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장승일 기획실장도 평소와는 달리 침중한 얼굴로 최민혁을 직시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오성 전자를 견제할 시기입니다. 집안싸움을 할 때가 아닙니다.”
그가 내놓은 것은 오성 전자가 KM 계열사를 상대로 한 작업이 적힌 보고서다. 특히 KM 전자 보고서와 관련해서 추가적인 해석도 있었다.
“이거 다 최 실장님이 제안한 보고서를 토대로 만든 파일입니다. 뭐, 이래도 최 실장님께서 모르는 일이라고 우기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 문제는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서 굳이 최 부회장님이랑 계속 싸우시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보고서에는 베트남과 연계된 태국과 관련된 부분도 나왔다.
“…….”
‘태국의 외환 시스템 문제를 벌써 알아봤다니, 역시 눈치가 빨라.’
IMF 위기에 앞서서 나타난 징조가 바로 태국의 바트화 몰락이다.
KM 전자 보고서에는 베트남 몰락 이전에 태국의 고정 환율 제도를 언급했다.
얼핏 생각하면 태국은 외화 보유액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정책이 우선될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도 않았다.
태국 내에 들어와 있는 막대한 외환 투자액 때문이었다.
이 투자 내역 중에는 특히 일본 투자액이 상당히 많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정부와 대기업이 제로 금리의 일본 자금을 끌어와서 동남아 투자를 대폭 늘렸다는 점이다.
만약 동남아 경제에 문제가 생겨서 이 투자에 문제가 생긴다면 한국 경제에도 직격타가 된다.
기획 조정실에서는 놀랍게도 얽히고설킨 동남아 경제를 토대로 홍콩, 일본, 한국의 전반적인 움직임을 조사했다.
최민혁 자신이 힌트를 제공했다고 해도 이런 답을 찾기는 쉽지가 않은 일이었다.
‘장 실장은 정말 보는 안목이 남다른 사람이구나.’
아마 최문경 부회장이 최민혁 전생처럼 날뛰었다면 장승일 실장이 이런 문제점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최민혁 덕분에 최문경 부회장 입지가 좁아지자 장승일 실장도 일을 제대로 하면서 앞으로 생길 문제를 잡아냈다.
‘나비효과인가?’
최민혁은 애초에 태국이나 베트남 정부의 활동 따위는 관심이 없었고, 한국 경제의 움직임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IMF가 온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KM 그룹 계열사에 대한 생각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들 회사가 설마 망한다고 해도 그건 경영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이나 이창명 이사를 상대하는 일만 했다.
IMF 역시 그에게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런데 장승일 실장이 자신이 TV 사업부를 매각할 용도로 만든 보고서를 아직도 들고 다니며 재탕, 삼탕, 심지어 사골국까지 우려냈다.
최민혁이 빼먹은 부분을 포함해서 아예 새롭게 보고서를 재창조했다.
‘역시 대단해.’
“하지만 이번 일도 따지고 보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먼저 시작한…….”
예리한 눈으로 최민혁이 보고서를 살피는 모습을 보던 장승일 실장이 대답했다.
“압니다. 다만 이번 일만큼은 일단 경고를 주는 것에서 끝냈으면 합니다. 실장님이 의도적으로 이일태 이사를 부추긴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
“제가요? 이일태 이사를 부추겼다고요?”
“후유, 말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장님은 누구보다 잘 알지 않습니까. 지금 KM 전자와 KM 그룹이 나아갈 길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왜 제가 손해를 볼 일은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요?”
“대신에 회장님이 앞으로 최 실장님이 그룹 경영 승계 후계자라는 사실을 정식으로 계열사 사장단에 알릴 겁니다.”
“호오, 그래요?”
이 말에는 최민혁도 흥미를 드러냈다. 꼭 이일태 이사를 제거하지 않아도 이번 일에서 가장 크게 얻은 점이 있다면 최두진 사장과의 협상이다. 특히 지난 KM 산업의 지분 매입과 관련된 부분이 큰 이득이다.
더불어 다른 어떤 이슈보다 최민혁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필요하다면 최두진 사장에게 일부 보상이라도 해줄 생각마저 했었다.
그러니 장승일 실장이 뭐라고 떠들든 그 내용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수긍하는 척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이일태 이사 죽이기 작업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니까.’
장승일 실장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는 최민혁 태도에 자신의 설득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최 실장님은 충분히 최 부회장님하고 싸울 수 있는 역량을 확보했다고 기획 조정실에서 판단했습니다. 그게 큰 의미가 있을 겁니다.”
이제까지는 암묵적으로 그룹 후계 관련해서 조용히 말이 돌았다. 아무래도 자식과 손자 관계다. 최민혁은 뭘 해도 뒤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회장님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정식 그룹 후계자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이다.
물론 애초에 KM 그룹를 승계받을 생각이 없는 최민혁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을 본격적으로 견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쁘지 않았다.
‘이제는 대놓고, 계열사 사장을 상대로 얼마든지 손을 써도 된다는 이야기이니까.’
심지어 이 얘기는 최용욱 회장이 앞으로 KM 그룹 지분을 최민혁에게도 넘길 수 있다는 모양세를 취한 것이다.
이전처럼 최문경 부회장이 겁을 상실할 채 최민혁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이일태 이사는 이미 식물 이사라서 사내에서 큰 힘도 없다.
‘쓰레기 처리장으로 이용하면 나쁘지 않지.’
장승일 실장은 눈치를 보다가 결국 추가로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최 실장님이 원하신다면 KM 핵심 계열사 중에 원하는 계열사를 넘길 수도 있습니다.”
최민혁은 머지않아 IMF가 시작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관심 없습니다.”
“네? 정말입니까?”
그는 장승일 실장이 내놓은 보고서를 흔들면서 피식 웃었다.
“장 실장님은 이 보고서를 만들어 놓고도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기조실 내부에서도 최악의 상황에는 예측을 넘어선 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는데, 그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전개된다는 말입니까?”
“그거야 장 실장님이 알아서 잘 찾아보셔야죠.”
‘힌트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과연 장 실장이 미리 잘 대처할까?’
“저, 저기 실장님, 혹시 아는 것이…….”
최민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첫째 큰아버지 관리나 잘하세요. 다음에 또 시비를 걸면, 아무리 할아버지가 반대해도 KM 산업 지분 공개 매수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뒤늦게 벨린 투자가 가지고 있는 자본금을 일부 파악한 장승일 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제가 직접 이일태 이사만 안 건드리면 상관이 없는 것이겠죠?”
“…그건 그렇지만.”
최민혁도 KM 산업의 지분 매입이 아쉬웠지만, 시간은 많았다. IMF 터지고 난 다음에 헐값에 주워담아도 충분했다.
다만 ETRI 일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오성 전자가 비록 KM 전자는 아니지만, KM 그룹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두말하기 없깁니다.”
찜찜한 얼굴을 한 장승일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말을 망설였다. 최민혁 행동을 봐서는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거지?’
최민혁은 애초에 그룹 승계 문제 관련해서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나쁘지 않았다. 최민혁의 목적 자체는 딱 한 가지뿐이었으니까.
‘우리 첫째 큰아버지만 계속 흔들 수 있으면 나머지는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런데 이번 일이 집안에 알려지면 한동안 시끄럽겠어.’
* * *
최민수는 위성 사업부에 다니면서도 주변 눈치를 계속 봤다.
특히 최근 들어서 최문경 부회장과 최민혁의 대립이 극에 달하자 더 몸을 사렸다.
재벌 3세라면 마땅히 해야 할 갑질은 고사하고 직원 눈치나 보고 있었다.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고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허훈 과장이 물에 빠진 쥐새끼 몰골을 한 최민수를 보자 오히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과연 믿을 수가 있을까?’
숙맥도 저런 숙맥이 없었다. 최소한 드라마 수준의 재벌 3세 모습까지는 안 바라도 그 반도 따라가지 못해서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민수가 적극 나서서 자신을 휴게실로 끌고 갔다.
“혹시 이번 일과 관련해서 아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일 말입니까?”
“아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 들려서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는데, 민혁이가 아버지와 같이 그룹 승계 후계자 중에 한 명이라는 소리도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거 맞습니다.”
“네?”
허훈 과장의 대답에 패닉에 빠진 최민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제 고작 20살에 불과한 최민혁이 그룹 승계 후보 중에 한 명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최훈열 전무가 감옥에 가면서 낙오한 이후에 남은 그룹 후계 후보자는 최문경 부회장과 최동영 상무뿐이었다.
아니 이미 최문경 부회장이 그룹을 승계받는 것이 공공연히 알려졌다.
최용욱 회장조차 건강 때문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 암묵적으로 공표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최민혁이 경영권 레이스에 끼어들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최민수도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뒤늦게야 최민혁이 후보가 된다면 자신 역시 안 될 것이 없다는 욕심마저 생겼다.
“그, 그게 진짜입니까?”
“네.”
한숨을 내쉰 허훈 과장은 자신의 라인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최민수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최민혁이 그룹의 후계자 후보가 됐다는 건 KM 그룹 전체가 최민혁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건 곧 자기 밥그릇조차 최민혁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
허훈 과장은 어차피 알 일이라고 생각해서 미리 말했지만,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괜찮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갑작스러운 최민수의 연락을 받은 최영란은 시간 없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경영권에 대해서 할 말이 있다라는 말에 최민수를 만나러 나섰다.
KM 산업 건물과 가까운 커피숍에서 장승처럼 앉아 있는 최민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민수야, 무슨 일 있냐?”
“…….”
최민수는 바로 그녀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자기 아버지가 감옥에 갔을 때만 해도 최민혁이 설마 배후일까 의심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최민혁이 정말 뭔가 하지 않았을까에 대해 의심했다.
KM 그룹 경영권 레이스에 참여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하지만 이미 최민수 자신은 대안이 없었다. 좀 더 힘을 가진 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누나, 혹시 이야기 들었어?”
전장 사업 기획 때문에 반쯤 정신이 나간 최영란은 툴툴거렸다.
“나 지금 내 일만 해도 바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할아버지가 민혁이에게 그룹 승계권을 줬다는 소리가 있어!”
“응?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미 우리 아버지가 그룹 승계를 받는 것으로 할아버지가 다 얘기했었어. 이제 와서 그게 말이 되냐.”
“아니 진짜라니까.”
감정에 복받친 최민수는 허훈 과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주저 없이 늘어놓았다.
“…….”
커피를 마시던 최영란도 입에 커피 잔을 댄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한동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결국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후에 최민수에게 소리쳤다.
“그, 그러면 아버지가 할아버지 지시를 어겨서 이번에 민혁에게 정식 경영권 레이스에 참가할 수 있는 티켓을 줬다는 소리야?!”
“그렇다니까. 이게 말이 돼? 민혁이는 나보다 나이도 어리잖아. 민혁이가 가능하다면 나도 되고, 누나도 안 될 것이 없잖아.”
“야, 그게 말이 되냐. 넌 그룹 경영이 뭔지나 알고 그런 소리를 해? 나도 벌써 5년 넘게 업무를 봤지만, 아직도 경영이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네가 KM 그룹 같은 대기업을 경영한다고?!”
“하지만 민혁이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것이 없잖아?”
두 눈이 충혈된 최민수도 뒤늦게 자기 밥그릇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놈의 자식이.’
그나마 경영의 쓴맛을 경험한 최영란은 어이가 없었지만, 최민수를 타박하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겠어.’
“야, 넌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말고, 지금 하는 일이나 열심히 해. 요즘 너희 사업부에 대해서 말들이 많아. 나한테도 네 위성 사업부의 개막장극이 들려오고 있으니, 말 다한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