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90화 (190/1,021)

#190.

최민혁 역시 최문경 부회장을 공격할 수단을 찾지 못해서 한동안 지켜만 봤다. 그렇지만 당하기만 하는 최문경 부회장이 저렇게 설치는 이유를 모를 수가 없었다.

“하, 정말 생각이 없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흠, 고민되네요.”

이미 보안 문제는 수차례 보완을 거쳐서 많이 바뀌었다.

특히 안산 공장이나 본사 쪽은 외부인이 아예 들어올 수도 없고, 내부인은 업무할 때 쓰는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쉽게 가지고 나갈 수도 없었다.

개인 휴대폰 사진기 역시 사내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규정되었다.

하지만 김명준 과장은 좀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뇌물이나 직위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이 나올 겁니다. 아니, 그런 일이 없어도 직원 역시 불안할 겁니다.”

“그럴 수도 있죠.”

최민혁은 애초에 위성 방송 사업 자체를 또 다른 전장으로 만들었다. 굳이 그 영역을 다시 KM 전자까지 넓힐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다른 쪽으로 영역을 넓힐 수 있도록 기름칠만 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렇다면 원하는 것을 주면 되겠죠. 김현우 상무를 이용하면 어떨까요?”

“네? 김현우 상무 말입니까?”

“김현우 상무가 아직도 오성 전자 내에서 잘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그쪽으로 갈 수 있도록 적당히 작업하면 되니까요.”

“설마 기존 직원을 이용할 생각입니까?”

“능력 있는 직원을 그냥 둘 이유는 없죠. 제가 알기로 안선종 팀장은 과거 연구소장의 행패에도 잘 버틴 것으로 압니다. 앞으로 차기 공장장 후보인데, 알아서 잘 처신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 * *

민상수 부장도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의 압박에 꽁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KM 전자를 이 잡듯이 뒤졌다. KM 전자 조사에 가용한 모든 인맥을 다 동원했다. 그도 시간이 흐를수록 불만을 토로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까칠하지만 민상수 부장을 잘 따르는 오기준 과장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저희 윗선에선 도대체 왜 KM 전자에 이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요?”

“잘 알면서 뭘 물어.”

“역시 그룹 승계 문제 때문입니까?”

“오 과장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잖아.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하지만 부장님도 불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오동통한 체격에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민상수 부장은 그래도 지금까지 잘 버텼다. 이번에 최문경 부회장 라인으로 갈아타서 생존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주목받으면서 상황이 또 달라졌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눈치를 보던 오기준 과장은 이미 윗선의 지시를 받아서 KM 전자, 최민혁, ETRI에 대한 것을 샅샅이 살핀 덕분에 많은 것을 알았다. 오히려 실무진이기에 느끼는 것이 더 많았다.

“부장님, 요즘 와서 느낀 것이지만 설마 최민혁 실장이 그룹 승계를 받는 일은 없겠죠?”

“…회장님이 치매가 오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지난 사장단 회의 이후에 계열사 사장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이 최민혁 실장을 꾸준히 찾아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설마 그것도 그냥 두고 볼 생각입니까?”

“…어쩔 수 없어. 회장님께서 지시한 사안이니까.”

“맙소사 그러면 진짜 문제 아닙니까?”

호들갑을 떠는 오기준 과장은 눈치가 빠르기는 하지만 든든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당장 눈을 도르르 굴리는 중이었다.

“야, 오 과장, 정말 쓸데없는 고민 할래?!”

“죄, 죄송합니다.”

괜히 더 타박을 받은 것 같아서 오기준 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민상수 부장 성격을 알기에 다른 주제로 냉큼 돌렸다.

“차라리 여러 곳을 살피는 것보다 한곳에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것도 일장일단이 있어.”

그 와중에 두 사람은 안선종 팀장에게서 갑자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두 사람은 이미 연락을 했었지만, 아예 만나지도 못한 사람의 연락이라서 곧바로 안산 공장을 향해 차량을 몰았다.

‘됐다.’

* * *

안선종 팀장은 다소 황망한 얼굴로 김명준 과장 통해서 받은 지시 사항을 떠올렸다. 갑자기 불러서는 이중 첩자 노릇을 해달라는 이야기를 하기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KM 그룹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 관한 이야기를 본사 지인 통해서 들은 터라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KM 그룹 계열사마다 이번 일로 시끄러웠다.

과거라면 최민혁이 그룹 승계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 비웃을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았다.

망해가던 KM 전자 올해 매출이 창립 이래 사상 최고를 기록하리라는 것.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이런 일에 끼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금 안산 공장은 콜린스 때문에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최훈열 전무에게 압박받던 시절을 떠올리니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전화를 걸었던 민상수 부장은 안선종 팀장을 보자 그저 높은 어른을 만난 것처럼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안선종 팀장님을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이미 그룹 본사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던 그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압적이고, 관료적인 모습 말이다.

거기에 딱 옆자리로 와서 술까지 따라주는 모습에선 과거의 당당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선종 팀장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사람의 환대를 받았다.

안산 최고의 한식집 접대도 나쁘지 않았다.

이중 첩자를 하라는 지시에 충실히 따르면 되는 덕분에 뒤탈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술맛이 얼마나 달달한지 몰랐다.

그동안 고생한 자신이라면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나.

‘좋네.’

“저도 이번 사장단의 회의 소식 들었습니다. 걱정이 많겠습니다.”

“물론입니다. 부회장님도 회사 내에 뛰어난 인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바로 안선종 팀장님입니다.”

‘지랄하네.’

실상 콜린스 양산 신화를 주도한 사람 중의 하나가 안성종 팀장이었다. 그가 허리 숙인 체하면서 최훈열 전무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면, 김창호 부장조차 최구만 과장을 도와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의할 인물이겠지.’

하지만 지금은 또 상황이 다르다.

그의 능력은 이미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는 KM 그룹 비서실이 만든 리스트 최상단 자리 잡고 있었다.

“저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익히 들었습니다.”

“네?!”

깜짝 놀란 두 사람.

“아, 조상돈 팀장 통해서 이일태 이사 이야기를 들으면서 관련 정보도 알았다는 말입니다.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 눈빛이 반짝였다.

“그렇습니까?”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다.

안선종 팀장은 대충 두 사람이 뭘 하는지 알자 피식 웃었다.

“그런데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일태 이사를 살리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오성 전자가 지금 진행하는 일을 중단시키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이창명 이사 쪽과 몇 번 접촉했는데, 저희 말을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많은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이라면 치를 떨어서 KM 그룹조차 믿지 않았다.

“그러면 다른 채널 통하면 되지 않을까요?”

“다른 채널이라면…….”

“저도 오성 쪽 지인 통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김현우 전 상무 말입니다. 아직 오성 전자에 잘 다니고 있지요. 그라면 이창명 이사 쪽에 잘 말해줄 수 있을 겁니다.”

“……!”

민상수 부장은 깜짝 놀랐다. 생각도 못 한 기발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맙다는 몇 마디 말만 남기고는 다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안선종 팀장은 웃으며 배웅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진짜 생각이 없네. 그나저나 실장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네. 왜 굳이 최 부회장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일까?’

* * *

민상수 부장은 본사로 복귀하기가 무섭게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김현우 상무라는 카드를 내밀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나쁜 의견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바로 보고했다.

“그런데 김현우 상무도 이창명 이사 쪽하고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을 텐데?”

“아니, 있습니다. 김현우 상무가 오성 전자에 있는데, 여전히 회사를 잘 나가고 있습니다.”

“뉴스에 나와서 그렇게 분탕질을 해놓고도 회사에 다닌다고?”

“그게 최두진 사장이 도와준 것 때문인지 전관 출신 변호사를 동원해서 버티는 중입니다.”

“그게 가능해?”

“오성 전자 내부에 있는 명목뿐인 노조를 부추기고, 외부 노조 세력까지 끌어들여서 계속 판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오성 그룹 본사 시위도 김현우 상무가 배후였습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김현우 전 상무와 관련된 보고서를 살피면서 혀를 내둘렀다.

“하, 그 돼지가……. 진짜 대단한 놈이다. 그래. 차라리 잘됐다. 그놈으로 하자. 최민혁에게 원한이 있는 김현우 상무라면 말이 안 통하는 그 미친 이창명도 우리 제의를 거절하지 않을 거고.”

“…알겠습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어이가 없었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 괜히 최문경 부회장 자극해 봐야 자신만 박살이 난다는 것은 잘 알았다.

‘두 사람 사이도 안 좋아서 약간 걱정되지만, 김현우 상무라면 방법을 찾겠지.’

* * *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김현우 상무 아니 김현우 수석 부장은 여전히 오성 전자를 잘 다니고 있었다. 그는 오성 전자 내에서 누가 뭐라고 하던 자기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김현우 수석 따라서 이직한 몇 사람은 너무 부끄러워서 오성 전자를 그만뒀다.

그럼에도 김현우 수석은 출근 도장을 쿡쿡 잘만 찍었다.

주변의 다른 팀은 이런 김현우 수석의 행보에 시간이 갈수록 감탄했다.

다른 무엇보다 오성 전자 내에 노조와 손을 잡은 그의 행보는 나름 근로자에게 도움을 준 것, 또한 사실이었다.

물론 이 사태가 오성 그룹 기획 조정실까지 올라가면서 또 그렇게 보기에도 어려워졌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자기 팀이 해체된 상황에서도 남아 있는 직원을 다독거렸다.

“천 과장,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 분명히 기회는 올 거야.”

“…네.”

천선구 과장을 비롯한 남아 있는 직원은 그저 김현우 수석 부장 지시만 따랐다.

김현우 수석이 민상수 부장을 만나서 ETRI 정보를 들은 것은 딱 이 시기였다. 그는 안 그래도 안국호 부장과 계속 갈등하는 중이라서 이게 전환점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당당한 걸음으로 안국호 부장을 찾아갔다.

최근 ETRI 공작 덕분에 정신이 없던 안국호 부장은 갑작스러운 김현우 수석 방문에 깜짝 놀랐다. 김현우 수석은 살이 너무 많이 쪄서 멧돼지 같아 보였지만 실상 덩치는 씨름 선수 못지않았다.

“뭐, 뭡니까?”

“할 말이 있습니다.”

“전 당신이랑 할 말 없습니다. 정 하고 싶다면 법무 팀 찾아가서 이야기하세요.”

재판 중에 참고인 조사를 받았던 안국호 부장은 인상부터 찌푸렸다. 김현우 수석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면서 그 역시 타격을 받았다.

오성 전자 감사 팀에서 결국 문제를 걸고넘어진 것이었다.

이창명 이사가 무마해 주기는 했지만, 조용히 넘어간 것도 아니었다.

6개월 감봉이라는 징계를 받았으니까.

‘지독한 새끼.’

처음에는 호구로 교묘하게 안국호 부장을 괴롭힌 김현우 수석 부장은 민사 재판에서 악착같이 물고 늘어졌다.

그로서도 살다 살다 이렇게 독한 놈은 또 처음이었다.

“그 ETRI 말입니다. 그거 안 부장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상관할 문제는 아닙니다.”

꼬투리를 잡히기 싫어서 말도 조심했다. 괜히 이 자리에서 녹음한 것으로 또 협박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김현우 수석 부장은 실제로 그 짓도 했다.

김현우 수석은 그제야 씩 웃었다. 그는 아직도 안국호 부장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는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별로 듣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세요.”

“제가 KM 전자를 그만둔 이유가 최민혁 실장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까?”

“그거야…….”

알기는 안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가 KM 전자의 STB 사업부 인수였다.

그 계약으로 딸려온 김현우 상무는 오성 전자 입장에서는 재앙이었다.

안국호 부장도 내막을 얼핏 알기는 했지만, 그 자세한 속사정까지는 몰랐다. 권태성 실장이 자기 약점을 다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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