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89화 (189/1,021)

#189.

민상수 부장은 본인이 차장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굳이 하대하지 않았다. 그는 이보다는 최근 KM 전자의 내부 갈등을 토로하면서 푸념을 털어놓았다.

“저도 최민혁 실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일태 이사는 나름 KM 전자에 크게 이바지한 분입니다. 그런 분과 갈등하는 것이 마냥 보기 좋지만은 않습니다.”

“이유가 있겠죠.”

“네? 설마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여기서 황광수 차장은 표정 연기를 했다. 그는 마치 드라마 조연인 것처럼 적절하게 갈등하는 척했다. 심지어 자신이 아는 내용이 확실치 않다는 점을 넌지시 밝혔다.

사내에서 거친 태도로 말이 많은 민상수 부장은 바로 저자세를 취했다.

“안 그래도 이 일 때문에 제가 죽겠습니다. 이번 한 번만 도움을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이번 빚은 갚겠습니다.”

“···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최민혁 실장이 위성 방송 시스템 쪽에 손을 썼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민상수 부장은 소리쳤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게 말입니다. 사실은······.”

이창명 이사도 아직 모르는 ETRI 내부의 이야기였다. ETRI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권태성 기획실장이기에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민상수 부장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숨을 내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쳤다.

“아니, 다 좋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위성 방송 기술은 어떻게 고안했다는 말입니까?”

“그게 비디오 특허 공동 연구 이후로 이동호 교수 측과는 꾸준한 관계를 이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동호 교수도 최근 공간 압축 기술 때문에 송한성 교수 연구 팀을 밀어줬습니다. ETRI 위성 연구 팀이 바로 이 기술을 차용했다고 합니다.”

“하.”

생각도 못 한 대답에 민상수 부장은 멍하니 입을 열린 채 혀를 내둘렀다.

‘맙소사 왜 이 사실을 몰랐을까.’

공간 압축 기술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위성 기술은 그 많은 분야 중에 한 부분일 뿐이다. 그걸 민상수 부장이 계속 조사를 하지 않는데 알아낼 수는 없었다.

최민혁조차 송한성 교수 연구 팀이 하는 일을 전혀 몰랐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겁지겁 KM 본사로 향했다.

“······.”

황광수 차장은 남은 술잔을 조용히 마시면서 탄식하고 말았다.

‘이게 아닌데.’

어쩔 수 없이 KM 그룹을 그만뒀다. 오성 전자에 입사할 때는 나름의 꿈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보 역공작이나 하고 있다.

그것도 전 직장을 상대로.

참담한 황광수 차장은 어쩌다가 자기 꼴이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모두 최민혁 실장 때문이겠지? 하, KM 전자가 이렇게 변할 줄 상상도 못했어.’

***

KM 그룹 비서실은 최민혁 실장의 ETRI 내부 행보가 알려지면서 발칵 뒤집혔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너무 늦게 안 정보에 망설이다가 결국 최문경 부회장에게 보고했다.

“······.”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이전처럼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그는 이미 최민혁에게 너무 많아 당해서 그냥 그런가 했다.

“죄송합니다.”

“됐어.”

“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된 거야.”

최문경 부회장 역시 ETRI 내부 일까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을 느꼈다. 자신과 최민혁은 접점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이보다는 오히려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 연구 팀에 의문을 느꼈다.

“이 비디오 특허가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게 사실은······.”

실상 권재홍 비서실장도 이 특허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나마 민상수 부장이 책임을 피하고자 짜깁기 형식으로 올린 보고서를 보고서야 얼핏 알았다.

사실 아직은 비디오 특허가 돈이 되지 않았다. 그저 오디오, 비디오 표준을 잡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이쪽 전자 분야를 쥐고 있는 오성 전자조차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애매한 시기였다.

그러니 반도체 패키징 분야만 파고 있는 KM 산업에서 제대로 그 의미를 알 리가 없었다.

아니 알았다고 뒤늦게 자료를 조사해 보자 끝도 없는 정보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최근 최병연 팀장이 올린 MP3 관련 특허도 있었다.

“···이 MP3 특허는 또 뭐야?”

“오디오 관련 특허로 알고 있습니다.”

자료를 찾아봐도 요식적인 MP3 정보만 나왔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 실장, 비서실의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서 이 정보를 파봐.”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MP3 특허가 아니라 위성 기술과 관련된 비디오 특허다.

“그리고 이게 진짜 문제인데······.”

최문경 부회장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째 민혁 이놈이 조용하다 했어. 설마 이렇게 많은 굴을 파놓고 있었다니. 하,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단순히 놀랄 일이 아니었다.

스텝 바이 스텝으로 진행된 최민혁의 행보는 섬뜩한 정도였다.

비디오 특허를 시작으로 해서 관련 분야 쪽을 계속 파고 있었다.

최민혁이 가는 길의 지향점은 확실히 아날로그가 아니라 디지털 방향이었다.

당장은 돈이 안 된다고 생각한 이 특허는 당장 위성 방송 시스템에 적용되었다.

최문경 부회장도 이제는 최민혁 욕보다는 오히려 혀를 찼다.

‘물론 이놈이 디지털 세상이 온다고 계속 떠들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하다니.’

“가만 그런데 오성 전자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거야?”

“황광수 차장 이야기로는 실무진 선에서 찾기는 했다고 합니다.”

“그건 이상하네. 권태성 실장이 바보도 아닌데, 이 일을 그냥 내버려 뒀다고?”

“아마 권태성 실장도 이 내막을 제대로 모르고 있을 겁니다.”

“진짜 모른다고? 아니 오성 전자가 ETRI에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퍼부었는데, 거기다 그 안에 오성 인맥이 얼마나 많은데 모를 수가 있어?”

“···그건 차후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도 아차 싶었다. 일단 보고가 급해서 서둘렀는데, 막상 보고하려 하니 이것저것 빈틈이 많았다.

‘최 실장은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잠깐 망설이던 그도 일단 보고부터 했다.

“황광수 차장 이야기로는 이창명 이사가 권태성 기획실장과는 사이가 안 좋다고 합니다. 견원지간에 가깝다 보니,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는커녕 오히려 숨길 정도입니다.”

“쯧.”

덩치가 그렇게 큰 오성 전자 내부의 사내 갈등을 떠올린 최문경 부회장도 혀를 찼다. 딱 힌트를 듣는 것만으로 돌아가는 그림을 알아봤다.

‘그러면 말이 되지.’

그 대단하다는 오성 전자 내부 역시 돌아가는 꼬락서니는 KM 그룹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근 뉴스를 장식한 이창명 사태를 떠올렸다. 그 역시 목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오성 전자가 낀 것이 의아했었다.

“가만 이창명 이사가 오혜정 비서를 건드렸다가 지금 그 난리가 났지?”

“불구속 기소가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재판을 받는 중입니다. 아마 이창명 이사도 모르기는 몰라도 최민혁 실장에 대한 분노가 엄청날 겁니다.”

“또 민혁 그놈이네.”

“당시 뉴스가 나온 시점도 특이했습니다. 제가 몇몇 언론사 통해서 알아본 바로는 그들 역시 이창명이 대상인 줄 뒤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난리가 났습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뒤늦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이번 일이 얽히고설킨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이 사태의 출발점은 이창명 이사가 아니었다.

“민혁 그놈이 이일태 이사를 죽이려고 이 사태를 벌였다는 말인가? 그 와중에 이창명이 끼어서 혼쭐이 난 거고?”

“···비서실에서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어째 이상하더라.’

최근 아버지와의 식사 자리에서 보인 최민혁 반응을 떠올렸다.

너는 떠들어라 난 모른다는 식의 태도.

아무리 최용욱 회장에게 지분을 다 증여받았다고 해도 최민혁 행동은 이상했다.

그런데 최민혁이 숨어서 하는 짓을 보니 그 행동이 이해가 갔다.

‘민혁 이놈은 이미 KM 그룹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시작했어.’

최문경 부회장은 안 그래도 콜린스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벌써 또 다른 굴을 최민혁이 판다는 것을 알자 이를 악물었다.

더 큰 문제는 KM 그룹과 KM 전자 사이에 사업적인 이해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최민혁이 최문경을 상대로 압력을 행사할 방법을 찾지 못한 것처럼 그 반대 역시 성립했던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오성 전자를 이용한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더욱이 최훈열 전무는 실형을 받아서 감옥에 가 있고, 김현우 상무는 오성 전자에서 왕따를 당하는 중이다. 만약 이일태 이사마저 사라지면 KM 전자 내부에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혹시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방법은 없겠어?”

“그건 어렵습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비서실에서 관리를 해왔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오영근 사장은 최용욱 회장 라인인데, 지금은 최민혁 실장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문형섭 부사장은 오디오 분야 쪽에 잔뼈가 긁은 사람이라서 타협 같은 것은 잘 모릅니다.”

문형섭 부사장은 전형적인 오디오 엔지니어로 일반 관리자와는 달랐다. 자부심과 고집이 있어 대화나 설득이 잘되지 않았다.

“하긴 그래도 문형섭 부사장은 괜찮은 친구인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최문경 부회장은 번민에 빠졌다.

“이일태 이사가 물러나면, 우리 쪽에서 KM 전자를 컨트롤할 사람이 있어?”

“···멀티미디어 원종상 상무가 있기는 한데, 과거 최두진 사장 때문에 김현우 상무를 밀어줬습니다. 그런데 이제 김현우 상무도 없는 상황이라 저희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혁이와 사이가 좋지 않잖아? 그걸 부추겨도 안 돼?”

“최근에 만나서 이야기를 해봤는데, 자신은 지금 하던 일만 마무리하면 곧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아마 어려울 겁니다.”

“하, 그러면 이일태 이사 외에는 당장 대안이 없다는 소리야?”

이일태 이사를 정리하자고 했던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도 기존에 했던 주장을 결국 바꾸었다.

“지금 당장은 이일태 이사를 살려야 합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굳이 권재홍 비서실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래야 KM 전자에 손을 써도 쓰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최민혁이 지금 진행하는 일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야 해.”

“하지만 방법이······.”

“필요하다면 KM 전자를 이 잡듯이 찾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방법을 찾아내.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물러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

KM 그룹 비서실도 이전과는 달리 어느 정도 힌트를 잡자 빠르게 움직였다. 기존에 진행하던 일 중에 꼭 필수적인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이 일에 달라붙었다.

민상수 부장은 박상기 소장까지 동원해서 KM 전자와 최민혁을 샅샅이 뒤졌다.

최민혁도 KM 그룹 비서실이 호들갑을 떨자 모를 수가 없었다.

‘정말 생각이 없네. 날 그만큼 얕잡아 보는 것일까?’

뭐 이것이든 저것이든 상관은 없었다.

다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것처럼 뭔가 하는 것 같은데, 신통치가 않았다.

‘정말 무능하네.’

오히려 이리저리 막 찔러대자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이 찾아와서 푸념을 털어놓았다. 그들도 아직은 최문경 부회장이 부담스러운데, 자기 주변을 난잡하게 뒤집는 비서실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지난 사장단 회의 때문에 최문경 부회장이 단단히 열 받은 것 같아.”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두 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만 믿겠네.”

두 사람도 후계 구도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아서 물러났다.

김명준 과장도 눈살을 찌푸린 채 이곳저곳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할까요?”

최민혁이 피식 웃었다.

“설마 비서실이 안산 공장을 찾아가서 행패라도 부렸습니까?”

“안산 공장에서 경비원을 가장해서 침입한 놈을 일단 붙잡아서 경찰에 넘기기는 했는데, 저쪽에서 홍신소까지 동원해서 안산 공장 직원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심지어 오디오나 본사 직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급하기는 급한가 봐. 하긴 이일태 이사라면 첫째 큰아버지가 가장 다루기 좋은 상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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