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오현종 팀장도 김문호 박사가 가져온 모의 시뮬레이션 결과를 살피면서 혀를 찼다. 그 역시 최민혁의 내놓은 자료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다만 아직 결과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 정도였다니.’
예측한 것보다 월등한 시뮬레이션 결과에 김승구 팀장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급하게 연구 보고서를 살폈다.
“이럴 수가.”
실제 검증에서는 더 나빠지리라는 결과와는 또 달랐다.
김문호 박사는 석연치 않은 두 사람의 행동에 결국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오현종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는 김승구 팀장을 보자 손짓으로 김문호 박사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한 후에 이 보고서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최민혁 실장의 갑작스러운 제안과 협박에 연이어서 나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김문호 박사 역시 이동호 교수나 송한성 교수 연구 팀 자료를 짜깁기해서 베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소스가 KM 전자였다는 말에 황당했다.
“아니, 지금 저더러 믿으란 말입니까? KM 전자의 위성 사업부 그놈들은 쥐뿔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연구 성과물을 내놓는다는 말입니까?”
이일태 이사는 심지어 외주 업체를 통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따라서 질적으로도 별로지만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따로 관리하는 비밀 연구 팀이 있다면 말이 되지. 대표적인 것이 바로 콜린스잖아. 갑자기 튀어나온 그 물건도 KM 전자 비밀 연구소에서 개발되었다고 봐야 해.”
“콜린스라면······.”
김문호 박사가 콜린스를 모를 수가 없었다. 당장 이 사무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 바로 그 유명한 콜린스이니까.
ETRI 역시 순수한 호기심 때문에 콜린스를 대량으로 사들여서 이미 몇 대는 분석용으로 분해된 지 오래였다.
‘더욱이 시즈벨이라니.’
두 사람과는 달리 시즈벨과 된통 싸운 연구 팀 팀장에 대한 이야기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들었다.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괴롭힌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기존 시스템에서 송한성 교수나 이동호 교수의 성과물을 배제할 수도 없었다. 적지 않은 부분이 MPEG 표준으로 잡혀 있었다.
시즈벨이 나서서 소송을 걸면 지금까지 하던 연구는 다 중단이다.
김문호 박사도 짜증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을 더 타박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걸 KM 전자에서 고안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미국조차 이제 겨우 상업용 위성 방송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알아. 그래서 자네에게 몰래 부탁한 것 아닌가.”
“정말 두 분은 모르는 사실입니까?”
오현종 팀장은 착잡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상황이 자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해.”
“아니, 그러면 이창명 이사 그 새끼는 도대체 뭡니까? 완전히 지가 ETRI 원장이라도 되는 양 설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친구도 최민혁 실장 때문에 개 쪽을 당했잖아. 그러니 원한 때문에 그런 거야. 실상은 쥐뿔도 모르는 거야. 박재호 실장은 오성 전자만 믿고 설치는 거야. 그냥 이창명 이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네.”
“하,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습니까.”
“미안해. 그런데 수정 작업을 하려면 얼마쯤 걸리겠나?”
두 사람의 질문을 들은 김문호 박사는 혀를 차면서 대답해 주었다.
“한 달도 채 안 걸릴 겁니다. 워낙에 안정도가 높아서 기존 시스템에서 생기는 문제가 안 생기니까요. 나머지 수정 작업이야 기존 코드를 가지고 변경만 하면 되니까.”
일정을 걱정한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했다. 그들 역시 예측하기는 했지만, 실무진의 증명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러면 자네가 비밀리에 수정 작업을 해.”
“이거 혹시 박 실장님은 모르는 사실입니까?”
“아니, 알지. 그냥 보험 삼아서 해놓으라고 한 것이니, 그렇게 알아. 다만 보안 때문에 그쪽 지인에게도 알리지 마.”
“···알겠습니다.”
김문호 박사도 수상쩍은 두 사람을 쳐다보았지만 더 질문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창명 이사가 싫었고, 그놈 위세를 믿고 날뛰는 동료도 증오했다.
오현종 팀장은 다시 한번 문건을 살피고 나서 최민혁 실장에게 위성 방송 시스템 조정과 관련된 일정을 다시 보냈다.
‘이게 최선이야.’
***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은 나름 자기 인맥을 총동원해서 ETRI 내부를 샅샅이 살폈지만, 김문호 박사가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일에 대한 것을 찾지는 못했다.
ETRI가 워낙에 많은 연구원이 있고, 내부적으로 복잡하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결국 단순히 오성 전자의 이창명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것만 파악했다. 이창명이 KM 전자 위성 사업부를 두들기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파악하지 못했다.
‘정말 별일이 아니란 말인가?’
그래서 더 당황했다.
고작 이런 일 때문에 아버지에게 찍힌 것이다.
그의 아내 김이경도 최문경 부회장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당신, 회사 일 제대로 하는 것 맞아요?”
“걱정하지 마.”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어요. 이번 사장단 회의에서 난리가 났다면서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이 아냐.”
“아버님께서 요즘 사장단 회의에 빠지지 않고 나오신다고 들었고, 그 자리에서 당신을 숨김없이 그대로 깨는 것까지 확인했어요. 자꾸 헛소리할 거예요?”
차갑게 달려드는 김이경의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나 피곤한 최문경 부회장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불만을 품은 것은 김이경만이 아니었다.
장녀 최영란 역시 집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칼을 들이댔다.
“아빠, 도대체 회사에서 무슨 일이 터진 거예요? 사장단 회의에서 난리가 났다고 하던데요?”
졸업 후에 KM 산업 기획 팀에서 꾸준하게 경영 수업을 받아서 과장까지 진급한 최영란은 다른 재벌 3세와는 달랐다.
질문과 태도가 딱 전형적인 대기업 꼰대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최문경 부회장은 정신적으로 더 피곤했다.
“별일 아냐.”
“할아버지가 경영 전면에 나섰는데, 어떻게 별것 아닌 게 되죠?”
“비메모리 합작 법인 준비나 잘해. 그 일이 할아버지가 원한 것이니까.”
“이미 합작법인 대상과 제휴협상은 잘 진행되고 있어요. 그래서 더 이상해요. 할아버지가 왜 경영 전면에 다시 나섰는지 알 수가 없어요.”
최영란은 아버지의 대답에도 차갑게 대응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속한 KM 산업 기획 팀에서는 이미 꾸준히 수익성이 높은 주문형 반도체 쪽으로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차입금도 따지고 보면 이 분야에 대해 투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차입금 이야기가 붕 뜨면서 최영란 과장이 참여하고 있던 이 비메모리 쪽도 같이 허공에 떠 버렸다.
결국 차입금 대안으로 협력업체를 통해서 이 분야에 투자를 늘릴 계획이었다.
이 모든 일은 다 최용욱 회장이 과거에 늘 주장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의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 후에 최용욱 회장은 이런 일에 아예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최영란 과장 처지에서는 환장할 일이었다.
“아빠, 정말 회사에 문제가 없는 것 맞아요?”
“괜찮다니까.”
하지만 최영란 과장도 이전처럼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민혁이 일은 어떻게 된 거예요? 걔 기획실장으로 잠깐 있다가 물러나는 것 아니었어요. 그러면 평사원부터 시작한 제 꼴은 뭐가 되는 거예요?”
평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 과장 직급까지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있는 최영란 과장도 최민혁의 행보 때문에 단단히 열이 받아서 이제까지 쌓아두기만 했던 감정을 분출했다.
“······.”
안 그래도 아버지 일 때문에 피곤한 최문경 부회장은 모녀의 협공에 너무 힘들어서 아무런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아내 김이경의 눈치를 보는 그로서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차가운 눈을 한 김이경이 옆에서 팔짱을 한 채 매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대학 졸업반인 둘째 최지연이 안으로 들어왔다가 두 사람의 갈등을 발견했다. 그녀는 김이경을 닮아서 눈치가 빨랐다. 최지연은 저녁 먹고 들어왔다는 말만 한 채 이 층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최영란의 목소리는 마치 유명 성악가가 웃고 갈 정도로 가파르게 올라갔다.
“아빠, 제발 말 좀 해보세요. 정말 민혁이가 할아버지에게 증여받은 돈이 그저 차명 지분 때문인가요. 아니면 진짜로 증여한 것 맞아요?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전 장녀란 말이에요!”
“그건··· 아니다.”
다행히도 마침 최용욱 회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용욱 회장 전화를 핑계로 일어서다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식사 초대에 흠칫 놀랐지만 알았다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주말에 잠깐 식사를 하자는구나.”
그는 굳이 아내나 장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자기 서재로 올라갔다. 최민혁의 이름이 새삼 그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민혁이 이놈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주 돌아버리겠네.’
***
최민혁도 오영근 사장을 통해서 최근 KM 그룹 사장단 회의의 분위기를 들었다. 그는 한참 동안 웃었다. 딱 봐도 최문경 부회장이 지금 어떤 꼴을 당하고 있는지 금방 눈치챘다.
‘첫째 큰어머니가 보기와는 달리 사람 피를 말리는 스타일이니까.’
인생 1회차에서 이미 집안에서 봤던 가정불화를 떠올리면서 흐뭇하게 미소 짓다가 마주한 오영근 사장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오영근 사장은 이전과는 달리 최민혁에게 그 어떤 우려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따로 최용욱 회장을 만나서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원래 KM 전자 사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하려고 했었는데, 상황이 달라졌다.
“고맙네.”
“제가 고맙죠.”
“아니야. KM 전자가 내 마지막 직장 생활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어. 그렇다고 내가 뭘 내세울 생각은 없어. 그래서 최 실장 자네가 더 고마울 뿐이야.”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제 성정은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제가 계속 설치기만 했다면 직원들 반감이 대단했을 겁니다.”
“하면 내가 그 반감을 희석했다는 소리인가?”
“물론입니다.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도 능력입니다.”
“내 얼굴에 금칠할 생각은 말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역할이 있게 마련입니다. 제가 싸움닭처럼 온통 세상을 뒤집는다면, 남은 이들을 보듬어 안아줄 분이 바로 사장님입니다.”
“그런가?”
떨떠름한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 실장의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정말 진지했다. 그는 누구보다 세상일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흔히들 덕장이라고 합니다. 전 오영근 사장님이 최고의 덕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참.”
오영근 사장도 최민혁 실장의 칭찬이 싫지 않은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다시 살폈다.
그저 생각 없는 돈키호테처럼 온갖 사고를 다 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또 아니었다.
‘하긴, 회장님이 날 보고 그렇게 칭찬했던 적은 또 없으니까.’
이유야 어쨌든 KM 전자 성장이 KM 그룹 전체를 주도했다. 따라서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 벌써 부회장 승진 이야기가 나왔다.
두 명의 부회장.
어떻게 보면 최용욱 회장이 노골적으로 최문경 부회장을 견제하려는 의도다.
오영근 사장으로서는 잘만 하면 그 이상도 노려볼 만했다.
최용욱 회장이 물러나고 나면 자신이 전문 경영인으로 나설 수도 있으니까.
이 모든 일이 다 최민혁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최민혁 실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저 자신이 호가호위라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덕분에 오영근 사장을 따라서 뒤늦게 나타난 KM 정공을 비롯한 몇몇 계열사 사장과 가벼운 티타임을 가졌다.
그들은 최문경 부회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깊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
의외로 최민혁을 다들 알아봤다. 그들은 최용욱 회장 저택을 오가면서 당시 최민혁을 봤던 것이다. 그때는 그저 단순한 서자 정도로만 생각했다.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물론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정확히는 KM 그룹에 대해서 욕심이 없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 견제라는 수단에서 본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KM 계열사 사장단의 호의를 얻는다면 할아버지의 신뢰를 더 얻을 수도 있다.
‘잘만 하면 KM 산업 지분을 얻을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