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최훈열 전무는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앞머리도 반쯤 빠져 있었다.
흰머리가 가득한 최훈열 전무의 모습은 과거 자신이 알던 아버지와는 또 달랐다.
‘아버지…….’
최민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처참한 모습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직 아버지조차 이번 일의 배후가 최민혁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최민혁이 배후라는 정황증거는 차고도 넘쳤다.
다른 것을 떠나서 김현우 상무와 이일태의 모습이 확실한 증거였다.
결국 감옥 경비원이 나서서 최훈열 전무를 진정시켰다.
그나마 최훈열 전무가 KM 그룹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감옥 경비원이 일반인에게 하듯이 폭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최민수는 그제야 복수심이 덜 끊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솔직히 지금 당장 최민혁을 직접 찾아가서 지금까지 쌓인 의문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 후계자 자리에 욕심이 나서인지 신중했다.
‘그놈이 내게 제대로 말을 해줄 리가 없지. 아니, 설사 인정한다고 해도 내가 뭘 어떻게 해?’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최민혁을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었다.
‘도움이 필요해. 민혁이 그놈과 원한 관계가 있는 놈을 찾아야 해.’
최민수는 면회장을 나서면서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문득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기범 형?”
* * *
김기범은 최훈열 전무와 비할 바는 아니어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 역시 감옥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나마 변호사 접견 통해서 그럭저럭 버티는 모양새였다.
최민혁에 대한 원한과 증오 때문에 무너지고 있는 아버지와는 좀 달랐다.
최민수도 과거 일 때문에 김기범을 신뢰하지는 않았다. 다만 항공 마약 소동으로 구속되어서 감옥에 간 일이 최민혁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뉴스를 통해서 알았다.
물론 그 일은 한국이 떠들썩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이야기라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뭘 그럴 눈으로 쳐다봐?”
“아, 아닙니다.”
“쯧, 너도 이제 정신을 좀 차렸나 보다. 아버지 면회 갔다면서?”
“그렇게 되었어요.”
DL 정보통신 본부장으로 항공 마약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던 김현탁을 통해서 최근 ETRI 내부 일을 확인해 보라는 지시를 받은 김기범은 착잡한 눈으로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던 김현탁 본부장이 쥐새끼처럼 숨을 죽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막상 자기 꼴을 보니, 차라리 김현탁 본부장이 처신을 잘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여론이 잠잠해지니, 김상구 회장조차 지난 항공 마약을 저지른 김현탁을 더 괄시하지 않았다.
김현탁도 따지고 보면 마약을 이용해서 자기 인맥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그것 자체만 놓고 본다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김기범 역시 그 과정에서 재미를 단단히 봤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옥 생활에 적응하면서 도대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것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뒤늦게야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최민혁이 있다고 확신했다.
‘복수겠지.’
최민혁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워서 지난 마약 클럽 파티를 덮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거꾸로 조사를 받아서 결국 감옥에 오고 말았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이 당한 것을 그대로 돌려준 거야. 민혁, 이 새끼가 정말 보통이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걸까?’
김기범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막상 말을 하려고 해도 그 어떤 증거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저 혼자 최민혁을 생각하며 이를 갈 뿐이었다.
‘소름 끼치는 새끼.’
김기범은 최민수에게 ETRI와 관련해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묵묵히 듣다가 복수를 다짐하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애송이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지 마.”
“그렇게 당하고도 그냥 있으란 말입니까? 민혁이, 이 새끼는 겉으로 웃으면서 뒤로는 온갖 계략을 다 꾸몄다는 말입니다!”
충혈된 두 눈은 마치 복수의 화신처럼 불타올랐다.
감옥에 갇혀 있는 김기범 입장에서는 가소롭기만 했다.
그도 할 수만 있다면 최민혁 사지를 찢어서 죽이고 싶었다.
오히려 이제야 진실을 알았냐고 내심 비웃는 김기범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갑작스러운 김현탁 본부장의 연락을 받고 얼마나 당황했던가. 따지고 보면 그것도 자신이 최민수와 안면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내 꼴을 봐. 이것도 다 민혁이 그 새끼가 꾸민 일 때문이야.”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현탁이 형이 그러더라. 검찰 쪽에 세세하게 살피다가 증거를 제보한 사람이 있었다고. 그걸 누가 제보했다고 생각하냐?”
“설마 민혁이 그놈이 검찰에 항공 마약 사건을 제보했다는 말입니까?”
“너는 공항에서 민혁이, 그놈이 사건을 크게 부풀리고, 다시 기자 회견까지 열어서 김현탁 형을 마녀사냥 한 것이 운이라고 생각해? 씨발, 소설도 그따위로 쓰면 개연성이 없다고 안 본다!”
“하지만 그때는 민혁 그놈도 자기에게 불똥이 튈까 그런 행동을 한 것 아닐까요?”
“아냐. 그놈이 의도한 거야.”
“하지만 항공편에 마약이 들어온다는 것을 민혁이가 어떻게 압니까?”
김기범도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최소한 민혁이 그놈이 뭔가 알고는 있었어. 어쩌면…….”
‘나 때문일 수도 있고, 지난 클럽 마약 사건에서 나에게 복수하려고 마약 출처를 의심해서 계속 조사를 했을 수도 있으니까. 맞아. 그랬어. 그래야 검찰이 갑자기 내 집을 압수수색 한 것도 말이 되니까. 이걸 연결 고리로 현탁 형을 조사했다면, 항공 마약에 대해서 알았을 수도 있어. 틀림없어! 이 개같은 새끼가!’
김기범은 뒤늦게야 그때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해가 되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다만 감옥 생활로 얻은 인내심 덕분에 굳이 최민수에게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민혁이, 그놈 정말 가볍게 볼 놈이 아냐. 나도 변호사 통해서 너희 기업 내부 사정을 들었는데, 이일태 이사도 민혁, 그놈의 작품이 맞을 거다. 너도 포함해서 말이다.”
“설마요? 아니, 그걸 민혁이가 어떻게 가능하게 했다는 말입니까. 민혁이는 ETRI 쪽에는 아무런 인맥이 없을 텐데요?”
“그거야 모르지. 자세한 상황을 알고 싶으면 현탁이 형을 만나 봐. 내가 사전에 연락도 해둘게. 그 형도 최민혁, 그놈에게 이를 갈고 있으니까. 아마 널 도와줄 거야.”
“알았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뭘 가족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최민수도 내심 지난 일 때문에 김기범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일단 최민혁과 싸우기 위해서는 김기범의 도움이라도 필요했다.
‘아니, 외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엄마 도움만으로 한계가 있어.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해.’
* * *
DL 그룹은 잘 나가는 DL 화재 덕분에 사내에 현금이 많다. 아니 단순히 많은 정도가 아니라 한국 대기업 중에서도 사내 보유금이 독보적인 기업 중에 하나다.
넘쳐나는 현금 때문에 DL 그룹 김상구 회장은 다른 사업에 눈을 돌렸다. 철강, 전기, 중공업, 전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업 분야다.
DL 전자는 바로 이런 김상구 회장이 의도한 큰 그림 중에 하나다.
김상구 회장의 둘째 아들인 DL 전자 김용만 전무는 김상구 회장의 지시에 따라 최훈열 전무를 이용해서 KM 전자를 계속 호시탐탐 노렸다.
작업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뒤에서 최훈열 전무를 부추긴 덕분에 KM 전자는 날이 갈수록 망해갔다. 더욱이 차입금이라는 욕망에 빠져들게 한 점도 주효했다.
최훈열 전무는 KM 그룹을 승계받기 위해서라도 달콤한 김용만 전무의 유혹을 거절하지 않았다.
상황은 너무도 잘 풀려갔다.
최훈열 전무 아내 김여정이 도와준 덕분에 KM 그룹 경영 승계라는 명분까지 내세워서 이제 KM 전자 지분을 먹을 수 있는 기반도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일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최훈열 전무의 구속. 전광석화처럼 일어난 일이라서 뒤늦게 손을 쓰려고 했을 때는 이미 일이 다 끝나 있었다.
더 황당한 것은 소모품 정도로만 생각한 최민혁이 갑자기 KM 전자의 오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DL 그룹 본사는 이 일 때문에 한동안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하루도 조용히 그냥 보내지 않았는데, 결국 DL 그룹에서 최민혁 조사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냈을 때, KM 전자는 이미 변화와 혁신의 기업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김상구 회장이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그는 김용만 전무를 쥐잡듯이 몰아붙였다.
김용만 전무는 이 일의 실패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KM 전자의 콜린스 초대박 이후에는 김상구 회장에게 완전히 찍혔다.
사장단 회의에만 가면 김상구 회장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일단 DL 그룹은 DL 정보통신을 키워서 그 영향력을 키우고, 이를 바탕으로 KM 전자를 노리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그 이후, 김현탁 본부장은 김상구 회장의 지시를 받고 한국에 들어왔다.
김현탁 본부장은 내심 희희낙락한 채로 김상구 회장의 지시를 받아서 국내로 들어왔는데, 항공 마약 사건에 연루되면서 김용만 전무보다 더 차가운 냉대를 받았다.
그룹 내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가 특히 열받은 것은 최민혁의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최민혁이 언론 통해서 갖은 언론플레이를 다한 덕분에 김현탁 본부장은 언론에서 약쟁이로 찍혀 버렸다.
하지만 김현탁 본부장은 최훈열 전무와는 달리 이를 악물었다.
폭풍우는 피해가자는 심정으로 회사 경영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DL 정보통신이 진행하는 휴대폰을 포함한 차세대 통신망 사업에 집중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최민혁이 ETRI 쪽에 손을 쓰고 있다는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었다.
김현탁 본부장은 최민수를 잘 아는 김기범에게 연락해서 ETRI 내부 일을 확인했는데, 역시나 최민혁이 손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더욱이 이일태 이사와 관련된 사연을 알자 혀를 내둘렀다.
‘어이가 없네.’
이미 따로 ETRI 내부 인맥을 통해 정보를 확인한 박태정 부장도 꽤 놀란 얼굴이었다.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르겠지만, 실무진 선에서 위성 방송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우리가 그렇게 부탁해도 인력이 부족하다고 핑계만 대던 그놈들이 왜 최민혁의 제안을 수락했다는 말입니까?”
“아마 KM 전자 내의 위성 사업부가 ETRI 쪽과 긴밀한 관계인 터라 그 라인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디코더만 하던 그쪽 사업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KM 전자가 갑자기 위성 방송에 관심을 기울인다고, 자존심 덩어리인 ETRI가 그 말을 들었다는 말입니까?”
“그게 좀…….”
박태정 부장도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위성 사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터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그 역시 ETRI 내부의 알력 싸움을 잘 아는 터라 억지로 정보를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김현탁은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무척 들지 않아서 이를 으드득 갈았다.
DL 정보통신 역시 차세대 망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는 중이다. 주로 휴대폰에 집중하기는 했지만, 위성망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실무진 선에서 ETRI 위성 사업부 인물을 만나서 사업적인 제안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오현종 팀장이 갑자기 이와 관련해서 최민혁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물론 오현종 팀장은 최민혁 지시를 받아서 정보를 흘린 것이었지만 DL 정보통신 박태정 부장이 그 내막까지 알 리는 없었다.
김현탁 본부장도 이런저런 채널 통해서 ETRI 내에서 일어나는 오성 전자의 움직임을 알았지만, 굳이 나서지 않았다. 괜히 오성 전자와 싸워서 유탄을 맞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일에 집중한 나머지 재판도 그럭저럭 잘 마무리했다.
초범인 것도 있고, 전관 변호사에게 의뢰를 맡겼으며, 이상수 과장이 모든 것을 다 뒤집어쓴 덕분에 실형을 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했다. KM 전자가 엮여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위성 사업부 선에서 생긴 문제라고 봤다.
그런데 갑자기 위성 통신 사업과 관련해서 최민혁이 튀어나오자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김현탁은 열을 받아 방방 뛰었던 최훈열 전무와는 달리 그 분노를 속으로 삭였다.
그는 안 그래도 김용만 전무와 사이가 너무 나빠서 정보를 얻지 못했다. 그래도 김기범 덕분에 KM 전자 내부 상황을 조금이나마 파악한 것이었다.
‘하, 민혁이, 이놈이 진짜 KM 그룹의 정식 후계자 후보가 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