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어차피 이들과는 첫 만남이라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KM 계열사 사장 역시 최민혁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살펴보는 것이 다였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앞으로 자주 좀 만나세.”
“그러죠.”
최민혁은 이 만남을 동영상으로 녹화해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보내고 싶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이 광경을 봤다면 펄쩍 뛸 거야.’
***
최민혁이 굳이 KM 계열사 사장과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들을 신뢰해서가 아니다. 최용욱 회장이 가지고 있는 그룹 지분 때문이다.
타인의 평판을 꽤 중요하게 여기는 최용욱 회장은 이들 계열사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KM 그룹 계열사 지분을 번민하면서 자연스럽게 KM 그룹 대주주인 최두진 사장을 떠올렸다.
‘첫째 큰아버지를 흔들려면 KM 그룹 지분도 있어야 해. 최두진 사장이 가지고 있는 KM 산업 지분도 괜찮아. 하지만 이미 KM 전자 지분 매각 때문에 된통 당해서 쉽게 지분을 내줄 것 같지는 않아.’
더욱이 최두진 사장의 행보도 이상했다.
KM 전자 주가가 1,600원에서 무려 80,000원대까지 폭등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한 번 찔러보는 식으로 검찰에 사기죄로 고소할 수도 있었다.
‘다른 꼼수가 있는 건가?’
하지만 최민혁은 굳이 먼저 나서지 않았다. 지금은 KM 전자 주가가 계속 상승하는 시기이므로 기다려야 했다.
최두진 사장이 어떤 식으로 행보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반응하면 그뿐이다.
궁지에 몰린 이일태 이사 역시 마찬가지다. 굳이 이미 한쪽에 몰린 쥐새끼를 더욱 몰아붙였다가 괜한 손실을 볼 이유는 없다.
지금은 이창명 이사, ETRI, 최문경 부회장의 행보를 그저 지켜보면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뿐이었다.
‘계획대로 잘 풀려가고 있는데, 굳이 나서서 문제를 만들 이유는 없지.’
사장단 소동 때문에 장승일 실장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 장승일 실장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할아버지와의 식사 자리였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찾지 못해서 약속을 잡았다.
장소는 뜻밖에도 최고급 호텔 식당.
그 안에는 이미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아내 김이경이었다.
“민혁아, 정말 보기 힘들다.”
“안녕하세요.”
푸른빛이 살짝 들어간 검은색 정장을 한 최민혁 모습은 과거의 그와는 전혀 달랐다. 지나가는 사람의 시선을 끌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김이경조차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최민혁 이모저모를 살폈다.
“어머, 정말 멋지다.”
“감사합니다.”
마치 친엄마처럼 다정다감하게 구는 김이경은 행동과는 달리 눈빛은 뱀처럼 차가웠다.
최민혁도 인생 1회차를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지금 김이경의 행동에 넘어갔을 것이다.
‘역시 놀랍네.’
이미 저택에서 몇 번 만났지만, 그때와는 또 태도가 달랐다.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 옆자리에 앉은 최영란은 이미 귀가 따갑도록 이름을 들었던 최민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응.”
“요즘 잘나가더라.”
“고마워.”
“정말 많이 변했네. 이전에는 내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던 녀석이.”
계속 삐딱하게 보는 최영란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싸움닭 같은 최영란의 행동에 최민혁은 커피를 홀짝이면서 힐끗 그녀를 쳐다보았다. 인생 1회차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최영란은 밑바닥부터 꾸준하게 성장한 덕분에 KM 그룹이 위기인 상황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최영란은 어떻게 해서라도 무너지는 KM 그룹을 구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심지어 정략결혼도 서슴지 않았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매 덕분에 드러나는 미인은 아니지만 나름 시선을 끌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첫째 큰아버지 딸이라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큰엄마 성격을 닮아서 그런 것일까?’
차갑고 냉정한 둘째 최지연은 최영란은 또 성격이 달랐다. 그녀는 김이경을 많이 닮았다. 그래서 겉으로는 감정을 잘 내색하지 않았다.
투견 같은 모녀를 상대하던 최민혁은 새삼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자기 허점을 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약점만 보이면 물어뜯는 맹수 같았다.
뒤늦게 최용욱 회장이 장승일 실장을 거느린 채 최문경 부회장과 같이 나타났다.
장승일 실장은 때맞추어 나타나서 식사를 주문했다.
최용욱 회장은 묘한 눈으로 모인 이들을 힐끗 하나씩 살폈다.
원래 최동영 상무도 부를까 하다가 관뒀다.
ETRI를 둘러싸고 이전과는 달리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단단히 뿔난 최영란은 평소와는 달리 단단히 흥분했다. 그녀는 포도주를 홀짝이더니 결국 최용욱 회장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민혁이 사정이 딱해서 도와준 것은 저도 이해가 돼요. 하지만 저처럼 평사원으로 시작한 사람은 억울하잖아. 이건 공정한 경쟁이 아니에요!”
“하지만 네 아비는 그룹 부회장이다. 문경이가 널 도와준 것도 딱히 공평한 일은 아냐. 민혁이는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
전혀 예상치 못한 최용욱 회장 답변에 최영란은 깜짝 놀랐다.
옆에 앉아서 조용히 눈치만 보던 최지연은 피식 비웃었다.
‘언니 진짜 멍청하다.’
최민혁에게 된통 스트레이트를 맞았던 최문경 부회장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는 굳이 식사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깨지고 싶지 않았다.
다만 최영란이 사고를 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조용한 압박.
김이경이 팔꿈치로 최문경 부회장을 쿡 찍어서 경고했다.
“······.”
김이경의 눈치를 보던 최문경 부회장은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
최민혁은 이 독특한 가족의 모습을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 독특하다니까.’
다른 사람은 최문경 부회장이 실권을 잡고 있는지 안다. 하지만 실상 김이경이 오히려 최문경 부회장을 뒤에서 잡고 뒤흔들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멍청해서라기보다는 김이경이 그만큼 똑똑해서다.
어떻게 보면 최문경이 그룹 부회장 자리에 오른 것도 김이경이 알게 모르게 뒤에서 다 손을 썼기 때문이다.
최영란이 사원부터 시작해서 과장까지 묵묵히 걸어간 것도 그녀가 작업한 것이다.
실제로 최영란은 KM 그룹 가문 내에서는 가장 경영 수업을 잘 받았으니까.
최용욱 회장도 그런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영란이 넌 할 말이 많은가 보구나. 좋다. 어디 한번 이야기해 봐라.”
아마 이 자리에 최민수가 있었다면 단 한마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최영란은 최용욱 회장이 자리까지 마련해 주자 냉큼 지금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일을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KM 산업은 패키징 분야에서 글로벌 경쟁에서 앞서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반도체에 대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특히 수익성이 높은 주문형 반도체는 KM 산업의 미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구나.”
“사실 차입금이 가장 이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보류되었어요. 하지만 전 다른 대안으로 제휴업체를 통해서 우선 회로 선폭이 0.5um의 8인치 웨이퍼 생산 설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손실을 피하고자 위탁 주문에 주력하고 있고, TI 측과도 이미 협상을 끝냈습니다.”
TI는 아시아 반도체 시장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 협력 파트너로 KM 산업을 정했다. 실상 과거에 말 나온 차입금의 적지 않은 부분도 이 TI 자금이다.
최용욱 회장도 이미 보고를 받았던 내용이다. 다만 이 일을 책임진 이가 손녀 최영란이라는 것은 이 자리에서 알았다.
이에 최용욱 회장은 감탄했다.
‘허, 이놈 봐라.’
그는 힐끗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민혁아, 네 생각은 어떠냐?”
“원론적으로는 좋은 계획입니다.”
예상 밖의 이야기에 최용욱 회장도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제안에 재를 뿌린 최민혁 대답에 열받은 최영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원론적? 아니, 그러면 현실적으로는 나쁜 계획이란 소리냐?”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최민혁은 혀를 찼다. 그는 최영란의 미래를 잘 알았다.
지금 진행하는 협력업체 지분 중에 일부는 KM 산업이 투자한 거다.
후일 최영란이 그 지분을 승계받아서 완전히 독립해 버린다.
IMF를 거치면서 KM 그룹은 공중 분해되지만, 저 신생업체는 여전히 살아남아서 결국에는 상장까지 하게 된다.
‘전장에 특성화된 반도체 칩을 개발해서 나름 1,000억 매출 중견 기업으로 꾸준한 성장을 하니까.’
즉 최영란 과장의 능력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첫 단계에서 KM 그룹 공중 분해되면서 온갖 고통을 다 경험한다.
그 점을 지적한 것인데, 이 자리에서 말할 성격은 아니었다.
최민혁은 의외로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는 최문경 부회장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 역시 최민혁의 의견에 흥미를 느꼈다.
“흠. 일단 제가 실수했습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의 평가를 쉽게 넘기지 않았다.
“남자가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 하지 않겠냐. 영란이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네가 뭔가 부족한 점을 발견했다면 조언을 해줘야지.”
그는 최용욱 회장뿐만 아니라 따가운 가족의 시선을 느꼈다. 심지어 장승일 기획실장은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냥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자기 말에 너무 주의를 기울인다.
이게 바로 현재 최민혁이 받고 있는 위치다.
최민혁도 변덕으로 툴툴거렸다.
“뭐, 어려운 거 아닙니다. 수요 때문이겠죠. 주문형 반도체도 나름 돈이 되기는 하지만 어차피 만든 놈이 다 먹으니까. 비메모리가 괜찮지만, 그 시스템이 더 중요합니다.”
최영란 과장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도 모를 수가 없는 일이다. 다만 이 자리에서 굳이 자기 계획을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최용욱 회장은 정말 흥미로운 눈으로 최영란 과장을 쳐다보았다.
“네 대답은 어떠냐?”
“···하아, 민혁이 말이 맞습니다. 시작은 위탁 생산이지만 향후 전문성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전장 분야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고개를 갸웃한 채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이미 전장 분야에 대한 사업 기획서를 보고받았던 장승일 실장은 머뭇거렸다. 이 자리에서 논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이야기다.
밥 먹으러 와서 무슨 기획실 팀 미팅을 할 것은 아니니까.
최용욱 회장도 흥미를 느꼈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영란을 쳐다보았다.
“좋다. 내가 올린 사업 기획서는 다시 한번 기조실에서 살펴보마.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제대로 한번 밀어주마.”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최영란.
오히려 최문경 부회장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 역시 최영란에게서 자주 들은 이야기였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달랑 최민혁의 몇 마디에 아버지 의견이 180도로 바뀌었다.
‘진짜 괜찮을까?’
최용욱 회장은 오히려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최영란을 계속 칭찬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도 최용욱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의도적으로 장남 최문경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최영란을 띄운다는 것을 알았다.
덤은 자신과의 관계 개선이다. 이미 악화 일로를 걷고 있는 두 사람이 좋아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확실히 비메모리 분야도 괜찮지. MP3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이니까.’
***
최민혁은 가족 식사 자리를 끝내고 나서는 조용히 물러났다.
그는 다양한 의문을 가진 시선을 느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할아버지 제안에 충실했다고 생각했다.
이보다는 습관적으로 MP3 프로젝트 진행 사항을 검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베이직 디자인의 MP3 프로토타입이 나온 것을 확인하자 최병연 팀장을 바로 호출했다.
최병연 팀장은 최근 MP3 프로젝트 진행을 맡았기에 혼란스러운 위성 사업부 사태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끄러운 위성 사업부 일보다는 드디어 샘플로 나온 MP3를 들고 조성돈 팀장과 같이 실장실로 향했다.
동행한 조성돈 팀장은 MP3 PT 결과물을 보면서 계속 감탄했다.
“···정말 놀랍습니다.”
명함 크기의 반에 해당하는 이 새로운 MP3는 무게가 고작 45g에, 두께는 12mm에 불과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