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자꾸만 달라붙는 계열사 사장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들은 거머리처럼 최문경 부회장을 달라붙어서 계속 칭얼거렸다.
안 그래도 사장단 회의에서 열이 잔뜩 받은 최문경 부회장의 머리가 폭발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니까!!”
“아, 죄, 죄송합니다.”
쩌렁쩌렁한 최문경 부회장 태도에 그제야 친 부회장파는 뒤로 물러났다.
문제는 오영근 사장의 뒤를 따라붙는 이들은 아예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아예 작정하고 최민혁 쪽으로 노선을 갈아탔다.
지난 사장단 회의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현상이었다.
‘저 개새끼들 봐라. 아주 작정을 했구나.’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아직 계열사 사장 중에는 최문경 부회장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는 최용욱 회장 때문에 참고 있었는데, 최민혁이라는 계기가 생기자 사태가 이렇게 흘러간 것이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위기감을 느꼈지만 대놓고 그들을 질책할 수가 없었는데, 비릿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최동영의 시선에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의 자식이.’
잠깐 휴전하자고 했던 물밑 협상도 최용욱 회장이 나타나면서 다 달라졌다.
이리저리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아파서 이마를 지그시 누른 채 부회장실로 가는 중에 경비원이 끌고 나가는 사람을 발견했다.
[부회장님, 저, 이일태 이사입니다. 제발 한 번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그는 힐끗 당황한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쟤는 왜 저래?”
“그게······.”
“또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
이일태 이사가 굳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권재홍 비서실장은 그룹 비서실을 통해서 돌아가는 상황을 전반적으로 다 파악했다. 최소한 오성 전자와 ETRI 움직임은 자세하게 알았다.
아니, 애초에 이 일을 작업한 사람이 최문경 부회장이니 모른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했다.
다만 권재홍 비서실장도 최근 오성 전자의 행보에 관해서 보고를 미루었다.
최용욱 회장의 경영 참여 때문에 민감한 최문경 부회장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이일태 이사가 나타난 마당이라 어쩔 수 없이 관련 보고서를 최문경 부회장에게 넘겼다.
최문경 부회장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까지 흘리면서 하소연하는 이일태 이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부회장님,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살려면 주신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
소파 옆에 엎드린 채 칭얼거리는 이일태 이사 모습은 그로서도 당황스러웠다. 그는 보고서를 대략 확인하고서야 이일태 이사의 행동을 수긍했다.
뒤늦게 최훈열 전무, 김현우 상무에 대한 기억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민혁이 이 새끼가 진짜 보통이 아니구나.’
딱히 공갈하거나 협박한 것도 아니다. 대놓고 회사를 그만두라고 사직을 권고한 것도 아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다루어야 저 모양이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일태 이사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 살 방법은 최문경 부회장 도움을 청하는 방법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위성 사업부는 점점 폐지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상황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
오성 전자의 이창명 이사는 아예 작정하고 KM 전자의 위성 사업부를 죽이려 했다. 황당한 것은 그가 KM 전자 상황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일태 이사는 임원답지 않게 사전에 이 문제를 대응책을 대비하지 못했다. 오성 전자가 행패를 부렸다고 해도 몇 년간의 결과가 아무것도 없다면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일태 이사가 살 수 있는 대안 중의 하나는 KM 그룹 계열사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었다.
아마 최용욱 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기 전이라면 최문경 부회장도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지금은 곤란했다.
만약 최용욱 회장이 이일태 이사가 KM 그룹 다른 계열사로 옮겨 간 것을 알면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봐, 이일태, 자네 사정을 알았으니 소파에 가서 그냥 앉아.”
“제발 이번 한 번만 살려만 주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지랄하지 말고, 옆에 앉아!”
이일태 이사는 그제야 수줍은 새색시처럼 소파에 앉았다.
ETRI 관련 보고서를 다시 살피던 최문경 부회장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최민혁의 행보, 이창명의 보복, ETRI 내부의 갈등에 대한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도.
“으음, 좋아. 일단 상황은 알았으니까. 회사에 가 있게. 당장은 민혁이도 자네도 어떻게 할 것 같지 않아. 나도 확인을 해봐야 하니까.”
“가, 감사합니다.”
이일태 이사는 벌떡 일어나서 최문경 부회장에게 구십 도로 허리를 숙였다.
최문경 부회장도 평소라면 이 상황을 느긋하게 즐기겠지만, 지금은 그저 눈살만 찌푸렸다. 그는 이일태 이사가 부회장실을 나선 것을 보자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왜 보고를 안 한 거야?”
“죄송합니다. 그게 회장님 때문에 부회장님이 너무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서······.”
“빌어먹을!”
사실 최용욱 회장의 사장단 회의에 나타난 것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날벼락이었다.
KM 전자에 대한 교통정리만 하던 최용욱 회장이 갑자기 태도 변화를 바꾸었던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크게 당황했다. 그 역시 경영 승계를 확신하던 차에 일어난 일이라서 이 상황에 펄쩍 뛰었다.
더 심각한 것은 최용욱 회장의 최민혁 예찬론이다.
사장단 회의석상에서 숨김없이 그대로 KM 전자와 KM 계열사를 비교했다.
장승일 실장은 한술 더 떠서 KM 전자가 마치 최용욱 회장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였다는 뉘앙스를 계속해서 보냈다.
‘장 실장 그 새끼는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다니까.’
최문경 부회장은 잔뜩 인상을 구기다가 뒤늦게 긴장한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후유, 아니다. 자네 생각은 어때?”
“이일태 이사라면 당장은 포기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때문에 그래?”
“네. 회장님이 만약 이 사실을 알면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이미 KM 계열사의 구조조정을 이야기하고 있고, 장 실장은 기획 조정실을 통해서 임원급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그거 진짜였어?”
“네. 제가 확인한 바로는 사실입니다. 특히 돈이 안 되는 사업부는 최민혁 실장이 한 구조조정 방식에 따라서 대부분 정리하는 것으로 결정이 난 것으로 압니다.”
또 최민혁 실장.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 역시 냉정하게 KM 전자의 성공 스토리를 다시 떠올렸다.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짜증으로 미칠 것 같지만, 조카 최민혁이 한 일은 가히 경영의 정석이었다.
불필요한 사업을 다 정리하고, 핵심 수익 사업만 남겼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에 따른 투자를 진행해서 신제품을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회사 수익성과 브랜드 이미지를 높였다.
천문학적인 부채를 갚아 나가면서 회사 부채율도 벌써 70%까지 떨어졌다. KM 그룹 중에서 가장 안정적인 회사로 거듭난 것이었다.
덕분에 당장 망할 것이라며 그렇게 씹던 증권가 분석가조차 이제 KM 전자를 혁신과 변화의 기업으로 예찬했다.
KM 전자 주가는 조정을 거쳐서 결국 8만 원권에 안착했다.
단순히 주가조작에 따른 일시적인 일이 아닌 게, 이제는 KM 전자 가치가 8만 원이었다.
최문경 부회장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게 모두 콜린스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KM 전자의 콜린스 초대박 때문에 관심을 두는 이들이 많습니다. 10대 대기업은 물론이고, 정치 쪽에서도 흥미를 느낍니다.”
“정치에 이용하려고?”
“네. 회장님이 직접 나선 덕분에 KM 전자는 미처 잘 모르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부터 이런저런 행사에 참여한 것도 다 최 실장님을 대행한 것으로 압니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이 굳이 더러운 정치에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흙탕물을 대신에서 뒤집어썼다.
최민혁이 빨리 자리를 잡도록 알게 모르게 도와준 것이었다.
그러니 최용욱 회장도 자신이 최근 한 일이나 오성 전자의 행보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이 정보를 흘렸다.
그런데 결과만 놓고 보면 그 불똥이 자신에게도 튀었다. 바로 최용욱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선 것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돌겠네.”
최문경 부회장 역시 알음알음 아는 지인을 통해서 다 들은 내용이다. 그도 설마 하던 이야기가 진실이 되자 크게 당황했다.
“그러면 위성 사업부는 어떻게 해?”
“현재로서는 이미 늦었습니다. 오성 전자의 이창명 이사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를 해왔습니다. 지금 봐서는 LC 전자나 대운 전자를 노린 행보였는데, KM 전자를 죽이는 방향으로 선회했습니다.”
“아니, 위성 사업부는 민혁이 그놈이랑 아무런 관계가 없잖아.”
“그걸 이창명 이사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최민혁이 KM 전자 주인이니, 위성 사업부를 날리면 그것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사실이잖아. 위성 사업부 손실은 KM 전자에도 손해지.”
하지만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도 바보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최 실장 행보를 보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습니다. 이창명 이사를 이용해서 이일태 이사를 제거하고, 돈이 안 되는 위성 사업부를 날릴 목적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하잖아. 아니, 민혁이 그놈이 회사 손해를 보면서 이일태 이사를 날린다고? 그냥 이일태 이사를 처리해도 될 문제를 그렇게 복잡하게 엮는다고?”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오성 전자나 ETRI 쪽을 샅샅이 살펴봐. 뭔가 다른 일을 꾸미는 것이 분명해.”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앞으로는 조심해. 아버지가 따로 감시하는 것 같으니까.”
“···네.”
***
이창명 이사는 박재호 실장과 손을 잡고 나서는 그의 힘을 이용해서 ETRI 내부를 들쑤셨다. 그는 이번 기회에 ETRI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려고 작정했다.
실제로 효과는 꽤 있었다.
이번 위성 사업 투자를 받은 연구 팀 팀장을 계속해서 만나면서 로비를 했다.
현금이 넘쳐 나는 오성 전자가 대놓고 밀어준다는데, 이를 반대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이미 오성 그룹을 통해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성장한 오성 라인 ETRI 연구진은 기꺼이 이창명 이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ETRI 내부는 단순히 오성 그룹 지지파가 있지는 않았다.
순수 ETRI 파를 비롯한 다른 대기업 장학생 출신도 있었다.
그리고 누구의 지원을 받지 않은 채 묵묵히 연구만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김문호 박사가 그런 경우다.
그렇다고 돈키호테처럼 나대는 사람은 아니라 조용히 자기만 일만 하면서 튀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현종 팀장이나 김승구 팀장이 김문호 박사를 믿는 이유다.
하지만 김문호 박사조차 새로운 위성 시스템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위성방송 표준 중에 가장 중요한 항목 중의 하나인 복조기에서 초기 주파수 오차를 줄일 수 있는 알고리즘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블 전송률이 이렇게 높다니.”
초기 주파수 전송률이 너무 낮고, 초기 주파수가 너무 낮아서 특수한 알고리즘이 필요했다.
그런데 K&M 알고리즘은 낮은 SNR에서도 최고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덕분에 하드웨어 구조가 혁신적으로 감소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복조기 제어기 구조를 대폭 절감할 수도 있고, 위성 출력 역시 전반적으로 다 줄일 수가 있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위성 채널 문제도 대폭 개선할 수가 있었다.
황당한 결과에 놀란 김문호 박사는 허겁지겁 오현종 팀장을 찾아갔다.
“도, 도대체 이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어지간한 일에 그저 웃기만 하던 김문호 박사의 표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단하지?”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사전에 이걸 알았다면 왜 말하지 않은 겁니까. 지금까지 제어기 설계 때문에 삽질한 비용이 20~30억은 족히 들어갑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할 필요가 없었지 않습니까?”
혁신적인 이론에 화를 내는 것은 말이 안 되지만 문제는 타이밍이다.
이미 막바지 단계에 와 있는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알고리즘이 튀어나왔다.
“그게······.”