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96화 (196/1,021)

#196.

“말이 그렇잖아. KM 산업 지분을 민혁이 그놈이 모은다는 이야기는 걔가 KM 산업의 경영권을 노리는 거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잖아? 설마 나보고 이대로 당하고만 있으란 소리야?”

“회장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번 일 통해서 부회장님이 당분간 자중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게 말이 돼? 지분을 넘겨주고도 그냥 이대로 있으라고?!”

“하지만 이번 ETRI 사건도 결국 문제를 키운 사람이 최문경 부회장님 아닙니까. 중간에 중재만 잘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하.”

일방적으로 막 쏘아붙이는 장승일 실장 행동에 최문경 부회장도 뒤로 물러나서 멍하니 쳐다보았다.

설마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최문경 부회장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장승일 실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장승일 실장도 뒤늦게 사과하면서 슬그머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오성 전자가 최근 우리 KM 그룹 계열사에 계속 손을 쓰고 있는 것을 봐서 제가 민감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장승일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KM 건설을 비롯한 KM 계열사에 대한 오성 전자의 간섭과 관련된 예민한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특히 장승일 실장은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시장의 안 좋은 징후도 지적했다.

최문경 부회장도 꽤 놀란 얼굴을 한 채 보고서를 살폈다. 그 역시 오성 전자가 이렇게 교묘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줄 몰랐다.

‘이창명 이사 그놈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권태성 실장 이놈이 뒤에서 딴짓을 벌이고 있었구나. 하, 정말 믿을 수 없는 놈들이네.’

장승일 실장은 ETRI 관련 안건에 대해서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오성 전자는 KM 전자에 대해서 단단히 작정하고 움직이는 중입니다. 그런데 부회장님은 그런 내막을 모른 채 오히려 오성 전자를 싸움에 끌어들이려 했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진짜 분노한 것은 그 이유 때문입니다.”

“…….”

최문경 부회장은 묵묵히 보고서를 굳은 얼굴을 한 채 살폈다. 그 역시 KM 전자 관련 보고서와 비교된 부분을 확인했다.

“이게 정말인가?”

“네. 그나마 KM 산업은 좀 나은 편입니다. 아마 그래서 부회장님은 못 느끼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오성 그룹과 사업이 겹치는 KM 전자를 비롯한 계열사는 지금 심각합니다.”

장승일 실장은 정확히는 그룹 비서실이 ETRI에 집중한 나머지 오성 전자의 움직임을 간과했을 것이라는 말까지 하지는 않았다.

“좋아. 나도 우리 그룹이 지금 오성 전자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분 매각은 이야기가 다르잖아. 왜 민혁이 그놈만 일방적으로 이익을 봐야 해?!”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추고 최문경 부회장을 다독거렸다.

“좋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최 실장님 만나서 다시 재조율하겠습니다. 회장님께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부회장님도 당분간은 절대 KM 전자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최문경 부회장은 힐끗 황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다행히 그 역시 별다른 이의는 없었다.

일단 이번 일은 아버지가 상황을 알았기에 물러서는 것이 최선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룹에 대한 오성 전자의 간섭이었다. 오성 전자가 KM 산업에도 얼마나 손을 썼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알겠어. 하지만 민혁이 그놈도 문제야. 제 마음에 안 든다고 이일태 이사를 막 자르는 것은 직권남용이잖아. 그 새끼가 진짜 나쁜 놈이야!”

“그것 역시 제가 나서서 중재해 보겠습니다.”

“…알겠네.”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이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지금 분노한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보다는 장승일 실장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빌어먹을.’

* * *

이일태 이사는 요즘 들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특히 잠만 들면 최민혁, 그 악마와 관련된 악몽을 꾸는 바람에 피로에 떨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했던 알아서 도와주겠다는 말만 믿고 출근은 하지만 회사 나가서도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여유가 되면 휴게실에 가서 몰래 줄담배를 물었다.

이석우 부장이나 허훈 과장이 계속 자신을 찾아다녀도 아무런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위성 사업과 관련된 결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싫어하는 이석우 부장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사님, 정말 괜찮습니까?”

“걱정하지 마.”

“몸이 안 좋으면 일찍 퇴근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정도는 아냐. 그냥 감기 몸살이라서 그래. 아마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평소처럼 대답하기는 했지만 따가운 시선조차 부담스러웠다.

이일태 이사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을 들이박은 것을 후회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최민혁은 지금 경영권을 가진 사람이다. 오너 앞에서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대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최용욱 회장이 이 일을 정리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핏줄을 싸고 드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미쳤지.’

문제는 오성 전자의 아는 지인이 계속 전화를 걸어온다는 것이다.

[일태야, 자네 괜찮아?]

[그냥 그래. 그런데 오성 전자에 잘 다니는 놈이 갑자기 왜 전화를 하냐?]

[자네 이야기가 우리 사업부에도 계속 나와서 그래.]

[내 이야기가 거기 왜 나와?]

[나도 자세히는 몰라. 이쪽저쪽에서 이야기가 계속 나오니, 나도 당황스러워서 자네에게 전화한 거야? 정말 괜찮은 거야?]

[별일 없으니, 이런 쓸 곳 없는 전화는 좀 하지 마.]

[이 친구야, 앞으로는 몸조심해.]

이러니 시간이 갈수록 이일태 이사는 정신적으로 더 괴로웠다.

더 웃기는 것은 그럴수록 전화는 더 심하게 자주 걸려왔다.

[이일태 이사님, 도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겁니까? 지금 프로젝트 내용이 일부 조정되어서 다시 재작업을 해야 합니다. 괜찮으면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이일태 이사조차 황당했다. 그는 특히 오성 전자 쪽에 있는 지인 이야기는 너무 기가 차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불안해서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사내에서도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떠돌고 있었다.

이제는 이석우 부장이나 허훈 과장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가끔 최민수가 조용히 자신을 찾아와서 말을 걸 때는 정말 식은땀마저 흘렸다.

“걱정하지 말고,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해.”

“그런데 외주업체 담당자가 계속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쪽 프로젝트는 자칫하면 날아갈 수 있다는 소리를 하던데, 정말 괜찮은 겁니까. 혹시 이 일도 저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까?”

최민수가 걱정하는 것은 자기 때문에 혹시 위성 사업부가 큰 피해를 당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이일태 이사에게 바로 질문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민수 씨는 그런 소리 말고, 그냥 맡은 일만 충실히 해.”

이일태 이사는 나름 좋게 이야기했지만 타들어가는 속마음을 가까스로 감추었다. 뒤늦게 최민수를 받아들인 것도 몇 번이나 후회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다른 날과는 달리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이일태 이사님?”

“누구? 가만 장승일 실장님 아닙니까?”

“다행히 계셨군요. 전화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네? 아, 요즘 너무 피곤해서 핸드폰을 꺼놨습니다.”

장승일 실장과 동행한 구길모 차장은 한 일주일 정도 굶은 듯한 이일태 이사 모습에 혀를 내두른 채 조용히 서 있었다.

장승일 실장 역시 꽤 놀란 눈치였다. 다만 그는 이미 이일태 이사와 관련해서 돌아가는 제반 사항은 다 파악했다.

‘하필이면 최 실장님에게 덤벼들었을까?’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알겠습니다.”

* * *

KM 전자 소회의실 안은 침묵만이 감돌았다.

지친 이일태 이사는 이제 너무 지쳐서 다 포기하고 싶었다.

“솔직히 그룹 본사에서도 제 일을 알았나 본데, 마음대로 하십시오.”

“네?”

“단단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실적도 없는 마당에 이 자리에 붙어 있는 것도 웃기죠. 이젠 다 내려놓겠습니다.”

불안과 초조함에 지친 이일태 이사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이미 사직서까지 만들어 품 안에 품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을 상대로 최민혁이 욕설이라도 했으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아무런 터치가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지인을 통해서 별의별 이야기가 다 들린다는 것이다.

사람 피를 말려서 고혈을 짜는 최민혁의 수법이 더 끔찍했다.

“아, 저는 최훈열 전무님과는 달리 횡령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뭐 있다고 한다면 실적이 없는 것뿐입니다.”

장승일 실장도 반쯤 폐인이 된 이일태 이사를 앞에 두고 내심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웃었다.

“하하하,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괜찮다니까요.”

실의에 빠진 이일태 이사 행동에 장승일 실장도 쉽게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일태 이사가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이일태 이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일에 최문경 부회장, 오성 전자, ETRI가 다 같이 엮여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민혁조차 굳이 이일태 이사를 당장에 쫓아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물론 확실치는 않아. 도대체 최 실장님은 어쩌려고 저러시는 건지 모르겠어. 이일태 이사님이 전화를 안 받아서 혹시나 했는데, 늦지는 않았어.’

“당분간은 휴가를 좀 내서 머리도 식히고, 그렇게 하십시오. 최 실장님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절대로 회사에서 자르지 않을 겁니다.”

“글쎄요 실장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네요. 다른 것을 떠나서 오성 전자가 디코더 관련해서 한 일 때문에 제 실적이…….”

“그 일도 모두 잘 처리가 될 겁니다. 오성 전자 측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생하셨던 것도 다 잘 처리가 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이일태 이사님이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일태 이사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는 장승일 실장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사실 이일태와 관련된 이해 당사자는 모두 조금씩 의견이 많이 달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대다수는 이일태 이사가 생존하기를 원했다.

심지어 이 사태를 악화시킨 이창명 이사조차 이일태 이사가 결국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에서 자기편이라는 것을 알자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

“지금 당장 가서 휴가 신청부터 먼저 하십시오. 가족과도 못 다한 시간을 보내시고요. 휴가 보내고 난 후에는 모든 일이 잘 풀려 있을 겁니다.”

“정말입니까?”

“녹음해도 됩니다.”

“조, 좋습니다. 그러면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넵.”

* * *

“…흠,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다시 만난 최민혁 행동에 이전과는 달리 피식 웃었다.

“최 실장님, 너무 마음에도 없는 말은 마십시오. 어차피 이일태 이사가 붙어 있는 것이 최 실장님께서 진짜 원한 그림 아닙니다.”

“제가 이일태 이사가 회사에 붙어 있는 것을 원한다고요?”

“차라리 이일태 이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실장님 반대 파벌을 감시하기 좋으니까요. 설마 제 추측이 틀렸습니까?”

“…….”

최민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번에 이일태 이사를 처리하려고 했지만 아쉬운 점은 있었다.

이일태 이사를 정리하고 난 다음에는 최민수를 맡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문제가 될 게 꽤 많았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업부에 최민수를 끼워 넣기도 곤란했다.

독이 든 사과 하나가 멀쩡한 조직까지 썩게 할 수도 있으니까.

할아버지 시선을 의식해서 저기 지하에 새로운 팀을 만드는 것도 좋지는 않았다. 다른 것을 떠나서 자신 역시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도와준 사람이 바로 최용욱 회장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는 우리 할아버지라면 오히려 이 문제를 가지고 날 괴롭힐 확률이 높아. 지금 당장은 할아버지와 적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아.’

장승일 실장은 더욱이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일태 이사의 문제가 된 디코더 부분도 오성 전자 측에서 무상으로 자신의 기술 제휴를 해주는 것으로 했습니다.”

“이창명 이사가 그걸 용인했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오성 전자가 우리 KM 전자를 노리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남의 회사의 이사를 생각해 주다니, 정말 웃기는 일이네요.”

“…대신에 이일태 이사를 자르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입니다. 그리고 최 부회장님도 KM 산업의 지분을 매입하지 않다면 이번 일만큼은 최 실장님께서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습니다.”

최민혁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설마 제가 그걸 용인할 거로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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