이건 많다는 말로도 부족해요.”
김명준 과장도 최민혁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DL 그룹이 돈이 많은 것과 저희 쪽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그 돈이 저희 돈이 된다면 그렇지 않겠습니까?”
“네? DL 그룹 돈을 차입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아, 이런 실수. 정확히는 DL 그룹의 돈이 아니라 오성 그룹의 돈입니다. 아, 물론 DL 그룹이 돈을 더 많이 내겠다면 그쪽에 팔 수도 있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TV 사업부 매각을 이미 정해놓았다는 것은 아시죠?”
김명준 과장도 펄쩍 뛰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또 상황이 다른 것 아닙니까. 지금처럼 잘나가는 TV 사업부라면 굳이 매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거야 2~3년은 괜찮죠.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인기가 한물갈 겁니다. 그때부터는 LCD가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할 테니까.”
“하, 하지만…….”
김명준 과장이 TV 사업부 매각에 뜻밖에 부정적이었다.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매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아마 오성 전자라면 빚을 내서라도 TV 사업부를 사들이려고 할 거니까. 다만 그놈들이 호락호락 TV 사업부를 인수하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대항마가 필요하죠.”
“…설마 DL 그룹을 부추겨서 사업부 매각 대금을 올릴 생각입니까?”
“빙고. 어때요? 제 생각이? 김현탁 본부장은 아마 입에 거품을 물고 이번 인수에 끼어들려고 할 겁니다. 인수만 성공한다면 DL 전자 경영권까지 먹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 김여정 여사도 미쳐서 날뛸 테니, 카, 그림이 좋습니다.”
“…진심입니까?”
“그럼요. 못 팔 이유라도 있습니까?”
“…….”
김명준 과장은 차마 더 질문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도 참다못해서 한마디 했다.
“아마 난리가 날 겁니다. 실장님을 지지하는 임직원조차 등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는 그렇죠. 하지만 MP3가 제대로 성공한다면 이야기는 다를 겁니다.”
잠시 고만하던 최민혁은 결국 고삐를 더 조이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하죠. MP3 일정을 좀 더 당기죠. MP3 관련 실무자 미팅을 할 테니, 실무진에게 연락해서 회의실을 잡으세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최소한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람에게는 알리는 것으로 하죠. 뭐 정보가 새도 어쩔 수가 없고요. 아니 차라리 정보가 외부로 새 나가는 것도 좋습니다. 지금부터 서서히 영업도 생각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일어나면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MP3 프로젝트에 그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마 MP3가 만약 세상에 등장한다면 최민혁 입지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하지만 MP3가 콜린스 인기를 누를 정도일까?’
* * *
최민혁의 행보는 KM 전자 내에서도 말이 나왔다.
이일태 이사와의 갈등도 그랬다. 다행히 오성 전자와의 문제가 이상할 정도로 잘 끝나면서 이일태 이사가 한숨 돌렸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 문제도 말들이 많았는데, 도대체 오성 전자와는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많았다.
그나마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나오는 말이 최민혁이 KM 그룹 경영 승계 후보에 올랐다는 것이다.
정식 후계자 중 하나로 일단 올라섰다는 점은 많은 임직원의 시선을 끌었다.
디자인 팀 박정혜 과장도 최민혁 실장이 드디어 KM 그룹 후계자 후보로 올라섰다는 말에 오두방정을 떨었다.
“어머 세상에 정말 최민혁 실장님이 그룹 승계 후계자 후보가 된 거야? 아니 최문경 부회장이 그룹을 승계하는 것이 아니었어?”
박지현 과장 역시 공감했다.
“아니 그거 사실이에요. 저도 오늘 그룹 기조실 발표 보고 정말 놀랐어요.”
“정말 이상해. 최문경 부회장이 조카가 경쟁자로 나서는 것을 용인하다니.”
하지만 강선주 부장은 두 사람이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자 일축했다.
“두 사람 다 회사 일에만 집중해.”
사내 소문에 귀가 얇은 박정혜 과정은 바로 반박했다.
“어머, 강 부장님은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세요. 만약 최문경 부회장이 그룹 승계를 받으면 부장급 직원은 다 영향을 받잖아요.”
“쯧, 우리 그룹 오너가 최 실장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 설사 최문경 부회장이 그룹을 승계받아도 우리 전자만큼은 달라.”
“하지만 회장님이 최 실장님에게 차명 지분을 넘겼다는 소리가 파다해요. 차라리 그게 합리적인 것 아닐까요?”
“박 과장, 그만 좀 하자.”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